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91년 – 비오던 그해 가을은 뜨거웠네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1984년 가을에 써 내려간 최동원 주연의 최루성 드라마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1985년 종합 2위를 거두며 아쉽게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친 이후 롯데는 플레이오프 직행권을 획득하는 것조차 쉽게 하지 못했다. 1987년과 1988년 두 시즌 모두 5할 이상의 5할 이상의 승률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롯데는 1989년 최하위, 1990년 꼴찌 바로 앞자리에 머물며 암흑기를 이어갔다.

그러자 롯데는 1986년 ‘까자값 사건’으로 팀과 이별하며 “앞으로 부산 쪽으로는 소변도 누지 않겠다”라며 이를 갈았던 ‘우승감독’ 강병철 전 감독을 4년 만에 다시 데려오는 초강수를 뒀다. 강 감독은 부임 한 달 만에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에서 숨겨두었던 경성대 투수 김태석을 ‘스틸픽’으로 지명하는 등 팀 재건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노력에도 4월 한 달 동안 8승 12패로 다소 부진했던 롯데는 5월 말 8연승을 거두며 드디어 중위권으로 올라오게 된다. 이후 롯데는 꾸준히 5할 언저리의 승률을 기록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베테랑 장효조와 김민호, 윤학길 등이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신진급이었던 박동희, 김응국, 박정태, 전준호 등의 잠재력이 만개하면서 활력 넘치는 야구를 보여줬다.

1위 해태 타이거즈가 멀찍이 치고 나가고 빙그레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2위 경쟁을 진행하는 상황 속에 5위 아래 팀들도 점점 아래로 떨어지자 롯데는 경쟁자 없는 4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롯데는 9월 9일 대구 삼성전에서 선발 김시진의 9이닝 3실점 호투 속에 5대 4로 승리하며 7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했다. 2년 동안 조용했던 롯데 팬들도 이에 반응하며 9월 15일 KBO 역사상 최초로 홈 관중 100만 명을 달성하기도 했다.

약 2주 동안 숨고르기에 나선 롯데는 9월 22일부터 삼성과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진행했다.

1차전과 2차전 1승씩을 주고받은 롯데는 대구에서 열리는 3차전에서 승부를 가리게 됐다. 롯데는 고졸 신인으로 그해 11승을 거뒀던 김태형을, 삼성은 데뷔 시즌부터 ‘롯데킬러’의 명성을 쌓았던 베테랑 투수 성준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경기 전부터 세간에서는 이 투수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준이 1회 초부터 4번 김민호에게 중월 2점 홈런을 내준 후 5번 장효조에게도 안타를 허용하자 삼성 벤치가 움직였다. 성준을 돕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1차전에서 구원 등판, 5.1이닝을 던진 재일교포 잠수함 김성길이었다. 올라오자마자 6번 박정태를 잘 잡아낸 김성길은 이후 롯데 타자들을 ‘추풍낙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사이 삼성은 1회 말 선두타자 류중일이 준플레이오프 최초로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면서 한 점을 따라갔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우산을 쓰고 경기를 지켜보던 삼성 팬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3회 말, 선두타자 김종갑의 안타와 희생번트로 삼성은 1사 3루 절호의 찬스를 맞이했다. 그러자 롯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첫 타석 대포를 가동했던 류중일 타석에서 롯데는 1차전 선발이었던 ‘슈퍼베이비’ 박동희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을까. 3볼 2스트라이크 풀카운트 승부에서 박동희의 투구는 그대로 오른손에 머물러 있었다. 투수 보크. 3루 주자 김종갑이 홈을 밟으면서 삼성은 동점을 만들었다. 롯데로서는 어이없기 그지없는 실점이었다.

6회 말, 허규옥의 직선타를 유격수 공필성이 잡았다 떨어뜨린 것이 아웃이 아니라고 심판진이 판정한 것에 강병철 감독 등 롯데 코칭스태프가 나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흔들린 박동희는 다음 타자 신경식에게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2루타를 맞으면서 결국 역전 점수를 내주고 말았다.

1회 초 2사 후 올라와 한 점도 주지 않았던 김성길은 이대로 가면 승리투수가 되면서 대전행 티켓을 발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큰 경기에서 삼성을 항상 괴롭혔던 롯데는 쉽게 경기를 내주지 않았다. 8회 초 선두타자 유두열 대신 타석에 나선 좌타자 조성옥은 김성길의 몸쪽 슬라이더를 노려쳤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타구는 우측 폴대 근처 관중 관중석에 떨어졌다. 준플레이오프 탈락까지 아웃카운트 6개가 남은 상황에서 조성옥이 동점 홈런을 때려낸 것이었다. 이 홈런으로 스코어는 3대 3이 됐다.

줄 점수를 다 줬다고 생각했는지 박동희와 김성길, 두 투수는 9회부터 완벽한 투수전을 펼쳤다. 35세의 노장 김성길이 관록으로 버티고 있었다면, 23세의 패기 넘치던 박동희는 정면승부로 상대 타선을 압도하는 모양새였다.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두 투수는 10회에도, 11회에도, 12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어느덧 전광판의 시계는 당시 시간제한 규정에 해당하는 오후 10시 30분을 알리고 있었다.

두 팀의 마지막 기회였던 13회, 먼저 공격에 나선 롯데는 득점 없이 이닝을 마감하며 (몰수게임이 아니고서는) ‘승리’라는 경우의 수가 사라졌다. 이어 13회 말 삼성은 2사 후 류중일의 안타로 마지막 불씨를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다음 타자 허규옥의 타구가 2루수 앞으로 굴러가는 땅볼이 되면서 양 팀은 끝내 승패를 나눠 갖지 못했다.

최종 스코어 3대 3으로 끝난 이날 경기에서 삼성의 김성길은 12.1이닝 동안 무려 181구의 공을 던졌다. 김성길은 물오른 롯데 타선을 상대로 9안타 4볼넷을 내주며 고전했지만 조성옥의 홈런을 제외하면 한 점도 내주지 않는 뛰어난 투구를 선보였다. 롯데의 두 번째 투수 박동희 역시 10.2이닝을 소화하며 무려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괴력의 투구를 선보였다. 빠른 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컨트롤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박동희였지만 이날만큼은 단 하나의 4사구도 내주지 않으면서 커리어 최고의 투구를 보여줬다.
이날 박동희가 기록한 15탈삼진은 2020년까지 KBO 리그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재경기를 치렀다. 이날 롯데는 친정 팀을 상대로 등판에 나선 선발 김시진이 4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가는 등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에이스 윤학길이 구원 등판한 가운데 롯데는 과거의 전우 김용철의 6회 역전 투런을 시작으로 분위기를 조금씩 넘겨주기 시작했다. 결국 롯데는 8회 말 대거 7실점으로 무너지며 7년 만의 가을 나들이를 4일 만에 마감해야 했다.

1991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사진=2007년 홈 개막전에서 박동희를 추모하는 롯데 선수단(제공=롯데 자이언츠)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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