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92년 – 그때 거인은 호랑이도 무섭지 않았다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롯데 자이언츠에 있어서 1992년은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물론 2021년 현재 롯데 전력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딕슨 마차도, 앤더슨 프랑코, 오윤석, 강로한, 김재유 등이 태어난 시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롯데리아에서 새우버거와 함께 원투펀치를 형성하고 있는 불고기버거가 출시한 해이기 때문인 건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팬들이 1992년을 그리워하고, 혹은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일까.

1991년 뜻밖의 돌풍 속에 7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한 롯데에 대해 당시 전문가들은 1992년에도 4강에 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는 그저 전 시즌에 4위를 했던 전력에서 큰 이탈이 없었기 때문이어서 그렇게 예상한 것이지, 롯데에 특별한 매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해태 타이거즈와 빙그레 이글스가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가운데, 롯데는 그저 두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가는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적군1’ 정도의 엑스트라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였다.

시즌이 시작되고 롯데는 4월 11승 11패, 5월 13승 13패로 승패 마진 ‘0’을 유지하면서 3~4위권에 위치했다. 1991년처럼 5할 전후의 승률로 버티면서 4위 싸움을 펼칠 것으로 보였던 롯데는 그러나 날이 더워지고 6월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타선에서는 전준호-이종운-박정태-김민호-김응국으로 이뤄진 ‘남두오성’으로 대표되는 소총부대가 상대 마운드를 무력화시켰다. 또한 마운드에서는 확실히 뒷문을 책임질 선수가 없다는 약점 속에서도 윤학길-염종석의 17승 듀오가 선봉에 나섰고, 윤형배, 박동희, 김상현 등의 선수들도 뒤를 받치면서 타자들이 낸 점수를 지켜냈다.

6월 시작과 함께 9연승*을 질주한 롯데는 6월 3일 3위 자리를 재탈환한 이후 시즌 끝까지 이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즌 막판까지 해태와 꾸준히 2위 싸움을 펼친 롯데는 결국 71승 55패(승률 0.563)를 거두며 0.5경기 차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이때 기록한 9연승은 2008년 11연승을 할 때까지 팀 내 최다 연승 기록으로 남았다.

1992년 포스트시즌 당시 <주간야구> 표지(사진=양철종)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리턴 매치를 펼친 롯데는 1, 2차전 선발투수였던 염종석과 박동희가 나란히 완봉승을 거두면서 전년도의 석패를 완벽히 복수했다. 2경기에서 투수를 단 두 명만 기용한 롯데는 에이스 윤학길을 아낀 채로 88올림픽고속도로(현 광주대구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장소를 옮겼다.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바로 2위 팀 해태였다.

두 팀은 4차전까지 계속 승패를 주고받았다. 광주에서 1승 1패를 기록한 롯데는 사직으로 무대를 옮긴 3차전에서 해태 타선에 무려 17안타를 허용하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대로 탈락할 것만 같던 롯데는 4차전에서 ‘슈퍼 루키’ 염종석이 6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면서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광주에서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유인물이 뿌려지고, 부산에서는 관중들이 쓰레기를 던지고 폭죽을 터트리는 등 시리즈는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두 팀의 분위기가 발화점까지 오른 상태에서 시리즈는 최종전인 5차전까지 흘러갔다.

잠실 중립 경기로 진행된 5차전에서 해태는 가을만 되면 강해지던 ‘꽃돼지’ 문희수를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문희수는 첫 타자 전준호를 유격수 실책으로, 3번 김응국을 볼넷으로 내보내며 위기를 맞이했다. 이어 4번 김민호에게 우중월 3점포를 내주면서 선취점을 내줬다. (상단 사진) 해태는 기다렸다는 듯 18승 투수 이강철을 마운드에 올리며 더 이상의 실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해태 타선도 이에 응답하며 1회 말 홍현우의 1타점 적시타, 3회 말 박철우의 2타점 2루타로 3대 3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경기는 8회까지 접전으로 흘러갔다. 롯데는 5회 초 이종운의 적시타로 재역전에 성공한 데 이어 6회 초에는 박계원의 3루타와 김선일의 적시타로 2점 차로 달아났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은 해태는 6회 말 롯데 선발 윤학길의 폭투를 틈타 한 점을 따라가며 스코어는 5대 4가 됐다. 그러나 해태는 7회 말 선두타자 이순철의 안타성 타구가 3루수 공필성의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에 잡히는 등 좀처럼 역전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해태는 ‘까치’ 김정수가 8회까지 2.1이닝을 실점 없이 잘 막았고, 롯데 역시 4차전 완봉승 후 하루만 쉬고 나온 염종석이 7회부터 마운드에 올라 리드를 지켜내고 있었다.

운명의 9회 초, 롯데 선두타자 김응국이 중견수 이순철의 머리 위로 향하는 커다란 3루타를 터트렸다. 김민호의 몸에 맞는 볼로 만든 무사 1, 3루에서 박정태가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려내며 롯데는 다시 두 점 차로 달아났다. 당시 중계를 맡고 있던 KBS 정도영 캐스터는 “김정수 선수가 마지막 순간에 무너집니다”라는 멘트를 남겼다. 하지만 이는 그저 9회 초에 몰아칠 폭풍의 전조에 불과했다.

1992년까지 롯데를 상대로 14연승을 거두며 저승사자로 자리매김한 선동열이 어깨 건초염으로 등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태는 송유석을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롯데는 이종운의 번트 타구 때 투수 송구 실책으로 한 점을 더 냈고(7:4) 이어진 만루 상황에서 박계원의 희생플라이까지 나오며 더블 스코어(8:4)를 만들었다. 탄탄한 내야진을 자랑하던 해태는 김선일의 3루 쪽 땅볼을 3루수 한대화가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하며 1루 주자만을 잡는 데 그쳤고(9:4), 이어 2사 1, 3루에서 김선일과 공필성의 더블 스틸을 막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다. 해태와 영혼이 뒤바뀐 듯한 모습을 보인 롯데는 9회 초에만 5점을 뽑으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분위기는 롯데 쪽으로 넘어왔다. 9회 말 염종석은 선두타자 이순철에게 안타를 허용하기는 했으나 3번 홍현우를 병살타로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감했다. 10대 4. 롯데는 ‘거함’ 해태를 꺾고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정규시즌 해태를 상대로 7승 11패로 다소 밀렸던 롯데였지만 가을야구에서는 달랐다. 1진급 투수들을 총 투입할 수 있는 포스트시즌에서 롯데는 염종석을 아낌없이 투입하며 해태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18경기 동안 5승을 거두는 데 그쳤던 빙그레를 상대로 5경기 만에 4승을 챙기면서 8년 만에 프로야구 최정상에 올랐다. 김성근(삼성), 김응용(해태), 김영덕(빙그레) 등 당대 명장들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은 강병철 감독, 그리고 투혼을 펼친 투수들과 필요한 점수는 꼬박꼬박 챙겨줬던 타선의 조화가 결국 거인의 리그 제패를 이뤄냈다.

PS. 완봉승 후 단 하루를 쉬고 플레이오프 5차전에 등판한 염종석은 이미 정규시즌에서도 204.2이닝을 던진 선수였다. 만 19세의 나이에 과도한 짐을 떠안은 염종석은 결국 5차전 8회 들어 팔꿈치 이상을 느꼈다. 한국시리즈 4차전 선발 등판에서도 팔꿈치 상태가 좋지 않아 고전했던 염종석은 결국 다시는 1992년 같은 시즌을 만들지 못했다. 염종석은 훗날 팟캐스트 ‘야자수’와의 인터뷰에서 “뒤돌아보면 그 한 시즌만을 위해 정해졌던 것 같다”라며 1992시즌을 회상했다.

1992년 플레이오프 5차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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