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2011년 12월, 극장가에 <퍼펙트 게임>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조승우와 양동근이 공동 주연으로 나선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야구를 소재로 한, 그것도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비록 총 관객 150만 7084명으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많은 올드 팬들에게는 추억을, 어린 팬들에게는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은 1980년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과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 두 선수의 선발 맞대결이다. 영남과 호남, 연세대와 고려대, 롯데와 해태 등 많은 부분에서 정반대의 배경을 지녔던 두 선수는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만날 수 없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영화 역시 이 같은 두 선수의 불꽃 튀는 대결을 스크린 속에 담아냈다.
물론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최동원), “지고 싶지 않았다”(선동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최동원과 선동열 본인들도 치열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특히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게 된 프로에서 두 선수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1985년 7월 31일 부산 구덕야구장, 프로에서 처음 만나게 됐다. 이날 선발로 등판한 최동원은 7회 김무종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기는 했으나 9이닝 동안 탈삼진 7개를 기록, 완투승을 달성했다. 반면 3회 선발 강만식을 구원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온 선동열은 5.2이닝 1실점으로 준수한 투구를 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
이후 두 선수가 제대로 붙었던 것은 1986년이었다. 이 해 사직야구장에서만 두 차례 선발 맞대결을 펼친 최동원과 선동열은 1승 1패로 호각세를 보였다. 4월 19일 경기에서는 해태 송일섭의 3회 솔로포가 그대로 결승점이 되면서 선동열이 1대 0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어 8월 19일에는 최동원이 2대 0 완봉승을 거두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해를 넘겨 1987년, 두 선수는 다시 만났다. 4월 12일 경기에서 해태는 김대현을, 롯데는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대현이 부상으로(알려진 사유로) 인해 1아웃만을 잡고 내려갔고, 그를 대신해 마운드에 올라온 것은 바로 선동열이었다.
선동열은 5회 집중 5안타를 맞으며 2점을 내줬지만 6회 이후 단 하나의 안타도 내주지 않으며 ‘선발승 같은 구원승’을 거뒀다. 반면 최동원은 5회와 6회 각각 3점을 내주면서 6실점 완투패로 고개를 숙였다. 승리를 챙기긴 했지만 선동열 역시 전년도부터 이어오던 49.2이닝 무실점 행진을 마감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5월 16일, 두 선수는 ‘제대로’ 부딪혔다.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던 시절이지만* 두 선수의 선발 매치업은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이 때문인지 경기가 열린 사직야구장에는 (당시 반공일(半空日)이었던) 토요일 오후 2시 경기임에도 2만 명이 넘는 관중이 열띤 응원을 펼쳤다.
* 1987년 당시에는 주말 경기 선발 예고제가 있었다. 따라서 최동원과 선동열의 선발 매치업은 이미 알려진 상황이었다.
분위기는 최동원 쪽이 조금 더 유리했다. 선동열은 경기 전 배탈이 나면서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경기에 나서야 했다. 반면 최동원은 5월 6일 OB 베어스전에서 5.1이닝을 던진 이후 열흘이나 쉬면서 체력을 비축했다. 살인적인 일정에도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철완’ 최동원이 충분히 쉬었다는 것은 상대팀에는 공포였다.
기대대로 최동원은 1회 초 해태의 조재환-서정환-이건열을 땅볼 2개와 뜬공 하나로 처리하며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반면 선동열은 첫 이닝부터 볼넷을 허용하더니 2회 실점을 기록했다. 선두타자 김용철에게 볼넷을 내준 선동열은 김민호와 정구선의 연속 안타로 무사 만루 위기를 맞이했다. 여기서 내야 땅볼과 야수선택이 나오며 선동열은 먼저 2점을 내줬다.
2회까지 해태 타선을 잘 막았던 최동원도 3회 처음 점수를 내줬다. 김무종의 안타와 차영화의 희생번트로 만든 득점권 찬스에서 2번 서정환의 중전안타가 나오며 최동원은 실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5회부터 8회까지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고도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 특히 5회에는 1사 2, 3루 위기에서 1루 땅볼을 유도하며 3루 주자를 잡았고, 이어진 2사 만루에서도 이건열을 1루 뜬공으로 돌려세웠다.
그 사이 컨디션을 되찾은 선동열이 3회부터 8회까지 볼넷 하나를 제외하고는 롯데 타선을 꽁꽁 틀어막으면서 경기는 투수전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운명의 9회 초, 완투승을 앞두고 있던 최동원은 선두타자 한대화에게 좌전 안타를 내줬다. 김일권의 희생번트로 1사 2루가 됐고, 해태 김응용 감독은 여기서 대타 김일환을 투입했다. 공교롭게도 김일환은 롯데의 원년 멤버로, 1982시즌이 끝나고 해태로 트레이드된 선수였다.
고향팀이자 친정팀에 대한 복수였을까. 김일환은 최동원의 몸쪽 슬라이더를 받아쳐 우익 선상에 떨어지는 안타를 때려냈다. 2루 주자 한대화가 홈을 밟으면서 최동원의 완투승은 아웃카운트 2개를 남겨두고 무산됐다. 남은 포수가 없는 상황에서도 장채근을 교체한 김응용 감독의 지략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최동원과 선동열은 연장 승부에 돌입했다. 먼저 위기를 맞은 최동원은 10회 초 4사구 2개와 안타로 1사 만루에 몰렸다. 숨을 고른 최동원은 9회 동점 득점의 주인공이었던 한대화를 삼진으로 잡아내더니 김일권도 좌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면서 해태의 역전 기회를 무산시켰다. 내야수 백인호(개명 후 백인수)를 포수로 세운 선동열 역시 변화구 사용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11회 말 2사 만루를 탈출하면서 롯데의 희망을 날렸다.
이후 12회, 13회, 14회도 무실점으로 넘긴 두 투수는 마지막 15회까지도 마운드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먼저 등판한 최동원은 1986년 자신에게 완투패를 안겼던 송일섭에게 선두타자 안타를 내주고도 연세대 선배 김봉연에게 병살을 유도하며 패전의 가능성을 지웠다. 15회 말 마운드에 오른 선동열은 아예 롯데의 김석일-한영준-우경하 세 타자에게 모두 삼진을 뽑아내면서 일말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다.
2대 2, 장장 5시간 1분에 걸쳐 진행된 최동원과 선동열의 선발 맞대결은 결국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날 최동원은 15이닝 동안 60타자를 상대로 209개의 공을 던지며 11안타 5볼넷을 내주고도 실점을 2점으로 막았다. 이에 질세라 선동열 역시 56타자를 맞아 무려 232개의 공을 던졌다. 7안타 5볼넷을 내준 선동열은 삼진 10개를 잡으며 고비마다 위기를 넘겼다. 두 선수는 1986년 차동철(해태)-김신부(청보), 1987년 김진욱(OB)-선동열(해태)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15이닝 완투 대결을 펼친 선수로 남았다. 15이닝 완투 대결은 이날 이후 1994년 김원형(쌍방울)-조계현(해태)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이었다.
경기 후 선동열은 “중반 이후 컨디션을 되찾았고 2루수 백인호가 포수로 앉아 마음 놓고 변화구를 던질 수가 없었다”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최동원도 “오랜만에 등판이라 게임 감각을 찾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1점 승부라 1구 1구를 신중히 던졌다. 후회 없는 일전이었다”라는 소감을 남기며 아쉬움과 후련함을 같이 드러냈다.
최동원과 선동열 모두 200개 이상의 공을 던지고 내려갔다. 그러나 이날 이후의 흐름은 조금 달랐다. 최동원은 4일을 쉬고 등판한 5월 20일 빙그레 이글스전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며 자신이 왜 ‘철완’인지를 증명했다. 반면 21일 등판한 선동열은 5타자를 상대한 후 허리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갔고, 제대로 된 복귀까지는 약 2개월이 걸렸다.
PS. 두 선수의 선발 맞대결은 1987시즌 한 번 더 열렸다. 바로 올스타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장소인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1987년 올스타전에서 동군 선발 최동원은 2회 김종모에게 홈런을 맞으며 2점을 내줬다. 허리 부상에서 막 돌아왔던 서군 선발 선동열은 1회 고려대 선배 박종훈에게 2루타를 맞긴 했으나 실점하지 않고 1이닝을 소화한 후 마운드를 내려왔다.
사진=KIA 타이거즈, 영화 <퍼펙트 게임>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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