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휴스턴 애스트로스 공식 트위터)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나이는 선수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신체 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운동선수들에게 있어 신체 능력의 하락은 곧 기량 저하를 의미한다. 이는 투수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초 팬그래프에 기고된 글을 보면 2006년부터 2012년, 그리고 2013년부터 2019년으로 구분된 투수들의 삼진 비율 그래프의 기울기는 모두 30세 시즌부터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볼넷 비율과 패스트볼 구속 역시 같은 지점에서 급격하게 하락하는 모습이었다.
그림 1. 나이에 따른 투수의 삼진비율과 패스트볼 구속 변화(출처: 팬그래프)
하지만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 2020년 9월 말 토미존 수술을 받으면서 625일 만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복귀한 39살의 투수가 올해 평균 95마일의 패스트볼을 뿌리며 리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저스틴 벌랜더다.
말 그대로 “금강벌괴”
2020년 7월 25일에 치러진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토미존 수술을 받게 되면서 지난 2시즌 동안 벌랜더가 소화한 이닝은 고작 6이닝에 불과했다. 하물며 벌랜더는 토미존 수술을 받기 전에 광배근 염좌로 한차례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고 자신을 오랜 기간 괴롭혔던 사타구니 쪽에도 또 한 번 문제를 드러냈다.
이렇게 직전 시즌 많은 부상과 함께했던, 그리고 올해로 39세 시즌에 접어드는 투수를 둘러싼 의심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에 카운터펀치를 날리기라도 하듯 벌랜더는 현재 아메리칸 리그 내에서 가히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주고 있다.
표 1. 2022년 7월 27일자 벌랜더의 성적
벌랜더의 2022시즌이 놀라운 건 2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직전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2019년의 모습과 소름 돋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2017년 후반기부터 2019년까지 벌랜더는 수직 무브먼트가 뛰어난 95마일의 포심을 높은 코스에 활용하며 리그 최강의 투수로 군림했다. 여기에 그립 수정을 통해 수평 무브먼트가 개선된 87마일의 고속 슬라이더 역시 리그에서 손꼽히는 구종 중 하나였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비록 회전수가 200회 정도 줄긴 했지만 여전히 벌랜더의 포심은 같은 구속, 같은 릴리스포인트, 같은 익스텐션을 가진 투수들과 비교해 +0.9인치 더 뛰어난 무브먼트를 올렸다. 슬라이더 역시 전과 큰 차이 없는 수직, 수평 무브먼트를 유지 중이다. 이에 현재 포심과 슬라이더를 각각 500개 이상을 투구한 투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벌랜더 만이 두 구종 모두 0.280 이하의 wOBA를 기록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주로 카운트를 잡을 때 애용되는 커브도 0.154의 낮은 피안타율과 함께 하드힛 억제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뽐낸다. 7월 27일을 기준으로 벌랜더의 커브는 85.5마일의 낮은 타구 속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발사각 역시 5도에 불과하다. 좌타자를 상대로만 사용하는 체인지업도 현재 그 어떠한 안타도 허용하지 않은 채 50%의 높은 헛스윙률을 자랑 중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이렇게 압도적인 스탯을 찍어내고 있는 벌랜더가 오로지 뛰어난 구속과 무브먼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성적을 올릴 수 있었던 걸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구속만큼이나 강력한 벌랜더의 피치 터널
피치 터널이란 공이 투수의 손을 빠져나간 순간부터 타자가 해당 구종을 알아차리는 지점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2가지의 서로 다른 구종을 가진 투수가 이를 동일한 릴리스포인트에서 뿌린다고 가정했을 때 두 구종 사이의 피치 터널이 좋다는 건 그만큼 타자들이 투수가 던진 공에 대응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2. 2022년 저스틴 벌랜더의 3D 투구 궤적(출처: 베이스볼 서번트)
그림 3. 2022년 저스틴 벌랜더의 3D 투구 로케이션(출처: 베이스볼 서번트)
위 사진은 벌랜더의 올 시즌 피칭을 3차원으로 구현한 것으로 빨간색 선은 포심, 노란색 선은 슬라이더, 하늘색 선은 커브를 의미한다. 거의 동일한 지점에서 뿌려졌던 벌랜더의 포심과 슬라이더는 타자들이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지점, 다시 말해 Commit point(그림 2의 빨간 동그라미)까지 동일한 궤적을 그렸고 홈플레이트에서는 그림 3과 같이 위아래로 크게 분리됐다.
이렇듯 과거서부터 뛰어났던 포심과 슬라이더의 피치 터널링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2022년의 벌랜더는 좀 더 정교해진 커맨드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하이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면서 로케이션의 분리를 더욱더 극적으로 가져가고 있다. 올 시즌 벌랜더의 하이 패스트볼 비율은 32.9%로 이는 200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2020년 시즌이 시작되기에 앞서 팀에 새롭게 부임한 더스티 베이커 감독은 그해 7월 벌랜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벌랜더는 자기 몸에 대해, 그리고 이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어떤 내리막을 걷게 될지 걱정하지만 벌랜더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자신이 전보다 더 열심히 했다는 증거일 겁니다” – 더스티 베이커(디 애슬레틱과의 인터뷰에서) –
벌랜더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매번 조금씩 변화를 가져갔다. 비록 팔뚝 부상 때문에 중도 하차하긴 했지만 2020시즌에 앞서 투구 릴리스포인트를 전보다 낮춘 것도 변화의 일환이었다. 긴 재활 기간 동안 투구 메카닉을 다시 점검한 벌랜더는 계속해서 발전을 모색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는 경기 막판 아주 손쉽게 99마일의 패스트볼을 뿌리며 전성기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39살의 벌랜더가 현재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유력 후보이자 25살의 셰인 맥클라나한을 제치고 커리어 3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할 수 있을까? 참고로 39살에 사이영상을 수상한 투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1959년 얼리 윈과 1978년 게일로드 페리가 유이했다.
참고: The Athletics, Fangraphs, Baseball-Reference, Baseball Savant, MLB.com
야구공작소 이한규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홍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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