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당신이 기억해야 할 투수, 브래드 켈러

(사진출처: 캔자스시티 로열스 공식트위터)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 에릭 호스머와 로렌조 케인은 팀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은 이별의 선물로 2장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남겼고 이를 활용해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고 했다. 2라운드 전까지 총 4장의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로열스는 2018년 드래프트에서 브래디 싱어(18순위), 잭슨 코워(33순위), 다니엘 린치(34순위) 크리스 부비치(40순위)를 차례로 지명하며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꿨다. 그리고 작년 드래프트에서는 대학 최고의 좌완 투수라고 평가받던 에이사 레이시(전체 4순위)를 데려오면서 기존 팜시스템의 퀄리티를 한층 더 높였다.

로열스의 투수 유망주 현황

이렇게 2번의 드래프트를 통해 좋은 투수 유망주를 대거 수급한 로열스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새롭게 구축하고 설계한 ‘투수왕국’에 포커스를 맞췄다. 리빌딩이라는 팀의 기조와 맞불려 유망주들이 집중 조명을 받다 보니 지난 3년 동안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던 로열스의 우완투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우완투수는 앞서 언급한 5명의 투수 유망주와는 달리 하위 라운드에서 지명을 받은, 처음부터 기대치가 낮은 선수였고 유망주의 퀄리티를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Top100 랭킹에 단 한 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더불어 통산 탈삼진/볼넷 비율도 1.85로 리그 평균보다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투수는 2017년에 데뷔해 작년까지 총 360.1이닝을 소화하며 3.50의 ERA, 3.90의 FIP를 기록했고 2019년에는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서 대단히 좋은 피칭을 했다(7이닝 무실점 5K). 그리고 이 선수의 나이는 아직 미국 나이로 25살, 95년생에 불과하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브래드 켈러다.

(사진출처: 캔자스시티 로열스 공식트위터)

주목받지 못한 유망주에서 메이저리거가 되기까지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켈러는 존 스몰츠를 보면서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고등학교(플라워리 브랜치)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켈러는 대학이나 메이저리그 팀들로부터 일말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계속되는 무관심 속에 켈러 본인도 자신감을 잃어갔고 형을 따라 축구 쪽으로 진로를 변경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2013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존 루틴에 새롭게 추가한 롱토스 훈련과 함께 전년도에 비해 신체 사이즈가 커진 켈러는 80마일대 패스트볼이 아닌 91마일의 패스트볼을 뿌렸다. 이는 곧바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켈러는 그해 엘리트 유망주로 평가받던 클린트 프레이저(현 뉴욕 양키스 외야수)와의 맞대결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이며 자신의 주가를 더 높여나갔다.

당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지역 스카우트였던 T.R. 루이스는 프레이저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경기장에 방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은 타석이 아닌 마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날 프레이저는 타석에서 헛스윙을 연발하며 2차례 삼진으로 물러났다. 프레이저를 상대로 한 번은 패스트볼, 다른 한 번은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아낸 켈러를 보면서 루이스는 속으로 “저 녀석은 무조건 데리고 와야 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구단을 향한 설득의 시간이 시작됐고 루이스의 끈질긴 설득 끝에 애리조나는 2013년 드래프트 8라운드에서 켈러를 지명했다. 물론 애리조나와 켈러의 인연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싱글A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시즌을 마쳤던 켈러는 이듬해 하이A에서 135이닝 4.47의 ERA를 기록하며 부침을 겪었다. 더블A에서는 약점으로 지목됐던 제구가 또다시 흔들리면서 더 불안한 시즌을 보냈다(9이닝당 볼넷 1.93개 → 3.93개). 그러자 애리조나 내에서 켈러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켈러는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했고 룰5 드래프트에 나오게 되었다. 이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2013년 드래프트가 시작되기 앞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가지고 있는 가장 높은 순위의 픽에서 계약금을 아끼고 순번이 미끄러진 유망주에게 많은 돈을 쥐여주는 오버픽 & 언더슬롯 전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열스는 그해 가장 높은 지명권을 대졸 내야수인 헌터 도저를 지명하는 데 사용했고 도저는 슬롯머니(313만7800달러)보다 낮은 금액(220만달러)에 계약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번(34순위)인 션 머나야에겐 슬롯머니에 2배가 넘는 금액을 쐈다(355만달러). 2라운드에서도 코디 리드를 지명하며 슬롯머니를 꽉꽉 채웠던 로열스였기에 정해진 보너스풀을 맞추기 위해선 남은 하위 라운드에서 계약금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빠르면 6라운드에 지명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던 켈러는 사전에 계획했던 것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홈구장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에서 따로 트라이아웃을 진행했을 정도로 켈러에게 큰 관심을 보였던 로열스였지만 그해 핵심은 결국 상위라운드 지명이었기 때문에 켈러 향한 마음을 고이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로열스와 켈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앞서 말한 두 번째 기회가 로열스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켈러는 마이너리그에서 타자들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지속적으로 한계점을 드러냈고 탈삼진에 있어서도 다이나믹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로열스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3가지 이유를 근거로 들어 켈러를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이자 매력적인 투수라고 판단했다. 첫 번째 이유는 마이너리그 통산 9이닝당 홈런이 0.5개에 불과할 정도로 켈러의 홈런 억제력이 뛰어나다는 점에 있었다. 두 번째 이유로 로열스는 3년 연속으로 130이닝 이상을 소화한 켈러의 이닝 소화력을 꼽았고, 마지막으로 시즌 막판(2017년)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3~94마일로 크게 오르며 수확한 호성적(24.2이닝 3실점 24K)에 초점을 맞췄다. 로열스의 눈은 정확했다.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맞이한 메이저리그 데뷔시즌에서 켈러는 5월 26일(현지시간)까지 불펜으로 나와 로열스의 새로운 성공작으로 자리매김했다(22.1이닝 2.01). 그리고 대니 더피, 네이트 칸스와 같은 기존 선발 자원이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선발투수로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한 켈러는 본인의 강점인 이닝이터로서의 면모와 장타 억제를 십분 발휘하며 또 한 번의 성공을 맛봤다(20경기 출전 118이닝 3.28).

 

좌절과 성장을 반복하다

잇따른 성공으로 켈러를 향한 로열스의 신뢰는 더욱더 두터워져갔고 그들은 켈러가 팀의 중심을 잡아주길 바랐다. 이에 로열스는 2019년 개막전 선발투수로 켈러를 내세웠다. 앞서 언급했듯 켈러는 홈 개막전이라는 중압감을 이겨내고 7이닝 무실점 5K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타선을 잠재웠다. 하지만 팀의 1선발이라는 자리가 갖는 무게감이 너무 컸던 걸까? 개막전 이후 9경기에서 켈러는 총 30점을 내주며(51이닝 소화) 최악의 한 달을 보냈다. 원인은 심각하게 요동쳤던 패스트볼 제구였다.

4월 2일부터 5월 17일(현지시간)까지 켈러가 내준 볼넷은 총 36개였다. 이 중에서 29개가 패스트볼이었을 정도로 켈러는 패스트볼 제구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제때 잡지 못하다 보니, 상대 타자들은 매번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고 켈러의 공을 아주 손쉽게 쳐냈다(피안타율 .323, 피장타율 .677). 매일같이 자신의 경기를 돌아봤던 켈러는 본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매 등판의 최대 주안점을 제구에 두며 마운드에 오른 켈러는 점차 패스트볼 제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열스가 원래 알고 있던 켈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켈러의 구간별 스탯변화(2019년)

하지만 8월 26일(현지 시간)에 있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켈러는 팔 피로 증상을 보이면서(패스트볼 평균 구속 93.7마일 → 92.4마일) 1.1이닝 만에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켈러의 첫 번째 선발 풀타임 시즌을 끝이 났고(165.1이닝 4.19), 켈러는 시즌 시작 전 세웠던 ‘200이닝 달성’이라는 목표를 잠시 접어둬야 했다.

자신이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망쳤다는 점에서 분함을 느꼈던 켈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우선, 휴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켈러는 데뷔 시즌부터 매년 140이닝 이상을 소화하면서 과부하가 걸렸을 어깨와 팔에 최대한의 휴식을 보장해주며 컨디션 관리에 나섰다. 그리고 풀 카운트 베이스볼(Full Count Baseball)이라는 별도의 훈련시설을 방문해 최첨단 장비들을 활용하며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하나하나 점검해나갔다.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맞이한 2020년 스프링 트레이닝, 켈러는 첫 등판부터 피홈런을 내줬고 다소 찝찝한 스타트를 끊었다(1이닝 2실점). 다음 등판에서는 쓰리런 홈런을 포함, 7개의 피안타를 허용하며 더 크게 무너졌다(1.2이닝 8실점). 코로나-19의 여파로 스프링 트레이닝이 중단되기 직전에 4이닝 1실점으로 반등에 성공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켈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제구, 특히 슬라이더가 전혀 컨트롤되지 않고 있음을 느꼈던 켈러는 우연치 않게 생긴 휴식기간 동안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먼저 원인 분석에 나섰던 켈러는 코칭스태프의 도움으로 자신의 투구 메카닉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

데뷔 시절부터 켈러는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기 시작할 때 프런트 사이드, 다시 말해서 왼쪽 어깨가 위로 올라가고 반대로 오른쪽 어깨(백 사이드)는 내려가는, 굉장히 불균형한 투구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왼쪽 어깨가 올라가면서 켈러의 시야를 방해했고 이는 그간 켈러 본인이 원하는 위치에 공을 던지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원인을 파악한 켈러는 이를 고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초고속 카메라로 영상을 찍어 자신의 투구 자세가 평평하게 유지되고 있는지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켈러는 이전보다 훨씬 균형 잡힌 자세로 공을 뿌릴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단축 시즌에서의 놀라운 퍼포먼스로 이어졌다(54.2이닝 2.47).

플레이트로 들어오는 공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시프트 또한 정교해지면서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인플레이 타구가 아닌 큰 거 한방으로 포인트를 옮겼다. 이에 대응하고자 투수들은 탈삼진에 초점을 맞춰서 삼진을 ‘위한’ 피칭을 펼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난해 켈러가 리그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삼진 비율(16.3%)을 가지고 만들어낸 리그 정상급의 홈런 억제력과 배럴 타구 억제력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 켈러를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브래드 켈러와 리그 평균 스탯 비교

*배럴 타구란, 타구 속도와 발사각도를 고려하여 최소 .500의 타율과 1.500의 장타율을 기대해볼 수 있는 타구들을 말한다. 이때 타구 속도는 98마일 이상이어야 하며 발사각도는 26°~30°가 되어야 한다.

기존의 시스템을 뒤엎고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리빌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유망주들의 성장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구심점을 잡아줄 수 있는 선수의 유무이며, 매끄럽게 이어주는 윤활유 같은 존재가 팀에 없다면 리빌딩의 끝이 마냥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공적인 리빌딩 과정을 거치면서 월드시리즈 준우승과 우승을 연달아 차지한 캔자스시티 로열스는 연결고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남다른 친화력과 성실함을 가졌던 켈러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다리이자 팀의 리더로 삼았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까지만 해도 무관심 속에서 공을 던졌던 투수는 어느새 선발 로테이션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최후방에 서서 젊은 유망주들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팬들의 함성과 함께 시작된 켈러의 2021시즌은 스타트가 좋지 못했다(1.1이닝 6실점). 그러나 새로운 시즌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치러야 할 경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앞으로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1선발이자 에이스 투수의 반열에 들어설지도 모르는 브래드 켈러를 유심히 지켜보자.

 

참고=The Athletic, Fangraphs, Baseball-Reference, Baseball Savant, The Kansas City Star, Baseball America

야구공작소 이한규 칼럼니스트

에디터=야구공작소 권승환,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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