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표현을 들은 적, 혹은 해본 적 있을 테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스포츠 경기 중에도 마찬가지다. 야구에서는 코치가 위기를 맞은 투수를 위로하거나 클러치 상황에 들어서는 타자를 격려할 때 등이 대표적이다.
말한 당사자는 액면 그대로 뱉은 말이다.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불안해 보이는 사람에게 긴장 풀라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효과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없다. 심지어 역효과를 미칠지도 모른다.
우선 ‘긴장하지 마’라는 말은 긴장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긴장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종종 긴장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지금부터 그 이유와 함께 더 나은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지 확인해 보자.
긴장은 당연하다
우선 우리가 왜 긴장하는지부터 알고 넘어가자. 흔히들 긴장이라는 감정을 마치 없애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중요한 발표나 시험 등을 앞두고 긴장하지 말자며 우황청심원을 복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과 달리 긴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껴야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 편도체 위치 >
이는 뇌의 ‘편도체’라는 부위 때문이다. 편도체는 감정을 처리하는 기관으로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저장해둔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사람은 길을 걷다 강도를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다. 편도체는 이런 위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써 우리 몸을 긴장시킨다. 즉 편도체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센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실제로 실험을 위해 편도체를 제거한 쥐는 고양이를 보고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잡아먹혔다. 선천적 유전 질환으로 편도체가 손상된 한 여성 역시 뱀이나 거미, 그리고 무서운 영화 등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녀가 겁이 없는 ‘강심장’인 게 아니라 공포라는 감정을 아예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다.
우리와 똑같이 긴장하는 스포츠 스타들
이처럼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사람은 누구나 긴장을 한다. 세계적인 명성의 스포츠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보통 해당 분야에서 그 정도 경력이면 더 이상 긴장을 느끼지 않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 항상 마운드에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류현진 >
평소 강한 멘탈을 가진 걸로 유명한 류현진은 자신도 경기 중 긴장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기자가 묻자 류현진은 “그런 (위기) 상황이면 긴장되고 떨린다. 밸런스를 잃을 때가 있다”라며 “상대를 알고 내가 준비한 방식들을 생각하고 한 번에 무너지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던져 제구가 좋게 되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피겨 여왕 김연아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긴장감을 호소한 적 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경기를 마친 후 취재진과 만남에서 “아침 연습 때도 괜찮았고 낮잠도 푹 자서 기분이 좋았는데 경기 직전 웜업을 하면서 긴장감이 몰려왔다”면서 “점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실수 없이 마쳐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긴장한 이유에 관해 묻자 “저도 사람이니까 긴장감을 느낀다”면서 “그렇지 않아 보일 때가 많지만 정도가 다를 뿐 긴장을 한다”라고 얘기했다. 그 외에도 타이거 우즈, 알렉스 퍼거슨, 마이클 조던 등 유명 해외 스포츠인들 역시 경기를 앞두고 긴장한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항상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선수라고 특별히 심장이 튼튼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 남들과 똑같이 긴장한다. 스스로가 평소 긴장을 많이 한다고 자책할 이유가 없다. 멘탈에서 중요한 것은 긴장의 유무가 아니다.
‘긴장하지 마’라는 말이 효과가 없는 이유
긴장이 자연스럽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왜 긴장한 사람에게 긴장을 풀라고 해도 효과가 없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조언이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 중 하나가 ‘힘내’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긴장하지 마’라고 듣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 머릿속은 ‘긴장’이라는 단어로 가득 찬다. 이는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가 증명한 ‘백곰 효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사고 억압이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 백곰 효과,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
먼저 A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해라’고 하고 B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후 백곰이 생각날 때마다 종을 울리게 했다. 실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B그룹이 A그룹보다 훨씬 더 많은 종을 울렸다. 이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억제하려 할수록 되려 더 쉽게 떠오르는 역설적 현상을 보여준다.
한화 이글스 이지풍 코치도 칼럼을 통해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2013년 넥센 히어로즈 시절 한화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다. 당시 팀 선발투수로는 김영민(현 김세현)이 예고됐고 승패에 따라 순위가 뒤바뀌는 중요한 경기였다.
운동장에 나가다 마주친 선수 및 코치들이 김영민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영민아 부담 갖지 마, 편하게 던져” 그 순간 김영민의 편안했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오히려 오늘 편하게 하면 안 되는구나를 느끼면서 그때부터 긴장이 됐다고 한다. 이날 김영민은 1이닝 3실점을 기록하며 조기 강판되고 말았다.
모두 김영민이 긴장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김영민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다. 긴장을 풀어 주고자 무심코 던진 말이 때로는 편안한 상태였던 선수의 긴장을 ‘자각’시킨다.
더 나은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긴장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 그리고 긴장의 역설을 확인했다. 이제 ‘긴장하지 마’라는 말보다 더 나은 표현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아보자.
앞서 백곰 효과 실험을 진행했던 다니엘 웨그너는 ‘초점 전환’이라는 방식을 제안했다. 백곰 효과 이후 후속 연구에서 그는 참가자들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백곰을 생각하는 대신 빨간색 폭스바겐을 떠올려라’고 지시한 것이다. 백곰을 아예 떠올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전에 비해 그 빈도가 크게 줄었다.
수비수가 실책이 걱정될 때 ‘실책하면 안 돼’가 아닌 ‘실책 대신 경기 후 집에 가서 먹을 맛있는 저녁’을 생각하는 식이다. 또 투수가 제구가 흔들릴 때 ‘볼넷 주면 안 돼’가 아닌 ‘볼넷 대신 지난 여름 놀러 갔던 해수욕장’을 떠올리는 게 나을 수 있다.
삼성 라이온즈 투수 임창민이 과거 유튜브 ‘썩코치의 야구쑈’ 채널에서 밝힌 방법도 인상적이다. 임창민은 “중요한 경기에서 긴장을 안 하는 건 비정상이다”라며 “긴장을 없애려 하지 말고 긴장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미 긴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후의 초등학교 시절 스승으로 알려진 양윤희 서석초 감독은 자신이 볼 때 선수에게 가장 필요 없는 말이 “자신 있게 해. 긴장하지 마. 차분하게 해” 이런 말들이라고 밝혔다. 대신 선수가 집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미션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긴장’을 언급하지 않는 데 있다. 애써 긴장을 없애려는 게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시야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노력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긴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한 노력과 분투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p176
앞으로 삶에서 긴장되는 순간을 마주한다면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성장의 기회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참고 = 서울아산병원, MLB.com 썩코치의 야구쑈, 코치라운드, Paradoxical effects of thought suppress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3(1), Setting free the bears: Escape from thought suppression. American Psychologist, 66(8), 671–680.
야구공작소 정세윤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양재석,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한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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