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유감(有感)]마음을 움직이는 장면

야구의 큰 특징은 매일 한다는 것이다. 4월에서 10월까지, 야구는 매일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 야구에서도 어떤 장면, 어떤 순간은 누군가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장면은 ‘명장면’이 된다. 무엇이 명장면을 만드는가. 무엇이 마음을 움직이는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경이이고, 다른 하나는 감동이다. 경이와 감동 중 하나만 갖추어도 명장면이 될 수 있고, 드물게 둘 모두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역사에 남는 장면이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마음을 움직인다’는 표현이 그대로 ‘감동(感動)’이긴 하나, 이하에서의 ‘감동’은 보다 좁은 의미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경이란 놀라움이다. 기쁨이나 슬픔이 아닌, 평소에 보기 어려운 특별한 일에 대한 놀라움이다.

따라서 경이는 단순한 물리적 요인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SK 엄정욱이 국내 최초로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던진 순간은 설령 그것이 폭투였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명장면이 될 수 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나 극적인 호수비 역시 경이를 자아낸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육체적으로 좀처럼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메이저리그의 홈런 급증 현상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점점 홈런에서 느낄 수 있는 경이가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프로의 플레이 하나하나는 좀처럼 해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플레이에 익숙해지면 다소 둔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리적인 특별함이 없더라도 경기 내의 특별한 상황이 경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뜬공이어도 노히트노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뜬공이면 명장면이 될 수 있다. 평범한 안타여도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하는 단타라면 특별해진다.

경기 내의 특별한 상황에는 큰 점수 차 역전승과 같은 것도 포함된다. 9점 차 역전승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응원팀이 끝내기 안타로 이겼을 때의 감정 역시 눈물이 나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이걸 이겼네’로 대변되는 ‘신기’, 곧 놀라움에 가깝다.

 

물리적인 특별함과 경기 내 상황이 합쳐지면 최고의 경이를 느낄 수 있다. 가령 퍼펙트 게임이 극적인 호수비로 완성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7월 23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마크 벌리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할 날 9회 대수비로 들어온 드웨인 와이즈의 호수비가 바로 그런 때였다. 경이의 측면에서는 가히 최고의 장면이다(여기서 캐스터가 “‘상황을 생각해 보면’ 지난 50년간 본 플레이 중 최고”(‘under the circumstances’ one of the greastest catches I’ve ever seen in 50 years of this game)라고 한 점도 이 글에서 하려고 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감동은 경기 내적인 상황보다는 경기를 ‘둘러싼’ 상황과 맥락이 더 중요해진다. 경기를 둘러싼 맥락은 경기 전체를 특별하게 만든다.

2013년 4월 8일 탬파베이와 텍사스의 시즌 1차전 경기가 주는 감동과 9월 30일에 와일드카드 진출을 놓고 펼친 단판전이 주는 감동은 같지 않았다. 시즌 상황이 주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2002년 삼성이 20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삼성 팬들이 느낀 감동과 2014년 4년 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할 때 느낀 감동의 크기도 완전히 다르다. 팀의 역사와 시간이 부여하는 맥락의 차이다.

1995년 5월 16일 LG:롯데 경기는 그 자체로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롯데 박정태가 2년 만에 부상에서 복귀해 3안타를 때려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많은 경기가 선수 개인의 역사나 기록 덕분에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드물게 경기 내외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지면 경이와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은

  1. 홈런이라는 플레이와 끝내기 상황에서 오는 경이
  2. 타이거즈가 영욕의 세월을 거쳐 12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는 맥락에서 오는 감동

이 어우러져 KBO 최고의 경기가 되었다.

 

수많은 명경기, 명장면 중에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두루 아우르는 것은 역시 이 경기일 것이다.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9회 말 2아웃에 터진 커크 깁슨의 끝내기 투런 홈런에는 아래와 같은 요인들이 어우러져 있다.

  1. 홈런이라는 물리적 사건, 역전 끝내기라는 경기 내 상황
  2. NLCS에서 양 다리에 부상을 당한 커크 깁슨 개인의 맥락
  3. 월드시리즈 경기라는 팀의 맥락

홈런이 아니라 끝내기 희생플라이었다면? 역전 끝내기가 아니라 10-0에서 터진 쐐기 홈런이었다면? 깁슨이 부상 없이 완전히 건재한 상황이었다면? 순위 결정이 끝난 뒤의 페넌트레이스 경기였다면?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았기에 이 장면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야구공작소 오연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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