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1999년 10월 20일,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7차전은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이날 삼성에서는 4개, 롯데에서는 3개의 홈런이 나오며 양 팀은 홈런으로만 11점 중 9점을 내는 극한의 대포 싸움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9회 초 롯데의 공격에서 대타로 출전한 어느 우타자가 ‘창용불패’ 임창용의 뱀직구를 받아쳐 오른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홈런을 기록한 장면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 홈런으로 아웃카운트 2개를 남겨놓고 동점을 만든 롯데는 11회 승부 끝에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이 타자는 이미 이전에도 큰 경기에서는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5년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야생마’ 이상훈에게 2점 홈런을 뽑아내며 승리를 향한 디딤돌을 마련했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도 6차전 연장 10회에 결승 희생플라이를 날리며 팀을 우승 문턱까지 끌고 갔다. (물론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타격보다는 수비를 우선시한다는 포수 포지션에서도 두 자릿수 홈런과 3할 타율을 기록하며 ‘공격형 포수’로 자리매김한 선수, 바로 임수혁이었다.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상무 야구단을 거쳐 1994년 롯데에 입단한 임수혁은 2년 차 시즌인 1995년 15홈런을 기록,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개인 최다인 113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1 11홈런 76타점 OPS 0.843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이후 잔부상이 겹쳤고 OB 베어스에서 이적한 최기문의 존재로 인해 1999년에는 백업 요원으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임수혁은 필요한 순간 대타로 나와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임수혁의 프로 488번째 경기이자 통산 마지막 경기는, 다시는 KBO 리그에서는 나오지 말아야 할 경기가 되고 말았다.
2000시즌 초반 9경기에서 포수와 지명타자를 오가며 출전했던 임수혁은 18타석에서 홈런 3방을 터트리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비록 최기문이나 강성우보다 수비는 떨어질지 몰라도 뛰어난 타격, 그리고 투수를 편안하게 해주는 리드는 임수혁을 빛나게 만들었다. 4월 11일과 12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경기 연속 스리런 홈런을 때려내며 초반 1승 4패로 시작했던 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당시 언론에서도 ‘물오른 임수혁’이라는 표현을 쓰며 초반 활약을 조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4월 18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임수혁은 5번 지명타자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전까지 주로 하위타선에 배치됐던 임수혁은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며 타순을 끌어올린 것이다. 롯데는 에밀리아노 기론을 선발투수로 내세웠고, LG는 백전노장 김용수를 선발투수로 투입했다. 경기는 아무런 문제 없이 시작됐다. 2회 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롯데는 1회 초 1번 김응국이 안타로 나가며 만든 찬스에서 4번 마해영이 적시타를 때려내며 먼저 한 점을 냈다. 다음 타자 임수혁이 볼넷을 골라 나가며 찬스를 이어나갔지만 롯데는 후속타 불발로 추가 득점에는 실패했다. 반격에 나선 LG는 2번 타자 김재현이 시즌 3호 솔로홈런을 기록하며 곧바로 동점을 만들었다. 기론 역시 한 점을 주기는 했지만 LG 타선을 막아내며 리드를 내주지는 않았다. 경기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2회 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2회 초, 롯데는 1사 1, 2루 찬스에서 김대익의 우익 선상 3루타가 나오며 다시 리드를 잡았다. 여기에 선취점의 주인공이 마해영도 2루타를 보태며 롯데는 스코어 4대 1을 만들었고, 여전히 주자 2루의 득점 기회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임수혁은 3-유간 깊은 타구를 날렸다. 유격수 류지현이 타구를 끊고 재빨리 송구했지만 1루수 서용빈이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 임수혁은 1루에 살아나갔고, 마해영이 홈을 밟으며 롯데는 4점 차로 달아났다. 어렵게 출루한 임수혁은 다음 타자 테드 우드의 우전 안타로 2루로 진루했다.
1, 2루 상황에서 타석에는 조성환이 들어섰다. 그런데 2루를 밟고 있던 임수혁이 갑자기 베이스에서 멀어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임수혁은 거친 숨만 내쉬었다. 1루 주자 우드와 최정우 1루 코치가 다급하게 2루로 뛰어갔고, 곧이어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야구장에는 앰뷸런스나 제대로 된 의료장비가 없었다. 이 때문에 선수들과 경호원이 임수혁을 들것에 실어 그라운드에서 나가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훗날 밝혀졌지만 이는 이른바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임수혁은 곧바로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으로 이송됐고, 임수혁이 떠난 자리에는 대주자 조경환이 투입됐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경기는 재개됐고, 교체 투입된 조경환이 4회 홈런을 기록하며 한 점을 더 달아난 롯데가 선발 기론의 8이닝 호투까지 더해지며 6대 2로 승리했다. 그러나 양 팀 모두에게 경기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병원으로 이송된 임수혁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했다. 평소 부정맥을 앓아왔던 임수혁은 철저한 관리로 현역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부정맥 증상이 일어나며 심장마비가 왔고, 누구도 임수혁의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심폐소생술 등 필요한 조처를 하지 못했다. 결국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고, 임수혁의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이었다.
임수혁이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롯데 선수들은 모자에 임수혁의 등번호인 20번을 달고 뛰었고, 롯데뿐만 아니라 타 팀 선수과 타 종목 선수들 역시 성금을 모금해 ‘임수혁 돕기’에 나섰다. 롯데 구단은 이듬해 4월 18일을 ‘임수혁의 날’로 지정해 이날 모인 4천여만 원을 임수혁의 가족에게 지원했다. 2002년에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에서 행사를 마련해 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위해 박찬호, 랜디 존슨, 골프선수 최경주 등 여러 선수들이 자신의 애장품을 흔쾌히 내놓았다. 2002년 롯데 구단 측에서 임수혁의 가족에게 치료비 지원이 어렵다는 뜻을 밝히자 롯데 선수단 상조회는 2002년 말부터 임수혁의 아들이 대학교에 진학한 2013년까지 임수혁 돕기 일일 고깃집 행사를 열며 동료를 돕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이렇듯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임수혁의 쾌유를 빌었지만 임수혁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뇌사판정을 받았던 임수혁은 아버지와 아내, 아이들의 병간호 속에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모든 야구팬들은 임수혁이 다시 일어나 마지막 경기에서 밟지 못했던 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응원이 들린 것인지 임수혁은 의료진의 예상보다도 오래 견뎌내며 모두를 눈물짓게 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염원을 뒤로 하고 임수혁은 2010년 2월 7일, 투병 9년 10개월 만에 끝내 눈을 감았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임수혁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결코 적지 않다. KBO는 임수혁의 사고가 일어난 뒤 곧바로 선수 및 지도자 상해보험규정을 상향 조정했고, 2003년부터는 전 구장에 의료진과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응급조치의 중요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2011년 K리그에서는 임수혁과 같이 부정맥으로 쓰러졌던 신영록(당시 제주 유나이티드)이 선수들과 의료진의 재빠른 조치 덕분에 의식을 되찾기도 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법은 안전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롯데와 LG 구단이 임수혁에게 3억 3천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리며 경기장 내 선수의 사고 때 구단의 책임을 명시했다.
2000년 당시 임수혁의 룸메이트이자 그가 쓰러졌을 때 타석에 들어섰던 조성환 현 한화 이글스 코치는 올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야구를 하고 있는 후배들은 모두 수혁이 형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며 임수혁이 점점 잊혀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조성환의 말처럼 KBO 리그, 아니 모든 프로스포츠 선수들은 임수혁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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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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