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89년 – 비 내리는 사직, 김시진의 14이닝 투혼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1988년 11월 23일, 그날 밤 9시 뉴스 끝자락에 프로야구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 두 구단은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 등 3명의 롯데 선수와 김시진, 오대석, 허규옥, 전용권 등 4명의 삼성 선수를 맞트레이드 하기로 합의했다고 오늘 전격 발표했습니다.
두 팀의 에이스급 투수인 최동원, 김시진이 포함된 이번의 4대 3 트레이드는 국내 프로야구 7년 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형 트레이드로 평가됩니다.”

1988시즌까지 삼성에서만 111승을 거뒀던 김시진과 롯데에서만 96승을 거둔 최동원이 갑작스럽게 서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된 것이다. 김시진은 5번의 포스트시즌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며 ‘새가슴’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반면 1984년 한국시리즈의 영웅이었던 최동원은 경기 외적으로 연봉 협상 과정에서의 갈등과 선수협의회 사건이 터지며 구단에서의 입지가 좁아졌다. 두 에이스의 트레이드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타 팀으로 트레이드가 된다는 것은 ‘버림받았다’는 말과 동일했다. 롯데로 넘어가게 된 김시진은 당시 “이번 계기로 해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겠다”라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지만 훗날 “내가 이 팀에 해준 게 얼만데 하루아침에 나를 몰아치느냐, 이런 배신감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며 당시 심경을 회고하기도 했다.

새로운 에이스를 받은 롯데는 김시진에 큰 기대를 걸었다. 1988시즌에 평년에 비해 다소 적은 11승과 144.1이닝을 기록했음에도 롯데는 김시진에게 400만원이 오른 6,600만원의 연봉을 안겨주었다. 이는 계약 당시 롯데 팀 내 최고 연봉이자 리그 전체를 놓고 봐도 선동열(7,500만원) 다음 가는 액수였다. (이후 6월 최동원이 삼성과 계약하면서 연봉 9,000만원에 사인하기는 했지만 계약 기간에 비례해 실제 연봉은 4,740만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89시즌이 시작됐다. 롯데는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김시진-최동원의 뒤를 이어 트레이드 된 장효조가 친정팀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그런데 4월 13일까지 열린 5번의 경기에서 김시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범경기에 다소 부진하기는 했지만 거액을 주면서까지 기를 살려준 에이스 후보가 등장하지 않는 것에 사람들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4월 14일 OB 베어스전, 드디어 김시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부산 팬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시진은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그러나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김시진은 3회 초 2사 2, 3루, 6회 초 2사 3루의 위기를 겨우 넘기는 등 불안한 투구를 이어갔다.

그래도 롯데는 그사이 먼저 점수를 냈다. OB 선발이었던 신인 구동우에게 좀처럼 출루를 얻어내지 못하던 롯데는 5회 말 선두타자 최계영이 볼넷으로 나갔다. 이어 이창원의 희생번트와 3루 도루를 통해 1사 3루 찬스를 만들었다. 여기서 8번 김용운의 희생플라이가 나오면서 롯데는 1대 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김시진은 이 리드를 길게 지켜내지 못했다. 당시 별명이 ‘투스리’였을 정도로 풀카운트 승부가 잦았던 김시진은 7회 OB 타자들에게 연달아 볼넷을 내주면서 결국 밀어내기로 동점을 허용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투구 수는 점점 불어났고, 김시진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양 팀은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OB는 이미 7회 사이드암 김진욱이 올라온 데 이어 11회부터는 좌완 윤석환으로 교체된 상황이었다. 반면 롯데 마운드는 김시진이 혼자 지키고 있었다. 롯데는 좀처럼 OB 투수진을 공략하지 못했고, OB는 김시진에게 출루는 얻어냈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지루한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

연장 13회 초, 잘 버티던 김시진은 몸에 이상을 느꼈다. 김시진의 행동을 보고 이상한 느낌을 받은 허구연 수석코치가 곧바로 마운드에 올라가 김시진의 상태를 점검했다. 김시진은 “던질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공을 쥐는 두 손가락이 짜릿하다”라며 통증이 있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김시진은 “경기는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김시진은 13회를 지나 14회까지도 마운드에서 버텼다.

김시진이 마운드에서 투혼을 보여주자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들이 김시진을 도와줬다. 14회 말, 삼성에서 건너온 장효조(안타)와 오대석(볼넷)이 출루에 성공했다. 이어 최계영까지 볼넷을 골라내며 1사 만루 황금 찬스를 만들었다. 여기서 타석에 들어선 조성옥이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려내면서 롯데는 5시간 2분의 빗속 대혈투를 마감했다.

이날 김시진은 혼자서 14이닝을 던지며 58타자를 상대로 무려 219개의 공을 던졌다. 김시진은 볼넷 10개, 몸에 맞는 공 2개를 내주며 한 경기 최다 4사구 허용이라는 불명예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OB에 단 1점만을 내주면서 끝내 완투승을 거뒀다. 지금보다 투수 혹사에 둔감했던 1980년대 말이었음에도 언론에서 ‘김시진이 괜찮을까’라며 걱정스러운 논조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시진 본인은 경기 후 “다소 몸에 무리가 따랐지만 첫 선을 보인 나에 대한 부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라며 혹사에 대한 변(辨)을 남겼다. 그러면서 “몸에 무리가 왔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다. 그러나 내가 전지훈련이나 일본 연수에서 쌓은 훈련량을 알면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과연 ‘투수의 어깨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라는 모 야구인사의 말이 김시진에게도 통했을까. 전문가들이 ‘5일 이상은 쉬고 나와야 한다’라고 충고했음에도 롯데는 4일 휴식을 부여한 뒤 19일 MBC 청룡전에 김시진을 올렸다. 그리고 연달아 3연패를 기록한 김시진은 5월 17일 OB전에서 9회 1사 후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자진 강판한 후에 한 달 넘게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결국 김시진은 1989년 4승 9패 평균자책 3.87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김시진은 더 이상 삼성 시절의 구위를 되찾지 못했다.

PS. 4월 14일 OB전에는 또 하나의 주목할 이름이 나온다. 경남고와 동아대를 졸업하고 1989년 신인으로 입단한 한 좌타 외야수는 이날 대타로 나와 안타를 신고했다. 비록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팀의 5안타 중 하나를 책임진 이 선수는 바로 훗날 김시진에 이어 롯데 감독이 되는 이종운이었다.

1989년 4월 14일 OB-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사진=MBC 뉴스 캡처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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