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현서>
타순은 팀 득점에 근간이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어느 타순에 어떤 특징을 가진 선수를 배치하는지에 따라 경기 흐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타순은 1, 2번 타순에 발 빠르고 작전 수행이 좋은 타자를 주로 배치한다. 그리고 팀에서 가장 강한 타자들은 3, 4, 5번에 연달아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데이터가 발전함에 따라 팀에서 가장 잘 치는 선수들을 전진 배치하는 소위 ‘강한 2번 타자’ 전략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올해 메이저리그(MLB) 월드 시리즈 우승 팀 LA 다저스의 테이블 세터는 오타니 쇼헤이와 무키 베츠다. 특히 오타니를 1번 타순에 배치한 것은 포스트 시즌 내내 이슈가 됐다. 상대 팀이었던 뉴욕 양키스 역시 출루와 장타 능력을 두루 겸비한 만능 타자 후안 소토를 2번 타자로 배치했다. 그리고 양키스의 3번 타자는 MLB 최고의 홈런 타자 애런 저지다. 전통적인 타순에서 홈런 타자는 4번을 치기에 이와 대비되는 전략이다.
이처럼 MLB는 과거 타순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팀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
강한 2번 타자
강한 2번 타자는 이제 대중들이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진 전략이다. MLB에서 강한 2번 타자를 활용하는 근거는 득점 생산성이 좋은 타자에게 최대한 많은 타석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아래 표1은 2024년 KBO리그의 타순별 타석수에 대한 지표다. 당연히 상위 타순으로 갈수록 타석에 들어서는 빈도가 높아진다. 만약 타격 능력이 좋은 타자를 4번 대신 2번에 배치한다면 4.6% 더 많은 타격 기회를 얻을 수 있다.
< 표1 = 2024년 KBO리그 주요 타순 지표 >
이때 강한 타자를 1번이 아닌 2번에 배치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이는 강타자가 주자 있을 때 타격하는 상황을 더 만들기 위함이다. 1번 타자는 1회에 반드시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타격한다. <더 북>에 따르면, 1번 타자는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격하는 경우가 다른 타순보다 64% 높다. 따라서 1번은 출루 능력이 좋은 타자, 2번은 타격 능력이 좋은 타자를 배치해 각자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순을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팀 득점 확률을 높일 수 있다.
< 표2 = 최근 5년간 MLB 타순별 OPS >
실제로 MLB 팀들은 2번 혹은 3번에 가장 강한 타자를 배치하고 있다. 표21를 통해 2, 3번 타순의 OPS가 다른 타순보다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4번 타자의 OPS가 2번 타자보다 높은 시즌은 2021년이 유일하다. 최근 3년인 2022년~2024년으로 기간을 좁혀보면 2번 타자의 OPS가 4번 타자보다 확실히 높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MLB에서 강한 2번은 예전의 4번 타자와 같은 인식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조삼모사와 기대 득점
조삼모사: 순서를 뒤바꿔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
강한 2번과 같이 잘 치는 타자들을 상위 타순에 배치하는 전략은 조삼모사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무리 득점권에 주자를 배치해도 결국 찬스에 상대적으로 타격이 약한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는 아웃 카운트에 따라 기대 득점이 달라진다. 즉, 강한 타자들이 앞에서 아웃당하지 않고 좋은 찬스를 만들어주면 그만큼 기대 득점이 상승한다. 아래 표는 2014년부터 2024년까지 KBO리그의 상황별 기대 득점표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듯, 노 아웃과 2아웃의 가치는 매우 다르다. 노 아웃엔 출루만 되면 0.980점의 기대 득점을 가지지만, 2아웃엔 주자 만루가 돼도 0.841점 수준밖에 미치지 못한다.
< 표3 = KBO리그 기대 득점표 (2014~2024) >
단편적인 예로, 타격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발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가 1, 2번에서 아웃을 당했다고 가정하자. 뒤이어 나오는 3, 4번이 장타를 만들더라도 이미 2아웃이기 때문에 득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안타나 볼넷 등이 필요하다.
반면 타격 능력이 좋은 1, 2번이 출루한다면 노 아웃이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타자들이 땅볼 혹은 외야 플라이를 치더라도 득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조삼모사와 같이 순서만 달라졌지만, 후자는 안타가 아니어도 득점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예시가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핵심은 ‘아웃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아웃을 당하지 않으면 그만큼 기대 득점이 상승한다. 땅볼과 플라이 등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진다. 이를 파악한 MLB 팀들은 강한 타자에게 최대한 많은 타석을 부여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타순 조정은 실제 연구를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키스 로 저서의 <스마트 베이스볼>에 따르면, 강한 타자를 상위 타선에 배치하는 타순은 보통의 타순보다 한 시즌에 10~15득점을 더 할 수 있다. 물론 큰 변화폭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선수 영입이나 타격 능력의 개선 없이 단순 배치만으로 득점이 증가하는 만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KBO리그의 타순
그렇다면 KBO리그는 어떤 식으로 타순을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변화의 움직임은 보이지만 여전히 2번보다 4번 타자의 능력을 중요시하고 있다. 먼저 MLB에 강한 2번 타자 이론이 자리 잡기 전인 2015년부터 2019년의 데이터를 살펴보자.
< 그림1 = KBO리그(2015~2019) 타순별 OPS >
<그림1>은 해당 기간 KBO리그의 타순별 OPS를 나타내는 표다2. 당시 KBO리그 팀들은 지극히 전통적인 타순 방식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1, 2번은 타격 능력 대신 발 빠르고 작전 능력이 좋은 타자를, 4번은 팀 내 최고의 타자를 배치했다. 1, 2번 타순의 OPS를 보면 대부분 6번 타순의 OPS보다도 낮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4번 타자의 OPS는 여타 타순보다 월등히 높은 모습이다.
다만 2019년은 MLB에서 강한 2번 타자가 막 유행했던 시기다. 따라서 <그림1>의 2019년 그래프(보라색)를 보면 3번 타자의 OPS가 4번 타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또한 2번 타자의 OPS도 6번보다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KBO리그도 강한 타자를 상위 타순에 배치해야 한다는 인식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 그림2 = KBO리그(2020~2024) 타순별 OPS >
그럼 MLB에 강한 2번 타자가 완전히 자리 잡은 최근 5년간 KBO리그의 타순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자. KBO리그 팀들은 해당 기간 트렌드에 맞춰 변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부터 4번 대신 3번에 더 강력한 타자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또한 2번 타순의 OPS가 다른 타순에 비해 높아진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과거 6번 타순보다도 낮았던 2번 타순의 OPS는 2020년(진한 파랑)과 2024년(보라색)에 5번 타순보다도 높은 OPS를 기록했다. 다만 KBO리그 팀들은 여전히 2번 타순보다 4번 타순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타순을 역행하는 팀들
KBO리그 팀들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트렌드를 따라갈 때, 몇몇 팀들은 여전히 약한 2번을 고집하고 있다. 다음은 올해 상대적으로 2번 타순의 OPS가 낮은 팀들이다.
< 표4 = 2024년 약한 2번 사용 팀 >
해당 팀들은 6번 타순에 배치된 선수들이 2번 타순에 배치된 선수들보다 좋은 타격 능력을 보여줬다. 이들 중 이러한 경향이 가장 심한 팀은 두산 베어스다.
< 표5 = 최근 2년간 두산 베어스 타순별 OPS >
위의 표5를 통해 알 수 있듯, 두산은 2년 연속 2번 타순의 OPS가 6번 타순보다 낮았다. 특히 올해는 무려 0.2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올해 KBO리그 2번 타순의 평균 OPS가 0.783임을 감안하면 두산의 2번 타자 OPS(0.696)는 매우 뒤처지는 수치다.
<표6 = 2024년 두산 베어스 주요 타순별 지표>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두산 타순의 의도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위의 표6을 보면 2번 타순에서의 희생 번트가 6번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타격 생산성을 파악할 수 있는 출루율과 장타율은 6번 타순이 훨씬 좋은 수치를 기록했다. 즉, 2번 타순에 타격 능력 대신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를 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조삼모사의 효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야구는 결국 27개의 아웃 카운트가 채워지면 경기가 끝난다. 그 소중한 아웃 카운트가 작전 등의 이유로 투입된 2번 타자에 의해 채워진다면 다득점 확률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더욱이 2번 타순은 팀에서 2번째로 많은 타석에 들어서게 된다.
이처럼 현재 KBO리그는 여전히 4번 타자를 중요시하며 특정 팀들은 약한 2번을 적극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를 시도할 용기
2019년 키움 히어로즈는 박병호를 2번 타순에 배치하는 시도를 했다(링크). 하지만 결국 정규시즌에선 2번 타자 박병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선수 본인이 2번 타순에 들어서는 것에 심리적인 이유로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론상 강점이 있는 전략도 실제로 적용하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여러 난관을 마주할 수 있다. 야구는 결국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2번’ 전략을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MLB 최고의 타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1, 2, 3번에 전진 배치돼 경기를 나서고 있다. 분명 강점이 있는 전략이기에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언젠가는 KBO리그에서도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 결정이 현장의 용기에 올라타 실천에 옮겨지는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참고 = STATIZ, MK스포츠, SPOTVNews, 스마트베이스볼
야구공작소 김건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익명, 당주원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최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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