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신민경 >
야구공과 배트, 글러브 간 상호작용으로 대부분의 플레이가 만들어지는 야구에서 ‘도루’는 특별한 플레이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다소 정적인 야구에서 도루는 경기에 속도감을 더하고 관중들을 흥분시킨다.
KBO의 역대 팀 최다 도루는 1995년 롯데 자이언츠가 기록한 220개, 최다 도루실패는 1990년 LG 트윈스의 101개였다. 모두 20세기의 기록이다. 현대 야구에서는 홈런과 삼진의 가치가 강조되며 상대적으로 도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2023시즌 KBO에는 이러한 경향에 역행하는 팀이 나타났다. 이 팀은 4월 23일 기준으로 20경기에서 34개의 도루와 21개의 도루실패를 기록 중이다. 144경기로 환산했을 때 도루 245개, 도루실패 151개를 기록할 페이스인 이 팀은 바로 LG 트윈스다.
< 2023 KBO 도루 관련 지표. 4월 23일 기준 >
물론 시즌 마지막까지 이러한 페이스가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현재 LG가 도루에 진심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염경엽 감독이 존재한다. 넥센 히어로즈와 SK 와이번스를 거쳐 LG까지 온 염경엽 감독은 그 누구보다 도루를 사랑하는 감독이다. 여러 팀을 맡아온 그는 한결같이 도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도 그의 도루 예찬은 계속됐다. 특히 “도루의 손익분기점은 65%” 발언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상당한 화제를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루의 손익분기점은 70% 초중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염경엽 감독 본인이 넥센 시절 “도루 성공률이 75%는 돼야 팀에 보탬이 된다. 성공률이 이보다 낮으면 뛰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세월이 흐르며 생각이 바뀐 것일까. 염경엽 감독은 이전과 달리 손익분기점을 65%로 잡은 이유를 ‘부가적 영역’에서 꼽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보통은 도루 성공률이 75%는 돼야 이득이라고 하지만, 나는 65% 성공률이라면 나머지 10%는 다른 부가적인 영역에서 효과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부가적 영역’은 상대 팀 투수와 수비진에게 주는 압박과 우리 팀 타자에게 주는 도움이라고 한다. 주자의 움직임을 견제하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방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의미다. 두산 베어스의 이승엽 감독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도루가 ‘통계적 수치를 뛰어넘는’ 무형의 가치가 있음을 피력했다. 과연 도루가 그 정도로 가치 있는 행위일까? 지난 몇십 년간의 도루 역사를 통해 되짚어 보자.
KBO의 도루 변천사
KBO에서 발야구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팀은 ‘육상부’라는 별명을 가졌던 2000년대 중후반의 두산 베어스다. 두산은 이종욱, 고영민, 민병헌, 오재원 등을 앞세워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 연속 팀 도루 1위를 기록했다. 2010년대에는 넥센 히어로즈가 새로운 발야구를 이끌었다. 2012시즌에는 무려 4명의 선수가 20도루 이상을 기록하며 팀 도루 1위를 달성했는데, 특히 강정호와 박병호 등 평소 도루와는 거리가 멀던 선수들까지 적극적으로 뛰었다. 이 둘은 해당 시즌 20-20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끝으로 도루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양 팀을 합한 경기당 도루 횟수는 2008~2015년에 평균 2.71개로 정점을 찍은 뒤 201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하락해 평균 1.86개로 감소했다. 2020년 심우준은 35개의 도루로 역대 최저 도루왕에 올랐다. 이는 10개 구단 체제 이후 144경기로 전체 경기 수가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기록이다.
< KBO의 2000년대 이후 경기당 도루 시도 변화 >
도루는 ‘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도루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이버메트릭스가 주류 야구계로 편입된 이후 야구계는 도루가 성공했을 때의 ‘공’보다 실패했을 때의 ‘과’가 훨씬 크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수석 고문인 빌 제임스는 그의 십계명 중 하나로 “70% 이상의 성공률이 아니면 도루하지 말라“를 꼽았다. 즉 도루에는 손익분기점이 존재하며 그 이하의 성공률을 기록할 시 손해라는 의미다.
하지만 도루가 줄어든 이유가 단순히 이뿐만은 아니다. 앞선 논리대로라면 손익분기점 이상의 도루 성공률만 보장된다면 적극적으로 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다만 그것만으로 도루의 당위성이 부여되기는 부족하다. 도루는 필연적으로 부상의 리스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햄스트링 부상이다. 햄스트링 부상은 스프린트를 하거나 갑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할 때 주로 발생한다. 축구, 농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흔히 일어나는데 야구에서는 도루 중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당장의 부상이 아니더라도 144경기라는 장기 레이스에서 반복적인 스프린트는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크다.
또한 베이스 근처에서의 슬라이딩 역시 수비수와의 충돌, 혹은 잘못된 자세로 인해 큰 부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NC 다이노스 시절 나성범은 무릎이 펴진 상태로 슬라이딩하다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김주찬 역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도중 새끼손가락이 상대 수비수 스파이크에 밟혀 팀을 이탈했었다.
이러한 부상 위험 때문에 70%가 넘는 성공률에도 도루를 시도하지 않는 선수들이 많다. 대표적인 선수가 마이크 트라웃이다. 그는 커리어 통산 204개의 도루를 기록한 준족이다(2023년 4월 23일 기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에도 성공했다. 단순히 많이 뛰었을 뿐 아니라 통산 도루 성공률이 85%일 정도로 효율성도 뛰어났다. 하지만 트라웃은 11도루를 기록한 2019년을 마지막으로 올해까지 총 도루 시도 횟수가 5번에 불과하다.
< 사진 출처 = LA 에인절스 공식 트위터 >
예전만큼 빠르지 않아서일까? 그건 아니다. 트라웃의 순간 스프린트 스피드는 2019년 이후로도 상위 10%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트라웃보다 빠른 발을 가진 선수는 MLB에도 많지 않다. 트라웃이 더 이상 뛰지 않는 건 도루를 ‘못’ 해서가 아니다.
< 상위 10% 밑으로 떨어진 적 없는 트라웃의 스프린트 스피드 >
2016년 이후로 트라웃은 계속해서 부상에 신음했다. 그리고 그 부상 중 상당수는 도루에서 기인했다. 트라웃은 2017년 5월 28일 도루 중 헤드퍼스트 슬라이딩하다 손가락 인대 손상으로 처음 DL에 등재됐다. 이듬해 8월 1일 경기에서는 또다시 슬라이딩 도중 오른쪽 손목을 잘못 짚어 DL에 올랐다. 이후에도 여기저기 자잘한 부상들을 입었고, 2019년 200도루 달성에 성공한 이후 현재까지 단 4개만을 추가했다.
올 시즌 MLB는 베이스의 크기가 커지는 등 주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하지만 그런데도 트라웃의 2023년 도루 시도는 여전히 ‘0’이다.
그런데도 LG는 왜?
LG가 도루의 손익분기점이나 부상 리스크를 몰라서 많이 뛰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언급했듯 염경엽 감독은 자신만의 도루 손익분기점으로 65%를 꼽았다. 그리고 부상 문제에 대해서도 “현재 우리 팀보다 뎁스(전력)가 얇았던 넥센에서도 뛰는 야구를 해봤다. 그게 문제였다면 다들 지쳐서 쓰러졌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다들 최고 성적을 냈다. (관리를 하면서 뛰는 야구를 하면) 체력에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LG는 4월 27일 기준 리그 단독 1위에 올라가 있다. 그리고 LG는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등 주요 팀 타격 지표에서도 모두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그 내 그 어떤 팀보다도 다득점을 뽑아내기 쉬운 구조다. 도루의 가치가 다득점보다는 ‘한 점’을 쥐어짜 내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지난 4월 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염경엽 감독은 경기 중 아쉬운 상황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 그 분노의 이유를 단 ‘1승’의 소중함에서 꼽았다.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두산과 똑같은 88승에도 정규시즌 2위의 아픔을 겪었던 그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단 ‘1승’의 소중함이 ‘65%의 손익분기점’과 ‘부가적 영역’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염경엽 감독의 도루 ‘찐’ 사랑이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보자.
참고 = STATIZ, Baseball savant
야구공작소 정세윤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도삼, 오연우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신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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