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야구는 암 슬롯을 기준으로 투구폼을 구분한다. 암 슬롯이란 투수가 공을 릴리스하는 순간에 지면과 전완근이 이루는 각도를 뜻한다. 암 슬롯이 45도 이상이면 오버핸드, 20~45도의 투수를 스리쿼터, 0도 부근에서 형성되면 사이드암, 그 이하로 떨어지면 언더핸드 투수라고 부른다.다만 암 슬롯이 같은 투수라도 공을 던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정확히는 공을 쥔 손이 릴리스포인트를 통과하는 각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제이슨 애덤, 케빈 가우스먼, 셰인 비버를 예로 들어보자. 세 투수는 모두 스리쿼터 유형이다. 릴리스포인트 역시 비슷하다. 다만 팔 스윙은 조금씩 다르다. 애덤은 횡으로 강하게 팔을 휘두른다. 반면 가우스먼은 정면을 향해 릴리스 동작을 취한다. 비버는 두 투수의 중간쯤 되는 각도의 팔 스윙을 보여준다.
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피칭 디렉터인 브라이언 배니스터는 팔 스윙을 기반으로 투수를 분류하는 체계를 구상했다. 그에 따르면 팔 스윙에는 총 5가지 유형이 있다. 훅(안으로 강하게 휘는 스윙), 드로우(안으로 살짝 휘는 스윙), 스퀘어(정면을 향한 스윙), 페이드(밖으로 살짝 휘는 스윙), 슬라이스(밖으로 강하게 휘는 스윙)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법에 따르면 애덤은 훅, 가우스먼은 스퀘어, 비버는 드로우 유형에 해당한다.
첨단 장비가 불러온 새로운 세계
배니스터가 투수마다 팔 스윙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첨단 장비의 활용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초고속 카메라 ‘에저트로닉’과 3D 모션 캡처 프로그램 ‘키나트랙스’의 공이 컸다. 에저트로닉 카메라를 활용하면 릴리스 포인트에서 손바닥이 바라보는 각도, 즉 핸드 포지션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키나트랙스는 투수의 손이 릴리스 포인트까지 넘어오는 방향을 3D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낸다.
두 장비를 통해 파악 가능한 핸드 포지션과 팔 스윙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먼저 투수의 핸드 포지션은 구종마다 차이를 보인다. 공을 던지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투수가 패스트볼울 던질 때는 손바닥이 포수의 미트를 바라보고 있지만, 싱커를 던질 때는 우투수 기준 오른쪽을 향한다. 핸드 포지션은 예민한 영역이다. 특정 구종을 집요하게 던지거나, 그 밖의 불명확한 이유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팔 스윙과 릴리스 동작은 일정한 시퀀스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둘의 변화는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변화는 투수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미묘하다.
물론 이제는 첨단 장비를 활용해 핸드 포지션과 팔 스윙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달라진 팔 스윙을 도로 바꾸는 일은 타자의 스윙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베니스터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투수의 팔 스윙을 억지로 바꾸는 대신 투구 레퍼토리를 현재 팔 스윙에 적합하게 바꿨다.
팔 스윙의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한 사례들
2018시즌의 조 켈리는 팔 스윙에 맞는 레퍼토리 변화로 효과를 본 대표적인 사례다. 켈리는 시즌이 진행될수록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주무기였던 슬라이더가 점차 위력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레드삭스의 코칭스태프는 에저트로닉과 키나트랙스를 활용해 켈리의 암 액션을 분석했다.
그 결과 시즌 초에 비해 달라진 점이 두 가지 있었다. 먼저 핸드 포지션의 변화다. 시즌 초반 켈리는 손바닥을 충분히 내전시킨 채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손바닥은 어느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켈리의 슬라이더의 구위는 현저히 줄어든 데 반해 패스트볼의 위력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2018시즌 조 켈리의 월별 슬라이더,직구 헛스윙/스윙 비율>
(출처= 베이스볼 서번트)
더불어 팔 스윙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배니스터는 본래 드로우였던 켈리의 팔 스윙이 스퀘어로 바뀌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켈리에게 과감히 슬라이더 사용을 줄이고 커브 빈도를 높여 나갈 것을 권유했다. 조언을 받아들인 켈리는 점차 커브 구사율을 높여갔다. 그 결과 포스트시즌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구종을 살리기 위해 팔 스윙을 조정하는 일도 어렵지만 가능하다. 로건 웹은 2019시즌까지는 평범한 투수였다. 2020시즌을 앞두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부임한 배니스터는 그의 싱커를 살리고자 했다. 로건 웹은 배니스터의 조언에 따라 릴리스포인트를 18cm 가량 낮췄다(5.58ft→4.99ft). 공을 놓는 지점이 낮아지면서 그는 드로우에서 슬라이스 스윙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싱커 비율 역시 한껏 끌어올렸다(15%→37.8%). 그 결과 2021시즌 로건 웹은 변화된 팔 각도와 싱커에 완전히 적응해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보완해야 할 점
투수의 팔 스윙 유형은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개념이다. 따라서 기존의 투수 분류법을 대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첫 번째, 증상에 맞는 명확한 처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배니스터는 왜 켈리에게 다른 변화구가 아닌 커브 사용을 지시했는가? 현재 알려진 정보로는 이 판단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 배니스터 역시 ‘손바닥을 뒤에 놓고 던지는 투수들은 커브가 좋은 경향이 있다’라고만 언급할 뿐이다.
두 번째, 배니스터의 분류법은 팔 스윙의 방향에만 집중할 뿐 길이는 고려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투수들은 팔 스윙의 방향보다는 길이를 줄이려는 시도를 더 많이 한다. 루카스 지올리토가 대표적인 예다. 지올리토는 2020시즌을 앞두고 팔 스윙을 짧게 바꾸었다. 그에 따르면 간결해진 팔 스윙으로 인해 공의 윗면을 채기가 편해졌고, 패스트볼의 회전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링크) 이는 앞서 살펴본 조 켈리의 의도치 않은 변화와 비슷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팔 스윙의 길이를 줄일수록 방향은 스퀘어에 가까워지는가? 역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제이슨 애덤은 백스윙이 매우 짧지만 훅 유형으로 공을 던진다.
이와 같은 한계점에도 배니스터의 투수 분류법은 굉장히 흥미롭다. 앞으로 첨단 장비와 이론이 더욱 발전해 나간다면 언젠가 새로운 분류법으로 투수를 바라보는 날도 오지 않을까?
참고 : Baseball Savant,
밴 린드버그&트래비스 소칙, 『MVP 머신』, 두리반, 2021, 449-501면
야구공작소 조훈희 칼럼니스트
에디터 – 양재석, 전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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