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flickr>
‘볼넷 내줄 바에는 차라리 안타를 맞아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야구계에서 투수의 볼넷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 말이 투수에게 정말로 볼넷 대신 안타를 맞으라는 뜻은 아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지 못해 자멸하기보다는 적극적인 투구를 통해 타자와 승부를 보라는 의미에 가깝다.
제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선수에게 선수, 코치, 해설가 등 소위 야구 전문가들이 내놓는 해법은 늘 비슷하다. ‘초구 스트라이크가 중요하다.’, ‘공격적인 피칭을 해라.’, ‘포수 미트만 보고 적극적으로 던져라.’ 등등. 표현만 다르지 결국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던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 때부터 프로 입성까지 10년 넘게 야구만 해 온 엘리트 선수가 정말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걸까? 선수도 당연히 스트라이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선수 본인이 그 누구보다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단지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다. 스트라이크가 안 들어가는 게 고민인 투수에게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를 자신 있게 던져’라고 조언하는 것은, 불면증 환자에게 의사가 ‘편안한 상태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세요’라는 뻔하고도 무의미한 처방을 내리는 것과 같다.
불면증과 투수들의 제구 난조
불면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잠을 자야한다는 강박’이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수면에 방해를 주는 것이다. 주변에서 온갖 수면을 취하는 방법을 알려줘도 오히려 그 강박이 더 강해지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살다 보면 종종 본인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롭 그레이 교수는 이를 ‘역설적 실수‘라며 자신의 논문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다(링크).
그의 연구팀은 투수에게 던져야 하는 곳과 던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해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결과 놀랍게도 투수들은 던지지 말아야 할 곳에 더 적극적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저곳에 공을 던지면 안 된다는 머릿속 생각과 달리, 몸은 마치 그곳에 던져야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즉, 스트라이크를 강조하는 조언이 역설적으로 볼넷의 위험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국내 야구계에서도 이러한 역설적 상황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현재 키움 히어로즈에서 투수 코치를 맡고 있는 노병오 코치가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선두타자에 볼넷 주지 말라고 쉽게 말하지만, 볼넷을 주고 싶어서 주는 투수는 없다”며 “그보다는 볼넷을 줘도 상관없으니까 네가 가진 능력과 퍼포먼스를 보여달라고 주문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링크).
해법은 없을까? – 역설적 의도를 활용해 보자
역설적 실수에 대해 ‘역설적 의도’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역설적 의도란 ‘염려하고 있는 그 행동을 의도적으로 계속하고 과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리치료 전략’이다.
쉽게 말하면 걱정과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을 회피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 기법으로 자신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불면증 환자에게 밤을 새우게 하고, 남들 앞에서 긴장해 땀을 흘리는 게 고민인 환자에게 다음번에는 더 많은 땀을 흘리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비행 공포증 환자에게는 비행기가 폭파된 후 추락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실제 현장에서도 이를 활용해 성공적인 코칭으로 이어간 사례가 있다.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에서 수비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대런 펜스터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현역 시절 계속해서 유격수 쪽으로 땅볼 타구가 나오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이때 당시 소속팀의 투수코치였던 빌 슬락은 한 가지 특별한 연습을 제안한다. 바로 유격수 쪽으로 강하게 땅볼을 쳐 보자는 제안이었다. 땅볼이 계속 나와 고민인 선수에게 땅볼을 요구한 것이다. 의외였지만 코치와 함께 훈련을 진행할수록 그는 땅볼은커녕 유격수와 좌익수 쪽으로 더욱 강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생산했다. 역설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펜스터는 곧 슬럼프에서 탈출하며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좋은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슬락 코치의 조언 덕분만은 아닐 수 있다. 다만 역설적 의도를 코칭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투수들에게 스트라이크의 중요성을 강조한 코치들도 제자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허나 때로는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좋은 의도에 좋은 결과까지 챙길 수 있는 코칭 문화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참고 = 코치라운드
야구공작소 정세윤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오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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