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과 승부욕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승희 >

2024년 5월 16일 수원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롯데와 KT의 경기 4회 말. KT 장성우는 롯데 박세웅과의 풀카운트 승부 끝에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장성우는 1루 베이스를 밟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소리가 송출되진 않았지만, 입 모양만 봐도 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송사는 장성우가 욕을 하는 장면을 정면에서, 그것도 슬로우모션으로 다시 보여줬다. 타격하는 모습도, 주루하는 모습도 아닌 더그아웃에 들어가며 욕을 내뱉는 모습을 말이다. 해설진들은 그 장면을 보고 “지금 화가 많이 났다.”, “스스로에게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라며 얼버무렸다.

< 2024년 5월 16일 롯데 vs KT 4회 말 장성우 >

선수들이 경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욕을 내뱉는 모습을 여러 스포츠 종목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상황에 따라 ‘승부욕’으로 포장되어 팬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한다.

배구선수 김연경의 대표적인 별명 ‘식빵 언니’는 특정 욕설을 발음할 때와 ‘식빵’을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이 비슷해서 붙은 별명이다. 마약 투약 및 대리 처방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오재원의 선수 시절 별명 ‘오식빵’도 비슷하다. 경기 중 욕설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그것이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선수들의 승부욕과 간절함에서 비롯된 다소 과격한 언행이 때로는 시청자에게 재미나 통쾌함을 주기도 한다. 선수들의 솔직한 감정표현을 보는 것도 스포츠의 또 다른 재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라운드 위 선수가 이른바 ‘식빵을 굽는’ 것까지 미화될 일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 2024 KBO 리그 규정 벌칙 내규 >

KBO 리그 규정 ‘경기 중 선수단 행동 관련 지침 2항’은 욕설을 금지한다. 또한 ‘감독, 코치 또는 선수가 이로 인해 퇴장당했을 때에는 경고, 유소년야구 봉사활동, 제재금 100만원 이하의 제재를 받는다. 과거 관련 징계의 대부분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규정에 따르면 욕설의 대상과는 무관하게 행위 자체가 제재 대상이다.

 

프로야구 선수의 욕설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수들이 욕하는 장면을 굳이 강조해서 송출하는 방송사도 문제다. 소리가 송출되지 않는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들 모두가 선수의 입 모양을 보고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면 욕을 송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생방송 중 선수들이 내뱉는 모든 욕설을 필터링하긴 힘들다. 그러나 선수의 플레이 장면도 아닌 욕 하는 장면을 슬로우모션에 클로즈업까지 해서 리플레이로 송출하는 건 분명 옳지 않다.

프로야구는 어른들만 즐기는 콘텐츠가 아니다. 2023 프로스포츠 관람객 성향 조사에 따르면 프로야구 고관여팬 중 14~19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14.9%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조사 결과인 12.1%보다 높아진 수치다. 어린 야구팬들과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프로야구 선수는 롤모델이다.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습관적으로 욕을 내뱉는 모습은 그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팬들이 그런 모습을 ‘승부욕’, ‘열정’과 같은 단어로 감싸고 들기까지 한다면 어린 선수들이 보고 배우지 말란 법이 없다.

실제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2024 고교야구 시즌 개막과 함께 “전국대회에 참가한 일부 학생 선수가 부적절하게 행동하고 거침없는 욕설과 항의, 예의에 벗어난 발언과 감정 표출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며 관련 지침과 제재 기준을 마련했다. 물론 학생 선수들의 욕설 문제는 함께하는 현장 지도자들이나 또래문화에도 원인이 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모든 아마추어 선수의 롤모델인 프로야구 선수들의 책임이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나.

 

승부욕과 간절함, 플레이로 보여줘야

우리 프로야구는 과거 관중들의 그라운드를 향한 과한 욕설과 폭언으로 홍역을 치렀다. 선수와 관중 사이에 직접적인 마찰이 발생하거나 다른 관중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시민의식의 성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결과, 적어도 (온라인이 아닌) 야구장에서만큼은 훨씬 선진화된 관중 문화가 자리 잡았다.

< 야구장 욕설 퇴치 캠페인 >

프로야구 선수들의 경기 중 욕설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단 야구계 집단의 특성에 가깝다. 현 롯데자이언츠 김태형 감독은 해설위원 시절 중계 도중 내뱉은 욕설이 그대로 송출되며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유소년 지도자가 학생 선수들을 상대로 욕설과 폭언을 일삼는 악습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그 중엔 프로 출신 지도자도 있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라는 영예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야구장의 수많은 카메라가 선수 개개인을 촬영하고 있고 수만 명이 이를 지켜 보고 있다. 그 중에는 자신을 롤모델로 삼는 한국 야구의 새싹들도 있다. 이제 야구계의 잘못된 문화를 뿌리 뽑아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현역 선수들이 나서는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욕설을 최대한 자제하자는 의견이 모으는 자정작용이 필요하다. 만약 도저히 욕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헬멧이나 글러브로 입을 가리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 방송사도 ‘야구 경기 중계’라는 본래 역할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화제성을 노린 재송출이 욕설 문화 재생산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승부욕에서 나오든 화를 표출하기 위한 것이든 그라운드 위에서 욕하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승부욕과 욕은 다르다. 선수들의 승부욕과 간절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은 최선을 다한 플레이다.

 

참고 = 티빙, KBO, 스포티비뉴스, 스포츠조선, 일요신문, 데일리안

야구공작소 김유민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금강, 민경훈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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