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90년 – 지는 별, 뜨는 별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부산 야구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최동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가 은퇴한 지 30년이 넘게 흘렀지만 여전히 사직야구장에는 최동원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자주 보인다. 부산광역시에 세워진 단 하나의 야구선수 동상도 최동원이고, 롯데 구단이 지정한 단 하나의 영구결번 선수도 최동원이다. 그만큼 ‘최동원’이라는 이름은 부산 야구계에는 무겁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유망주들에게 붙는 ‘제2의 XXX’ 같은 수식어에도 감히 최동원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최동원이 현역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비슷한 체구에 똑같이 안경을 착용했던 양상문(현 SPOTV 해설위원)이 ‘제2의 최동원’이라는 수식어를 받기도 했다. 양상문은 최동원과 붙어보고 싶다는 이유로 연세대의 라이벌인 고려대 진학을 고려할 정도로 최동원을 의식했다. (실제로 양상문은 고려대 79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롯데 입단 후 최동원과 친분을 쌓았고 1988년 선수협의회 사건 때도 최동원과 함께 이름을 올렸던 양상문이지만 투구 스타일은 최동원과 전혀 달랐다.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타자들을 압도했던 최동원과 달리 양상문은 ‘두뇌파 투수’라는 타이틀답게 변화구와 변칙투구를 가지고 승부했던 투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2의 최동원’이라는 별명이 그나마 어울렸던 선수는 양상문의 부산고-고려대 7년 후배인 박동희라고 할 수 있다. 두 선수는 고교 시절부터 불같은 강속구를 앞세워 ‘전국구 에이스’로 자리매김했고, 대학 시절 국가대표 단골이었던 데다가 똑같이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입단 제안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프로 입단 후 우승을 이끌고도 구단과 지속적인 갈등을 빚은 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해 그곳에서 은퇴했다는 결말까지도 똑같다.

1986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도 고려대로 진학한 박동희는 1988 서울 올림픽 등을 거치며 장래 최동원과 선동열을 뛰어넘을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롯데가 1988년 말 최동원을 과감하게 삼성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1년 후 박동희가 입단한다는 걸 계산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89년 말부터 미국행과 한국 잔류를 두고 고민하던 박동희는 해를 넘겨 결국 1990년 2월 계약금 1억 4,000만 원, 연봉 1,200만 원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를 받고 롯데와 계약을 맺었다.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박동희는 1990년 4월 11일, 롯데의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이 날 경기에서 상대 팀이었던 삼성은 최동원을 내세웠고,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물려받은 언더핸드 김청수를 선발투수로 등판시켰다.

전년도 다소 부진했던 최동원은 새로운 각오로 1990시즌 첫 등판에 임했다. 그러나 최동원의 공은 예전 같지 않았다. 1회 2사 후 3번 한영준을 볼넷으로 내보낸 최동원은 다음 타자 김민호에게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2점 홈런을 내주며 진땀을 흘렸다. 2회에도 1사 1, 2루에서 오대석에게 적시타를 맞은 최동원은 결국 다시 돌아온 1번 타자 허규옥의 타석에서 마운드를 내려가야 했다. 이날 전까지 통산 995탈삼진이었던 최동원은 고향 팀을 상대로 통산 1,000탈삼진을 잡으려 했으나 수포가 되었다.

한편 롯데 선발 김청수는 3회까지 매 이닝 안타를 내준 데 이어 4회에는 이만수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고도 5회까지 삼성 타선을 상대로 1점만을 내주는 호투를 펼쳤다. 투구 수도 69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롯데 벤치는 6회 시작과 함께 투수를 교체했다. 바로 박동희였다. 이미 경기 초반부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던 박동희는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첫 타자 박승호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이어 이만수를 유격수 땅볼, 이현택을 삼진으로 처리하면서 박동희는 데뷔 첫 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냈다.

순항할 것만 같던 박동희는 7회 말 선두타자 김종갑에게 가운데 속구를 던졌다가 좌월 1점 홈런을 내주며 데뷔 첫 실점을 기록했다. 이를 악문 박동희는 다음 타자 류중일을 시작으로 이종두, 강기웅을 연속해서 삼진으로 잡아냈다. 이어 8회에도 장태수-김성래-박승호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한 경기 최다 연속 탈삼진 신기록이었다.

그 사이 롯데는 8회 초 집중 5안타를 때려내며 5득점을 거둔 데 이어 9회에도 유두열과 김병수의 홈런을 앞세워 3점을 올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야수들이 9점 차를 만들어준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마운드에 오른 박동희는 선두타자 이만수를 볼넷으로 내주기는 했으나 마지막 타자 류중일까지 삼진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박동희는 4이닝 동안 한 점만을 내주며 데뷔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했다. 14타자를 상대한 박동희는 무려 10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고, 김종갑의 홈런 외에는 안타를 허용하지 않으며 삼성 타선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제2의 최동원’이 진짜 최동원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초음속 비행기였던 ‘콩코드’가 별명이었을 정도로 광속구가 일품이었던 박동희는 이날 자신의 명성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이날 삼성 구단의 스피드건에 찍힌 박동희의 최고 구속은 151km/h이었다. KBO 리그 출범 이후 8년 동안 한 명도 도달하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구속을 23세의 신인 투수가 손쉽게 넘어선 것이다. 이날 경기가 끝난 후 언론에서는 ‘공포의 직구’, ‘가공할 피칭’, ‘신인왕 후보 예약’ 등의 수식어를 박동희에게 붙였다.

첫 경기부터 이렇듯 무서울 정도의 투구를 선보인 박동희는 과연 기대대로 신인왕을 수상했을까? 1990시즌 박동희는 31경기에 나서 10승(1완봉승) 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3.04를 기록했다. 145이닝 동안 146탈삼진(리그 4위)을 잡아내며 구위를 증명했지만 114볼넷을 내주면서 제구력이라는 과제를 받기도 했다. 분명 시즌 전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여기에 5월 중순에는 부산의 한 술집에서 여종업원을 폭행하며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고, 7월 초에는 원정 경기에 합류하라는 코칭스태프의 지시를 거부했다가 1군에서 말소되기도 했다. 기대를 모았던 박동희가 주춤하면서 롯데는 1990시즌 7개 팀 중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최동원은 어땠을까? 최동원은 8일 뒤인 4월 19일 장소를 사직야구장으로 옮겨 설욕전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최동원의 등번호를 계승한 롯데 김청수가 7피안타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면서 또 한 번 패전의 아픔을 겪었다. 1990시즌 22경기에 나와 6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28로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시즌을 보낸 최동원은 결국 이듬해 2월 팀에서 방출되며 파란만장했던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된다.

1990년 4월 11일 롯데-삼성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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