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수연 >

마당쇠란 일반적으로 양반집에서 마당을 쓸고 잔심부름하는 하인을 이르는 단어다. 이 단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야구에서 마당쇠는 감독이 필요할 때마다 경기에 자주 등판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불펜 투수를 일컫는다. 

마당쇠 투수는 1년 동안 불펜 투수 중 가장 많은 공을 던진다. 자연히 그다음 시즌 혹사의 여파를 겪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 불펜 투수가 마당쇠를 맡으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던진 날보다 앞으로 던질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구단은 잦은 등판과 멀티이닝 소화로 인한 체력 부담을 걱정하면서도, 던질 날이 더 적은 베테랑 투수에게 마당쇠를 맡긴다.

최근 몇 년간 KBO리그에는 마당쇠로 팀을 지탱한 베테랑 투수 2명이 있다. 바로 김진성과 노경은이다. 한때 이전 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던 이들이 선수 시절 말년에 다양한 기록을 써 내리며 마지막 불꽃을 뽐내고 있다. 

마당쇠로 불리는 이들이 팀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이들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팀을 위한 철인의 공헌

노경은과 김진성은 불혹 이후에도 각 소속팀에서 ‘철인’이라는 별칭이 걸맞은 행보를 보인다. 보통의 젊은 투수들을 능가하는 체력과 실력으로 팀의 마당쇠 역할을 맡고 있다.

< 노경은 SSG 랜더스 이적 후 시즌 별 성적 >

리그 1위 기록은 붉은색, 2위는 주황색, 3위는 파란색으로 구분

2022시즌은 41경기 출장으로 상대적으로 적다. 그 이유는 시즌 초 선발 투수로 활약했기 때문이다(선발 8경기 40이닝, 불펜 33경기 9.2이닝). 타구에 맞고 손가락 골절상을 당한 뒤 불펜으로 보직을 변경하였다.

과거 선발 투수였던 노경은은 SSG로 이적 후엔 불펜 위주로 활약하고 있다. 매 시즌 불펜 출장 기록에서 상위권에 있다.

올 시즌도 경기 수와 이닝 수는 상위권이다. 하지만 연투와 멀티이닝 순위는 상대적으로 낮다. 그 이유는 2가지가 있다. 우선 연투는 20회로 공동 8위지만 공동 2위권과 2개 차이밖에 나지 않아 상위권과 촘촘히 붙어 있다. 따라서 연투 횟수는 리그에서 여전히 많은 축에 속한다.

또한 내부적인 원인도 있다. KT 위즈에서 트레이드 되어온 김민이 합류했고, 조병현과 이로운 등 젊은 투수들의 스텝업이 있었다. 지난 시즌까지 노경은의 의존도가 높았던 SSG 불펜이 양적, 질적으로 모두 개선되었다. 결국 노경은 개인이 가진 부담을 다른 선수들이 함께 짊어지면서 노경은의 멀티이닝 횟수도 전년 대비 많이 줄어들었다.

노경은은 2022년 이후 271경기에 등판했다. 멀티이닝을 70회 소화해 내며 무려 279.2이닝을 소화했다. 같은 기간 그보다 더 많이 출장해 더 던진 SSG 불펜투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범위를 KBO리그 전체로 넓혀도 그보다 더 많이 나온 불펜 투수는 김진성밖에 없다. 

김진성은 어떨까? 김진성은 노경은과 달리 선수 시절 내내 불펜으로만 활약한 선수다. 프로 생활 21년 동안 1군 선발 투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다. NC 다이노스 시절 1군 무대에 데뷔하여 마무리와 중간계투를 모두 경험했다. LG 트윈스로 이적한 뒤에는 노경은과 마찬가지로 팀에서 마당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김진성 LG 트윈스 이적 후 시즌 별 성적 >

김진성은 팀 내 기록을 기준으로 1위는 붉은색, 2위는 주황색, 3위는 파란색으로 표시

2022년 후 LG 불펜 기록 상위권에는 대부분 김진성이 있다. LG 입단 후 그는 4시즌 동안 296경기에 등판해 이 기간 KBO리그 불펜 투수 중에서 가장 많이 출전했다. 젊은 투수들이 해내야 할 몫까지 베테랑이 공헌해 주면서 팀의 불펜을 지탱했다.

 

뒤늦은 나이에 찾아온 두 번째 전성기의 비결

노경은의 야구 인생은 롤러코스터였다. 한때는 국가대표였고, 한때는 방출생 신세였다. 그랬던 노경은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먼저 훌륭한 자기관리를 뽑을 수 있다. 노경은은 평소 음주와 흡연을 멀리한다. 노경은은 2019년 11월 호주 질롱 코리아 시절 해외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채식을 접했다. 채식이 부상 회복과 체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노경은은 인터뷰에서 “채식이 본인의 좋은 몸을 만드는 데 있어 기반이 되었고, 체중 증량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다만 채식 위주로 섭취하면 체력에는 좋지만, 근력에는 좋지 못하다. 이에 따라 채식을 시작한 롯데 자이언츠 시절 노경은의 포심 평균 구속은 2020년 141.km/h에서 이듬해 139.7km/h로 하락했다. 채식의 한계를 느끼고 SSG에 입단한 뒤로는 육식과 채식을 병행한 식단으로 바꿔 지구력과 근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 SSG에 입단한 2022년의 포심 평균 구속이 전년 대비 5km/h 상승했고 이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

두 번째로 포크볼의 부활이다. 두산 베어스 시절부터 노경은은 포크볼을 주무기로 사용했다. 2016시즌 도중 롯데로 트레이드됐을 때만 해도 구사율이 19.6%나 됐다. 하지만 2017년 9.6%를 시작으로 구사율을 점차 줄여 2021시즌에는 사실상 포크볼을 봉인했다. 그 사이에 체인지업 구종 구사율을 2018년 18.9%, 2020년 18.8%, 2021년 18.7%로 늘렸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왔다.

< SSG에서 포크볼을 다시 꺼낸 노경은은 구사율을 25%으로 늘렸다. >

식습관에 변화를 주며 포심의 평균 구속이 늘어남에 따라 주무기였던 포크볼도 덩달아 효과를 봤다. 포크볼 구종 가치는 지난 시즌 불펜 3위, 올 시즌 불펜 1위를 기록했다.

결국 노경은은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나이가 들수록 빨라진 포심의 평균 구속과 부활한 포크볼의 위력으로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 SK + SSG 통산 홀드 순위 >

올해로 SSG 입단 후 고작 4시즌을 보냈지만, 벌써 SK 와이번스와 SSG 통산 홀드 개수 역대 2위에 올랐다. 지난 9월 11일 삼성 라이온즈전 홀드를 기록하며 KBO리그 최초 3년 연속 30홀드를 기록했다.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을 베테랑이 처음 이뤄낸 것이라 경이롭다.

 

김진성의 사례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창단 팀의 마무리와 필승조로 활약했지만 2021시즌 극심한 부진으로 방출됐다. 그런 그가 이듬해 LG에서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 LG 이적 후 포심과 포크볼 구종 비율 >

NC 시절에는 슬라이더 비율을 10% 내외로 유지했다.
그러나 슬라이더의 피OPS가 2018년 1.125, 2019년 1.172, 2020년 0.770, 2021년 0.872로 말을 듣지 않자, LG에서 포심과 포크볼 2피치 유형으로 변신했다.

답은 구종 비율 변화에 있다. 2024시즌부터는 포크볼을 포심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 됐다. 포심의 피OPS가 시즌 피OPS보다 계속 높았기 때문이다.

< 2021 ~ 2025년 김진성 피OPS >

결국 김진성은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다. 포심의 피OPS는 상대적으로 높지만, 포크볼이 효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피OPS를 낮춰주고 있다. 이는 김진성이 여전히 마운드에서 버티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김진성은 이제 볼 배합이 단순해졌지만, 여전히 무기가 남아있다. 바로 릴리스 포인트다. 김진성의 릴리스 포인트는 2m가 넘는다. 높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출발한 포심과 포크볼은 상대 타자에게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궤적이 비슷하게 날아온다. 포심과 같은 높이에서 출발한 포크볼은 낙차가 극대화되어 상대 타자들을 속인다.

< 김진성 2025년 포심 & 포크볼 구사 분포도 (좌측 = 포심, 우측 = 포크볼) >

올 시즌 포심과 포크볼의 구사 분포도를 보자. 포심은 주로 스트라이크 존 상단에 투구한다. 결정구로 포크볼을 떨어뜨릴 땐 스트라이크 존 낮게, 홈플레이트 근처로 잘 투구하고 있다. 릴리스 포인트를 활용한 투구가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김진성의 포크볼 구종 가치는 LG 이적 후 매년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구종의 선택과 집중, 릴리스 포인트를 활용한 피칭 디자인으로 김진성은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베테랑의 헌신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다. 

< 노경은은 2015년 두산 이후 2022년 SSG에서 개인 2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

노경은은 SSG 이적 첫 해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활약했다. 41경기 출장 79.2이닝 12승 5패 1세이브 7홀드 ERA 3.05를 기록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9회 역전홈런을 맞으며 블론세이브를 기록했지만, 남은 경기를 모두 잘 막아내 KBO 역사상 첫 ‘와이어 투 와이어(Wire – to – Wire)’ 우승을 이끌었다.

김진성 역시 2020년 NC 시절 우승 이후 2023년 LG에서 개인 2번째 우승을 경험했다. 2023시즌 80경기 70.1이닝 5승 1패 4세이브 21홀드 ERA 2.18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시즌 KBO리그에서 가장 많이 등판한 투수였다. 팀 불펜 중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도 했다. 다른 후배 투수들을 위해 투수조 맏형이 헌신하며 LG를 29년 만에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다.

노경은과 김진성은 방출로 인한 아픔을 빨리 이겨냈다. 방출 통보받았을 때 이들의 나이는 30대 후반. 누군가는 포기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두 투수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나섰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결과는 이적 후 통합 우승이라는 선물로 다가왔다.

 

흔하지 않아서 더 특별하다.

“낡지 마요”

이는 베테랑 선수를 향해 팬들이 남기는 애정 담긴 메시지다.

우리는 베테랑 선수가 에이징커브의 하락 구간에 접어드는 것을 걱정한다. 40대로 향하며 신체 능력과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팀에서도 예측하고 다른 자원을 항상 준비한다.

예외적으로 노경은과 김진성처럼 예측을 뛰어넘은 선수들도 있다. 이들은 에이징커브를 거부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오히려 선수 가치로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 성남중 1년 선후배 사이인 노경은과 김진성 > 

노경은과 김진성의 야구 인생에는 수많은 곡절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방출의 아픔을 겪었고 한때 은퇴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마운드에서 다시 실력을 입증했다. 불혹의 나이에도 팀의 주축으로 활약 중인 이들은 이제 철인을 넘어 초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해야 한다. 굴곡졌던 야구 인생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으로 써 내려가고 있는 두 선수의 마지막 불꽃이 끝까지 힘차게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참조 = STATIZ, 스포츠 경향, 연합뉴스, 네이트 스포츠

야구공작소 강형주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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