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오연우] 야구는 시간이 아니라 이닝을 기준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아무도 ”경기 시작 3분 만에 이만수 선수의 홈런이 터졌습니다.”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경기 시간 문제로 가끔씩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야구에서 시간은 비주류다.
지난 5일, KBS에서는 ‘프로야구의 흥미, 3시간 벽을 깨자’라는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롯데가 유일하게 10개 구단 중 ‘최고 성적’을 거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평균 경기 시간. 롯데의 지난 시즌 평균 경기 시간은 3시간 13분으로 10개 구단 중 가장 오랜 시간 경기를 치른 팀으로 기록됐다.
롯데 팬들은 자신의 팀이 꼴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고통스럽게도 가장 오랜 시간 지켜 봐야만 했다.”
물론 지난해 롯데 팬들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응원팀의 ‘허우적거림’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롯데 팬들에게도 즐거운 리드의 시간은 있었다. 다른 팀보다 조금 짧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각 팀이 리드한/당한 시간을 측정해 보면 어떨까? 어떤 팀이 오래 리드해 긴 기쁨을 주었고, 어떤 팀이 오래 리드 당해 긴 스트레스를 주었을까?
누가 오래 리드했을까?
먼저 지난해 경기 데이터를 이용해 1년 동안 각 팀이 리드한 시간(우세), 동점이었던 시간, 리드 당한 시간(열세)을 투구 단위로 측정했다. 투구의 결과로 리드 상황이 변경되면 그 다음 투구부터 변경된 상황을 적용했다. 가령 동점 상황에서 홈런을 쳐 리드를 잡으면, 홈런의 다음 투구가 던져진 순간부터 ‘누적 리드 시간’에 가산되는 식이다. 이렇게 1년치 경기의 수치를 누적해 얻은 결과를 1년 총 경기 시간에 대한 비율로 나타냈다.
예상대로 잘하는 팀이 잘했고 못하는 팀이 못했다. 두산이 총 경기 시간 중 45%를 리드하며 1위를 차지했고 롯데는 10개 팀 중 홀로 30%도 리드하지 못했다. 열세 시간에 대한 우세 시간의 비율로 보아도 삼성과 KT의 순서가 바뀐 것 외에는 차이가 없었다. 이제 각 팀의 우세/동점/열세 비율을 KBO에서 발표한 팀별 평균 경기시간에 곱하면 각 팀 팬들이 한 경기당 몇 분이나 즐거웠는지, 또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지난해 두산 팬들은 하루 평균 87분 즐거웠고 58분 스트레스를 받았다. 반면 롯데 팬들은 두산 팬들보다 즐거운 시간은 30분 짧고 괴로운 시간은 31분 길었다. 롯데 팬들은, ‘자신의 팀이 꼴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고통스럽게도 가장 오랜 시간 지켜 봐야만 했다’.
아래 그래프는 팀별로 리드한 시간에서 리드 당한 시간을 뺀 것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각 팀의 ‘순행복시간’이 될 것이다.
몇 가지 경기들
아래는 3월 28일에 펼쳐진 삼성-롯데의 사직 경기의 스코어보드다.
난타전이었다. 롯데 선발은 윤성빈이었지만 1회 초 처음 네 타자에게 볼넷 3개, 폭투 1개를 허용하고 0.1이닝 만에 강판됐다. 뒤이어 등판한 송승준이 강민호에게 3점홈런을 맞으며 실점은 4점으로 불어난다. 삼성은 1회를 시작으로 홀수 회마다 추가점수를 얻었고, 롯데도 추격했지만 역전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최종 점수는 12-7, 삼성의 낙승이었다.
이 경기를 소개한 이유는? 윤성빈의 2019년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기도 했지만, 이 경기가 지난해 모든 경기 중 특정 팀의 리드가 가장 길었던 경기이기 때문이다. 스코어보드를 잘 살펴보면 리드가 길어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1회 초부터 리드를 잡아 경기 끝까지 리드를 유지했고, 양 팀 합쳐 19점이 나온 다득점 경기였다. 원정팀이 리드해 경기가 9회 말까지 진행되었고 롯데는 9회 말에도 점수를 내며 삼성의 리드 시간을 늘려 주었다. 그 결과 삼성 팬들은 이 한 경기에서만 무려 4시간 3분의 리드를 즐길 수 있었다.
표는 지난해 어느 한 팀의 리드 시간이 길었던 상위 10개 경기다. 대부분 원정팀이 리드한 경우인데, 홈팀은 리드를 잡기 위해 1회 말까지 기다려야 하고 홈팀이 리드하면 9회 말이 사라지므로 당연한 일이다. 가장 아래의 9월 3일 NC 대 SK 경기는 우천으로 경기가 40분 이상 지연된 덕을 봤다. ‘우천지연 없는 홈팀 리드’는 5월 21일 롯데-KIA전의 3시간 22분이 가장 길다.
5월 7일 LG-키움 경기는 어떤 경기였을까?
한눈에 보기에도 ‘대첩’이었다. 1회 초 LG가 선취점을 냈지만 곧바로 키움이 타자일순하며 1-5로 역전했다. 이후 LG가 착실히 따라갔지만 키움도 도망가며 리드를 뺏기지 않았다.
하지만 9-10으로 앞선 8회 초 2아웃에서 조상우가 4아웃 세이브를 위해 등판한 것이 패착이 됐다. 8회는 무사히 넘겼지만 9회 선두타자 이형종에게 안타를 허용했고, 대주자 신민재는 폭투로 2루, 희생번트로 3루, 내야땅볼로 홈인해 동점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다시 3연속 안타가 터지며 LG는 기어코 역전에 성공했고, 이영준이 등판해 불을 껐지만 이미 경기는 넘어간 뒤였다. LG는 9회 말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대역전승을 마무리했다.
이 경기는 지난해 ‘가장 오래 리드 당하고 승리한’ 경기다. 지난 2015년 제1회 프리미어 12 결승전에서 안경현 해설위원은 “야구는 오래 이기고 있을 필요 없어요. 마지막에만 이기면 돼요”, 속칭 ‘야오이마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실제로 프리미어 12 결승전에서 한국은 8회까지 뒤지고 있다가 9회에 역전해 이 말의 의미를 잘 보여주었다.
이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원정팀 LG가 1회 말 2아웃부터 9회 초 1아웃까지 무려 3시간 10분을 리드당한 뒤 9회 초에 역전해 승리했다. LG가 리드한 시간은 1회와 9회를 합해 31분이었고, 9회로 한정하면 고작 12분에 불과했다. ‘야오이마이’의 정석과 같은 경기였다.
마지막으로 아래 8월 7일 삼성-NC 경기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경기는 양팀 동점인 시간이 가장 길었던 경기다. 4회 초 김상수의 땅볼로 3루주자 김동엽이 홈인하며 (아주)잠시 균형이 깨졌다. 하지만 다음 타자 박해민이 5구 만에 아웃되며 이닝이 종료됐고, 4회 말 선두타자 박석민은 4구째 홈런을 치며 동점을 만들었다. 5분 21초 사이의 일이었고, 12회 말 정범모의 끝내기 홈런이 나오기까지는 7번의 무득점 공방 속에 2시간 57분이 더 지나야 했다.
야구 분석과 시간
야구 분석에서 아직까지 시간이라는 영역은 미개척지에 가깝다. 현재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각 투구가 이루어진 시각 정도지만, 이것만으로도 많은 새로운 분석을 해 볼 수 있다.
투구 템포라는 소재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선발과 구원 사이에 투구 템포 차이가 있을까? 투구수와 투구 템포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요도가 높은 상황에서는 템포가 더 느려질까? 카운트에 따라서는 어떨까? 시즌이 지나서 체력이 떨어지면 템포에도 영향이 있을까?
간접 측정이 되겠지만 경기 진행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안타, 땅볼, 뜬공 등 여러 타격 결과가 완료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공수 교대 시간이 유독 긴 팀이 있는지, 어떤 타자가 유독 늦게 타석에 들어서고 늦게 퇴장하는지 같은 요인들도 살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야구에서 시간을 주제로 한 분석이 적었던 것은 단순히 야구가 시간 기준의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트래킹 장비가 도입되기 전에는 시간과 관련된 무언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끈기가 필요했다. 끈기를 넘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한 야구 커뮤니티에 ‘5초에 대한 연구’라는 글이 게시된 적이 있다. 요즘 프로야구 경기시간이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를 연구한 글이었다. 작성자는 야구 경기 시간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는지 조사하기 위해 경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투구시간, 타자등장시간, 수비시간, 대화시간, …)을 스톱워치로 체크하며 수작업으로 기록해야 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2016년에 나온 ‘도랑치고 가재잡고, KBO리그 최고의 키스톤 콤비는’이라는 글도 있다. 이 글에서는 2015년 각 팀 키스톤 콤비의 병살 타구 처리 속도를 소개하는데, (당연히)모두 직접 영상을 확인해 스톱워치로 측정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 글이나 지난 12월에 발행된 투구 간격에 관한 글은 몇 년 전이었다면 감히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글이다. 용기 있었던 많은 선배님들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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