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영원한 20세 청년 백상호

< 2022년 조지 메이슨 야구부는 백상호를 기리며 44번 패치를 팔에 달고 한 시즌을 치렀다. 출처 = George Mason Athletics >

본 글은 故백상호 선수 가족의 동의를 얻고 게재합니다. 백상호 선수 가족과 연락하는 데 도움을 준 제니퍼 스트리터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합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위치했으며 우리나라에 캠퍼스도 설치한 조지 메이슨 대학교. 900석의 좌석이 설치된 조지 메이슨의 홈구장 스퓔러 필드 한편에는 아직은 어린 산딸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훌륭한 야구 선수, 그리고 더 훌륭한 친구’라는 팻말과 함께 하나의 이름이 적혀있다. 백상호. 2001년 1월 31일 태어나 2021년 6월 12일 세상을 떠난 한 한국인 투수의 이름이다.

< 조지 메이슨 대학교 홈구장 스퓔러 필드에 심은 산딸나무 아래 세워진 팻말. 출처 = The Palm Beach Post >

고작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백상호는 모두의 모범이자 누구에게나 친근한 청년이었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장례식이 열렸던 날, 인구 약 3만 명이 사는 메릴랜드주의 작은 마을 솔즈베리엔 400명이 모여 그의 곁을 지켰다. 2014년 낯선 솔즈베리로 건너온 백상호의 공을 처음으로 받아준 유소년 팀 동료 코너 레포트가 제일 먼저 송별사를 읽었다.

백상호의 사인은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 이른바 토미 존 수술 이후 발생한 폐색전증이었다. 혈전이 폐동맥을 막아버리는 아주 심각한 질환이다. 그리고 토미 존 수술 합병증으로 최초로 보고된 사망 사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백상호의 사망 소식은 전해졌다. 하지만 부고와 사인을 알리는 수준에 그친 단신에 불과했다. 필자 또한 그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전에 알게 됐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백상호의 일생을 많은 사람이 공유했다. 디 애슬레틱의 스티븐 네스빗이 그의 생애를 다룬 글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그의 기사  ‘His name is Sang. He is a pitcher.’ A family’s American dream, their unbearable loss’는 2021년 디 애슬레틱 최고의 기사 중 하나로 선정됐다. 어린 투수와 토미 존 수술과의 관계로 논문을 써 컬럼비아 언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제니퍼 스트리터 또한 2023년 백상호의 생애를 다시 다뤘다.

백상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나 지난 지금,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것이 뒤늦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먼 이국에서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꿈을 위해 묵묵히 걸어가던, 그리고 자기 주변을 항상 사랑하고 존중하며 하나의 팀을 만드는 데 헌신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고국에서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꿈을 이어주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

소방설비를 관리하던 아버지 백승한과 오페라 가수를 육성하던 어머니 이은영 사이에서 태어난 백상호와 두 살 어린 동생 백선호로 구성된 네 식구는 아메리칸드림을 희망하며 태평양을 건넜다.

백상호는 8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은 1986년 KBO 리그 신인왕인 김건우였다. 강동 리틀 야구단에서 어린 백상호를 지켜본 김건우는 백상호가 뛰어난 어깨를 가졌기에 훌륭한 투수로 자라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류현진을 바라보며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꿈을 꾼 백상호는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소년 세계 대회 중 하나인 2013 칼 립켄 월드 시리즈에 한국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결정된 후 백상호는 부모님에게 미국에서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만큼 그에게 야구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던 백승한은 아들의 꿈을 이어주기 위해 비행기에 타기 전 다음의 세 문장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외웠다.

“Can my son play on your team? His name is Sang. He is a pitcher.”  

우리 아들이 이 팀에서 뛸 수 있을까요? 이름은 상입니다. 투수예요.

백승한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산 것은 낡은 검은색 자전거였다. 그걸 타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퇴근 후 몇 날 며칠 동안 자전거를 타고 동네에 있는 모든 야구장을 돌았다. 백 씨 가족이 정착한 솔즈베리는 인구를 기준으로 서울의 33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야구팀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백상호의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솔즈베리에 처음 도착한 것은 4월, 이미 모든 유소년팀의 선수 모집이 마감되고도 한참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력과 사랑에 감동한 한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13살 백상호는 미국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김건우의 말처럼 백상호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이 노력과 합쳐지며 백상호는 미국에서 야구로 소통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국 첫 번째 포수인 레포트는 백상호 같은 투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면서 자기가 원하는 공을 자유롭게 던졌던 백상호를 회상했다.

 

동네에서 제일가던 오른팔

공을 던지는 손인 오른손에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았던 백상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에 있는 제임스 M. 베넷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제시 세리그의 눈에 들었다. 7학년 백상호의 투구를 본 세리그는 저런 공을 던지는 13살도 놀라웠지만 그 공을 아무 장비도 없이 받는 아버지 백승한도 놀라웠다고 말했다.

세리그는 2년 후 베넷 고등학교에 입학한 백상호를 잊지 않았다. 3월 초 섭씨 4.5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상호는 60명의 참가자 중 유일하게 반팔로 운동장에 나섰다. 세리그는 다른 코치들에게 백상호를 주목하라 귀띔했고, 9학년 백상호는 거침없고 당당하게 학교 대표팀에 선발됐다.

미국 고교야구에서도 고등학교 신입생이 대표팀에 한 자리를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창 성장기인 선수들의 특성상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선수가 힘이 더 센 것이 당연하며, 미국 또한 대학 입시와 선수의 미래를 생각해 고학년이 저학년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는다. 그러나 백상호는 첫해부터 선발투수로 나섰다. 베넷 고등학교의 라이벌 학교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등판 한 백상호는 6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유니폼에 땀자국 하나 안 남기고 평온하게 공을 던진 백상호에 대해 팀원은 그가 정말 침착하고 겁이 없다고 생각했다.

감독 세리그는 아무래도 백상호가 경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다고 그의 부모님께 이를 전달했다. 백승한은 백상호가 집에선 매번 너무 떨린다고 말했다면서, 아무도 그의 속을 알아채지 못하는 거 같다고 답했다.

< 2019년 메릴랜드주 클래스 3A 결승전에 등판한 백상호. 출처 = The Athletic. >

신입생 때부터 팀의 분위기메이커로 팀원의 긴장감을 줄여줬던 백상호는 11학년이던 2019년, 모교를 메릴랜드주 클래스 3A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선발투수가 아닌 마무리투수로 이번 시즌에 나선 그는 거의 모든 경기에 나섰다. 베넷 고등학교는 10승 0패로 시작한 시즌이 11승 5패가 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라이벌과 2018년 우승팀 등을 차례로 꺾으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우승을 향한 열망으로 팀원 모두와 함께 금발로 염색한 백상호는 2013년 자기가 던졌던 메릴랜드주 애버딘의 칼 립켄 스타디움에서 3A 결승전을 치렀다. 5-3으로 앞선 7회초, 백상호는 선두타자를 0-2 카운트에서 사구로 내보냈다. 그러나 다음 두 타자를 땅볼로 잡아냈고, 마지막 타자에게는 빠른 공으로 삼진을 잡았다. 백상호는 경기 전 ‘남들이 글러브를 하늘로 던질 때 나는 반대로 할 것이다’라고 동생과 약속한 것처럼 글러브를 땅에 꽂았다.

 

그간 열심히 뛴 증거

백상호는 고등학교 졸업반인 2020년 코로나19로 경기를 치르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의 행선지는 정해진 상태였다. 조지 메이슨대 유망주 캠프에 참가한 백상호를 인상 깊게 바라본 당시 감독 빌 브라운과 투수코치 숀 캠프(현 조지 메이슨 감독)는 비록 그가 175cm의 작은 키지만 잠재력이 출중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백상호에게 NCAA D1 애틀랜틱 10 컨퍼런스에서 뛸 기회를 장학금과 함께 제안했다. 백상호는 그렇게 조지 메이슨에 2020년 가을에 입학한다.

그러나 대학 입학 직후 팔꿈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처럼 하루 이틀이면 낫던 통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아팠다. 결국 팔꿈치 상태를 확인한 백상호는 한 의사에게는 수술을 권유받았고, 다른 의사에게는 휴식과 재활 소견을 받았다. 백상호는 후자를 선택하고 다음 봄까지 낫기를 기다렸다. 한국계 미국인이면서 두 살 더 많은 투수 맷 헨슨이 백상호와 함께 다니며 부상에 신음하는 그를 격려했다.

8살에 야구를 시작해 백상호는 숫자 8을 좋아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다른 선배가 8번을 사용하고 있어서 희망하는 8번을 달지 못했다. 대신 8을 둘로 쪼갠 44번을 달고 2021년 시즌 개막 로스터에 합류했다. 평균 90마일을 기록하는 빠른 공도 있었지만 백상호의 주무기는 60마일 중반대를 기록하는 각이 큰 커브였다. 팀원들은 그의 변화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억했다. 조지 메이슨 코치진은 그의 능력이 D1에서 충분히 먹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백상호가 팀원과 훌륭한 관계를 만든 것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말이 적은 편이었지만 백상호는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했다. 브라운은 타자의 타격 연습 때 투수들이 보통 중견수 자리에 서서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백상호는 혼자 좌우로 뛰어다니며 뜬공을 잡으러 다녔다면서 그의 에너지를 칭찬했다.

그의 첫 경기는 3월 12일 UMBC와의 경기였다. 비록 팀은 패배했지만 백상호는 1.1이닝 동안 안타 두 개를 내줬지만, 1탈삼진을 섞어 무실점 경기를 펼쳤다. 백상호는 첫 다섯 경기 동안 7.1이닝 2실점 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 2021년 4월 11일 SLU와의 홈 경기 9회초. 백상호가 삼진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출처 = YouTube “The Memory of Sang Ho Baek” >

그러나 백상호는 시즌을 끝까지 보내지 못했다. 팔꿈치 통증이 백상호를 더욱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음 두 경기에서 백상호가 2.1이닝 5실점을 기록하자 코치진은 백상호에게 남은 기간 휴식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토미 존 수술 일정을 잡았다. 백상호는 처음엔 수술이 두려웠지만 이내 재활 계획을 세웠다. 백상호는 수술 후 재활을 무사히 잘 마친다면 전보다 더 뛰어난 투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상하지 못한 경과

1학년을 마친 백상호는 2021년 6월 8일 워싱턴 내셔널스의 팀닥터를 맡았던 위에미 두오기에게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신체 다른 곳에서 인대를 떼서 손상된 팔꿈치 인대를 교체하는 토미 존 수술은 위험 요소가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술로 여겨졌다. 1974년 토미 존이 처음으로 수술을 받은 이래 수술 직후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찢어진 팔꿈치 인대를 대체하기 위한 인대는 주로 세 가지가 사용된다.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되는 선택지는 손에 있는 긴손바닥근 인대. 그러나 약 10~20% 사람에겐 긴손바닥근이 없다. 다음으로는 햄스트링에 있는 인대이다. 최근에는 발가락 신전건을 사용하거나 의료용 테이프를 사용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백상호는 허벅지에 있는 인대를 사용해 팔꿈치에 이식했다. 그러나 인대를 적출한 허벅지에 문제가 발생했다. 백상호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진통제를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해 집도의에게도 연락했지만, 집도의는 수술 과정은 정상이었다고 답했다.

의식과 호흡을 잃은 백상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슬프게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여동생 백선호였다. 6월 12일 자정 무렵 백상호의 가족은 그를 인근 응급실로 이송했지만, 백상호는 돌아오지 못했다. 오전 9시 12분, 의사는 백상호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부검 결과 전술했듯이 백상호는 토미 존 수술 이후 발생한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백상호의 부고는 그의 주변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베넷 고등학교 감독 세리그는 부고를 들었을 당시 고등학교 졸업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상실감에 빠져들었고 졸업식이 야외에서 진행되어 선글라스를 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백상호의 대학교 팀 동료 모두 소식을 듣자 우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기억하는 건실한 청년

대학을 막 졸업해 고향에서 다음 삶을 준비하던 선배 투수 조나단 카이저는 백상호가 그에게 그리울 것이라고, 앞으로도 여러 조언을 얻기 위해 전화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카이저는 백상호가 자기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를 그리워했다. 대학원 진학과 함께 팀에서 1년 더 뛰기로 한 1루수 스캇 모건은 백상호 가족을 위한 모금 활동을 진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여름 야구를 준비하던 조지 메이슨 선수들, 고등학교 때 그와 함께 땀을 흘린 동료들이  백상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로 다시 모였다. 백상호는 초록색과 노란색 줄이 인상적인 조지 메이슨의 44번 유니폼을 입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글러브를 왼손에 낀 채 관 속에서 늘 마운드에서 보여준 평온한 표정을 보여줬다.

< 2022년 3월 19일, 조지 메이슨 홈구장 스퓔러 필드에서 백상호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출처 = George Mason Athletics. >

2022년 시즌, 조지 메이슨은 백상호를 추억하며 여러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선수단은 2022년 시즌 내내 백상호의 등번호 44번이 새겨진 패치를 팔에 달았다. 그의 44번 유니폼은 덕아웃에 항상 걸려있었다. 그리고 2022년 3월 19일, 백상호를 영원히 조지 메이슨의 선수로 기억하기 위한 행사가 치졌다. 백상호의 등번호 44번이 홈플레이트 뒤에 그려졌다. 백상호의 가족과 조지 메이슨 대학교 총장 그레고리 워싱턴을 비롯한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식수 행사가 열렸다.

백상호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4년. 이제는 그와 함께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는 베넷 고등학교에도 조지 메이슨에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백상호는 추억하고 싶은 사람이다. 지난봄, 백상호 동기의 졸업에 맞춰 조지 메이슨 야구부는 작지만 특별한 졸업식을 열었다. 2025 시즌을 앞두고 조지 메이슨은 새로운 선수를 받았지만 44번은 여전히 백상호의 것이다. 백상호가 다닌 베넷 고등학교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렸다. 그의 투구폼이 새겨진 장식물이 학교 야구장에 설치됐다.

< 2024년 베넷 고등학교에서 열린 백상호 기념행사. 출처 = WMDT >

백상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 아마추어 야구에 헌신, 열정,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그의 이름은 미국에서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다. 비록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백상호는 스퓔러 필드와 베넷 고등학교의 영원한 수호신으로 다음 봄을 위해 하늘에서 준비하고 있다.

 

참고 = George Mason Athletics, The Athletic, The Palm Beach Post, WMDT

야구공작소 이금강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도상현, 전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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