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변영아 >
2025년 9월 18일, 메이저리그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이 전해졌다. 2014시즌 내셔널리그 MVP, 3회 사이영상 수상(2011, 2013, 2014), 올스타전 출전 선수 선정 11회에 빛나는 ‘21세기 최고의 선발투수’ 클레이튼 커쇼가 현역 은퇴를 발표한 것. 소식 이후 수많은 언론과 선수들이 시대를 빛낸 투수의 발자취에 찬사를 보냈다.
다저스가 지구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 이후 펼쳐진 포스트시즌에서는 월드시리즈 3차전 12회 2사 만루 상황에서 등장했다.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커리어 마지막을 우승 트로피로 장식하며 모두의 박수갈채 속에서 그라운드를 떠났다.

<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커쇼. 3번째 우승 반지를 끼며 화려하게 커리어를 마쳤다. >
이러한 커쇼의 커리어에도 시련이 있었다. 2016년부터 시작된 잦은 부상과 급격한 구속 하락이었다. 포심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한 그에게 떨어진 구속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구속 혁명’이라 불리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급격한 구속 상승은 커쇼의 패스트볼 구속을 점점 초라하게 만들었다. 2017시즌 이후 그의 구속은 단 한 번도 메이저리그 좌완 투수의 평균 구속을 넘지 못했다. 2020시즌부터 그의 구속은 메이저리그 하위 10% 언저리를 맴돌았다.

< 커쇼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변화. 최전성기였던 2016시즌을 끝으로 급격한 하향세가 시작되었다. >
구속 혁명의 시대에서 커쇼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공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를 그의 투구 메카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성기 커쇼 – 엄청난 상·하체 분리
자신의 신체 조건 하에서 강한 상·하체 분리*을 만들어 내는 것은 높은 구속을 만들어 내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강한 상·하체 분리는 몸통을 구성하는 근육의 강한 꼬임을 의미하고, 강하게 꼬인 근육은 많은 운동 에너지를 저장하기 때문이다.
* 골반(엉덩이)이 앞으로 돌아간 채 어깨를 비롯한 상체는 거의 회전하지 않아 발생한 몸통 근육의 꼬임. 아래 그림 참조

< 우투수의 디딤발이 땅에 닿는 순간 투수를 위에서 본 모습 >
위 그림을 관찰하면 골반(엉덩이)은 포수 쪽으로 회전하고 상체는 골반보다 적게 회전하여 상·하체 분리가 나타난다. 어깨를 이은 선(Shoulder line)과 골반의 양 끝을 이은 선(Hip line) 사이의 각도(Hip-Shoulder separation angle)로 상·하체 분리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 최전성기를 달리던 커쇼의 착지 순간의 모습 >
최전성기를 달리던 커쇼의 메카닉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엄청난 상·하체 분리와 이로부터 발생한 근육의 꼬임이다. 커쇼는 서양인이기 때문에 짧은 하체와 긴 상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신체 조건은 상·하체 분리의 범위를 크게 하기 유리한 요소이다.
커쇼는 자신의 신체 조건을 십분 활용하여 투구 동작에 녹여냈다. 착지하는 순간 그의 골반은 거의 포수 쪽을 향해 회전한 상태이다. 반면 상체는 거의 회전하지 않은 채 어깨를 이은 선은 홈 플레이트와 2루를 이은 선에 거의 나란하다. 엄청난 강도의 상·하체 분리, 이를 지탱하는 강인하고 유연한 상체 근육이 돋보인다.
반면 최근의 강속구 투수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앞다리 버티기(Lead leg block)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앞다리 버티기는 착지 이후 앞쪽 다리를 빠르게 펴며 전진하던 몸을 멈추고, 동시에 골반에 급격한 회전 가속을 일으키는 동작이다. 착지 이후 골반, 몸통, 어깨, 팔꿈치에 급격한 가속을 가하는 핵심 요소로서 주목받고 있는 동작이기도 하다.
커쇼의 메카닉에서 앞다리 버티기의 활용도가 높지 않다는 것은 커쇼가 ‘구속 혁명’ 시대의 투구 메카닉에서 강조하는 급격한 감속과 가속보다는, 몸통 근육을 활용한 완만한 가속에서 동력을 얻고 있음을 의미한다.


< 커쇼(위)와 스펜서 스트라이더(아래)의 투구 모습을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
183cm의 단신에도 160km/h가 넘는 공을 던지는 우완 선발 투수 스펜서 스트라이더를 관찰하자. 앞다리 버티기의 정도에서 커쇼와 명확하게 비교된다. 스트라이더는 발이 착지하는 순간 몸통이 커쇼보다 더 앞으로 돌아가 있다. 상하체 꼬임의 정도는 커쇼보다 약하다.
반면 스트라이더는 착지 이후 앞다리가 급격히 펴지며 골반에 급격한 회전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몸통, 어깨, 팔꿈치에 급격한 가속이 가해진다. 반면 커쇼는 앞다리가 비교적 천천히 펴지며 상체에 완만한 가속을 일으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커쇼는 상체 근육의 강한 꼬임을 이용한 완만한 가속을, 스트라이더를 비롯한 근래의 강속구 투수들은 급격한 가속을 투구의 주요 원동력으로 삼는다. 몸통 근육의 활용도가 높은 커쇼는 좌완 선발 중 최고 수준의 구속을 자랑한 데뷔 초부터 각종 부상에 시달리던 커리어 말년까지 팔꿈치 인대에 부상을 입지 않았다. 요즘 수많은 강속구 투수들이 팔꿈치 인대의 부상으로 팔꿈치 내측 측부 인대 재건술(토미존 수술)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다른 투수들보다 상체 근육에 의존도가 높은 탓에 커리어 중반부터 허리와 등에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렸다. 2016시즌 허리 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추간판 탈출증이 도진 이후에는 매년 허리에 퇴행성 질환에 시달려 등판을 거르거나 로테이션을 거르는 일이 잦았다.

< 2016부터 시작된 커쇼의 부상 이력 중 등, 허리 관련 부상 내용 >
황혼기 커쇼의 메카닉

< 최고의 전성기를 구사하던 2016시즌(왼쪽)과 2025시즌(오른쪽)의 투구 모습 >
상체 부상에 끊임없이 시달린 커쇼는 부상을 막기 위해 이전만큼의 강한 상·하체 분리를 포기했다. 전성기 때와 커리어 말기의 모습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2025시즌에는 전성기와 비교하면 앞다리가 착지할 때 몸통이 포수 쪽으로 훨씬 많이 돌아가 있다. 커쇼가 주된 동력으로 삼던 몸통 근육의 꼬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구속 하락은 불가피했다.
반면 이를 통해 정교한 슬라이더 탄착군을 가져갈 수 있었다. 몸통이 포수 쪽으로 많이 돌아간 채 착지하면 우타자 몸쪽, 좌타자 바깥쪽에 공을 투구하기 용이하다. (좌투수 기준) 몸통을 강하게 돌리지 않아도 팔을 앞으로 휘둘러 릴리즈 포인트를 앞에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잇따른 부상으로 몸통 회전을 줄인 커쇼는 구속을 잃었지만, 슬라이더로 좌타자 바깥쪽, 우타자 몸쪽으로 폭격했다. 결정구로서의 활용도와 제구의 정교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몸통 회전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이전의 투구폼을 유지했다면 릴리즈 포인트를 앞쪽에 형성하지 못해 슬라이더가 복판으로 몰렸을 것이다.

< 전성기 당시 슬라이더 탄착군(왼쪽)과 커리어 말미 슬라이더 탄착군을 타자 시점에서 바라본 것. 커리어가 지날수록 슬라이더의 제구가 우타자 몸쪽, 좌타자 바깥쪽 아래에 집중되며 결정구로서의 활용도가 높아졌다. >
커쇼의 원숙한 슬라이더 활용은 수치상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커쇼가 던지는 구종 중에서 슬라이더를 제외한 포심 패스트볼, 커브의 구종 가치는 구속이 떨어질수록 확연히 감소했다. 반면 슬라이더의 구종 가치는 커리어 말미까지 리그 최정상급 수치를 유지했다. 100구당 구종 가치는 사이영상을 차지한 2013, 2014시즌에 필적하는 수치를 커리어 말년까지 보여주는 괴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 커쇼가 던지는 구종의 구종 가치(왼쪽)와 100구당 구종 가치(오른쪽). 포심 패스트볼과 커브와는 달리 말년까지 위력적인 수치를 유지하는 슬라이더가 돋보인다. >
결론
이른바 ‘구속 혁명’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베테랑 투수들이 큰 도전에 직면했다. 찰리 모튼이나 저스틴 벌랜더와 같이 투구 메카닉을 송두리째 바꾸며 변화에 적응한 투수도 있는 반면 자신의 경쟁력을 잃고 사라진 투수도 있다.
커쇼는 잃어버린 구속을 되찾는데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기존의 무기에 정교함을 더해 자신의 경쟁력을 유지했다. 구속을 향상하는 것만이 타자를 압도하는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다저스, 더 나아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선발 투수 중 한 명인 커쇼는 엄청난 통산 성적과 단기 임팩트로 야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동시에 높은 구속만을 좇는 현대 야구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피칭 전략 수립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위대한 여정을 마쳤다. 어쩌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 좌완 선발 200승 클레이튼 커쇼는 현대 야구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족적을 남긴 투수가 아닐까.
참고 = Fangraph, Baseball savant, Baseball prospectus
야구공작소 조승택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장호재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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