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1982년 롯데 자이언츠는 6개 팀 중 5위에 머물렀다. 당초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롯데였지만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격언에 끝내 발목이 잡혔다. 가장 문제는 당연히 프로로 왔어야 할 ‘부산의 에이스’ 최동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1년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가계약을 맺었던 최동원은 이듬해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출전을 위해 프로 전향을 보류했다. 구심점이 없는 롯데의 마운드는 고비를 넘기지 못했고 이는 창단식에서 단 5명의 선수로 시작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아래로 처지는 원인이 됐다.
수년간 누적된 혹사와 병역 문제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캐나다행을 포기한 최동원은 당연히 롯데로 입단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계약금 문제로 인해 최동원과 롯데는 쉽사리 입단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최동원은 1983시즌 개막전을 두 달 앞둔 2월 3일 롯데와 계약에 합의했다. 당초 억대를 요구했던 최동원은 계약금 4,500만 원, 연봉 3,000만 원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최동원은 1983년 4월 3일 처음으로 프로 무대에 올랐다.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삼미와의 개막전에서 최동원은 팀이 0대 2로 뒤지던 4회 초 2사 만루에 등판했다.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라온 최동원은 그러나 박준영과 정구왕, 이영구에게 연속 3안타를 허용해 4점을 내주며 체면을 구겼다. 6회에도 정구왕에게 홈런을 내준 최동원은 데뷔전을 2.1이닝 5피안타 2실점으로 마감했다.
이후로도 최동원은 5월 중순까지 승리 없이 3패만을 기록하며 기대했던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업 롯데 시절부터 최동원을 데리고 있었던 박영길 감독은 4월 말부터 최동원을 보름 동안 마운드에 올리지 않으면서까지 관리를 해주며 컨디션 관리에 만전을 가했다. 그리고 최동원은 5월 1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그 믿음에 보답했다.
이날 최동원은 1983시즌 처음으로 열린 야간 경기에 선발투수로 올라왔다. 과거의 구위는 보여주지 못했으나 컨트롤만큼은 일품이었던 최동원은 5회까지 MBC 타선을 단 2안타로 막아냈다. 6회 첫 실점을 기록한 최동원은 8회에도 폭투로 한 점을 더 내주기는 했으나 MBC 타선을 9이닝 동안 5피안타 5탈삼진으로 막아내면서 프로 첫 승을 거뒀다. 롯데는 2회 상대 실책으로 선취점을 올렸고 7회에도 박용성의 희생플라이와 김용철의 적시타를 앞세워 2점을 올리며 MBC를 4대 2로 꺾었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스코어만큼 깔끔한 경기는 아니었다. 불씨는 3회 초에 피어났다. 3회 실책으로 나간 한문연이 투수 오영일의 견제에 걸려 런다운에 걸렸다. 이때 2루로 향하던 한문연이 2루수 김인식과 충돌했다. 김인식은 한문연이 위협적인 주루를 했다며 아웃을 잡은 후 한문연을 걷어차는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이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최동원의 첫 승도, 김인식의 태권도(?)도 아니었다. 4대 2로 뒤지던 MBC는 9회 말 2아웃 이후 대타 유승안이 볼넷으로 출루했다. MBC의 유백만 감독대행은 대주자로 내야수 조호를 투입했다. 이어진 6번 김정수의 타석에서 중견수 앞 안타가 나오며 MBC는 절호의 동점 찬스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때 롯데 박영길 감독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와 심판진에게 어필했다. 조호가 ‘부정선수’라는 것이다. 당시 KBO 대회요강에는 25명의 출전 선수를 경기 전 제출하도록 했다. 명단에 없는 선수는 경기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호가 이날 제출된 MBC의 25인 엔트리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심판진은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낸 결론은 ‘조호는 부정선수이므로 아웃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동점을 눈앞에 뒀던 MBC는 허무하게 경기를 마감해야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바보스러운 경기’(중앙일보), ‘눈살을 찌푸리게 한 해프닝’(동아일보)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MBC의 어이없는 경기 운용을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극비휴가’를 사용한 백인천 감독의 공백이 여실히 느껴진 경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 팀은 이미 1982년에도 KBO 리그 최초 연장 15회 경기를 만들어 냈고, 1983년 들어서도 MBC가 7점의 열세를 뒤집고 역전승을 거뒀던 전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이 경기는 30년 후 조명된 ‘엘꼴라시코’의 원조 격인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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