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날을 맞아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캠 베드로시안
(사진=Flickr Dinur, CC BY-NC-ND 2.0)
[야구공작소 이재현] 1970년대 미국은 치솟는 범죄율 때문에 한참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때 생태사회학자인 알렉산더 G. 샤우스 박사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아 사회적으로 큰 이목을 끌었다. 바로 ‘분홍색이 사람의 공격성을 낮춘다.’는 것이었다.
베이커 밀러 핑크
샤우스 박사는 젊은 남성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쪽은 분홍색, 나머지 한 쪽은 파란색을 주시하도록 했다. 그 후에 이어진 체력 측정 결과, 분홍색을 본 집단의 체력이 평소보다 약해짐을 발견했다. 한 번은 교도소 안을 분홍색으로 칠하는 실험도 했다. 그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감옥에서 15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실험에서 사용된 분홍색의 명칭은 당시 교도관들의 이름을 따 베이커 밀러 핑크(Baker-Miller pink)가 됐다. 실험 이후 미국 전역에서는 베이커 밀러 핑크가 사용된 건축물이나 가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공격성을 낮추는 효과뿐만 아니라 혈압을 안정시키거나 식욕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포츠계에서도 분홍색 계열 색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어느 대학 미식축구 팀에서는 상대 선수들의 경기력 저하를 목적으로 원정팀 라커룸을 온통 분홍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복싱 시합에서는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해 분홍색 트렁크를 착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홍색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과학적으로 완벽히 증명된 건 아니지만 샤우스 박사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선수들의 경기력을 저해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년에 단 하루, 경기장 안이 온통 분홍색으로 도배가 되는 날이 있다. 바로 어머니날이다.
어머니날
우리나라에 어버이날이 있듯이 미국에도 어머니날(Mother’s Day)이 있다. 사실 미국의 어머니날이 원조 격이긴 하지만 의의는 같다.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기념하는 이 날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 중 하나이다. 경기에 사용되는 공인구, 배트, 하물며 유니폼까지 어머니를 상징하는 분홍색으로 물든다.
정말 좋은 취지로 형성된 문화지만 이쯤 되면 궁금증이 하나 생길 만도 하다. 혹시 샤우스 박사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분홍색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어머니날에는 평소보다 운동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면 그간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더 좋은 플레이를 할까?
구속과 회전수
어머니날과 다른 날의 운동 능력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평균자책점과 같은 성적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투수와 타자가 모두 관계된 지표이기 때문이다. 가령 평균자책점이 이전보다 줄었다고 해도 투수가 잘한 결과인지 타자가 못한 결과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결과가 나오는 지표들이 필요하다.
구속과 회전수는 투수 개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측정된다. 또한 투수의 운동 능력을 평가할 때 아주 좋은 기준이 되는데 최근에는 비전문가라도 이러한 지표들을 보고 선수들의 당일 컨디션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투수의 구속이 평소보다 낮으면 컨디션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보다 강렬한 분홍색의 효과?
위 자료는 메이저리그의 구속과 회전수 지표에 대해 연도별 평균, 어머니날 평균을 비교한 표다. 신기하게도 연도에 구분없이 모든 지표가 어머니날에는 더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 차이들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정말로 분홍색이 선수들의 경기력을 떨어뜨린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홍색이 선수들의 운동 능력을 저하시킨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연도에서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고, 만약 실제로 운동 능력이 떨어졌다면 ‘자료 2’에서 구종에 관계없이 모든 지표가 감소세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관된 경향성은 없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수치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날씨가 주된 요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 경기일 중에 어머니날과 비슷한 수치가 측정된 날은 주로 4, 5월이다. 어머니날의 선수들은 이러한 시즌 초의 낮은 기온과 습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어머니날 구속 감소가 가장 컸던 2018년을 보자. 5월 13일 어머니날 워싱턴의 낮 최고 기온은 22도였다. 이는 당시 월 평균 낮 기온이었던 27도보다 5도나 낮은 수치였는데 이런 상황은 그날 경기가 열린 거의 대부분의 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놀이보다 중요한 것
샤우스 박사가 보면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선수들의 운동 능력에 영향을 주기에는 경기장의 분홍색이 다소 부족했을까? 그러나 굳이 색상이 아니더라도 어머니날 선수들의 플레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많을 것이다. 큰 행사가 있는 날이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제 실력을 못 보여줬을 수도 있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집중이 안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날 선수들이 운동할 때 받는 영향이야 어쨌든, 아무리 메이저리그라도 이날만큼은 야구 성적보다 선수들과 가족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도 얼마 남지 않은 가정의 달을 가족들과 보낼 행복한 계획을 세워 보는 건 어떨까? 이왕이면 야구장에서.
기록 출처: Baseball Savant
에디터=야구공작소 이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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