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오연우] 지금까지 한국프로야구는 아래와 같은 (대단히 불합리한)제도 하에 운영되어 왔다.
1.입사 후 9년간(대졸 8년) 성실히 근속할 때까지 연봉 협상 사실상 불가
2.입사 후 9년간 성실히 근속할 때까지 자의로 이직 불가(퇴직만 가능)
3. 이직 시 거액의 이직료 발생
4. 이직 후 다시 4년간 성실히 근속할 때까지 재이직 불가, 연봉 협상 불가
우선 이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유인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두 가지다. 소수의 몇 명은 입사 시에 억 단위의 보너스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 9년 근속 뒤 업계에서 독보적인 1인자가 되어 있으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저 불합리한 조건들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 한국프로야구는 이런 불합리함 속에서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가? 이는 역설적이게도 고용주인 구단이 ‘불합리함 속에서’ 불합리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음수에 음수를 곱하니 양수가 나온 것과 같았다.
만약 구단이 위의 1, 2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했다면 모든 선수에게 9년 동안 최저연봉만 지급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줘도 (완벽하게 유명무실한)연봉조정 제도를 피할 정도만 주면 됐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까지 구단들은 자본주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성적에 따라 적당히 연봉을 챙겨줬다.
만약 구단이 위의 3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했다면 거액의 이직료만큼의 가치가 없는 (사실상 대부분의)FA 선수들과 최저연봉으로 계약했을 것이다. 보상선수와 보상금 이상의 가치가 없는 FA 선수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은퇴의 자유뿐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까지 구단들은 자본주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FA 선수들에게 적당히 연봉을 챙겨줬다.
제도는 불합리하다. 하지만 행동도 불합리하다. 불합리한 제도와 행동으로 나온 결과는 합리적이다. 한국프로야구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불합리한 ‘제도’는 명문화된 규칙이지만 불합리한 ‘행동’은 암묵적인 규칙인 것이 문제였다.
제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반면 행동은 구단의 호의다. 호의가 중단되는 순간, 지금까지 불합리와 불합리의 교차에서 만들어진 아슬아슬한 합리성이 깨진다. 불합리 속의 합리는 불합리를 낳는다
가짜 합리
올 겨울 FA 시장은 얼어붙은 것을 넘어 아예 마비되었다. 소수의 대어를 제외하고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다.
구단은 합리성을 이야기한다. FA 계약은 과거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FA 선수에게 예우 차원에서 고액의 연봉을 안겨주던 과거의 방식은 분명 불합리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프로야구의 운동장은 기울어지다 못해 뒤집혀 있다. 연봉조정제도는 유명무실하고 FA 취득 기간은 너무 길다. FA 보상은 지나치게 크고 FA 계약 시 계약 기간과 무관하게 팀에게 4년의 보류권이 주어진다. 운동장은 그대로 기울어져 있는데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으로 협상하자는 것은 난센스다.
구단이 합리적으로 나서겠다면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다. 합리적인 행동은 합리적인 제도 하에서만 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 합리적인 제도 하에서 구단과 선수가 서로 최대한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메이저리그의 방식이다. 그러나 KBO 선수들은 FA 제도 도입 이후 20년가량 이어져 온 구단의 불합리를 믿고 프로야구라는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불합리를 버리겠다는 선언은 신의성실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불합리 속의 합리는 가짜 합리다.
에디터=야구공작소 조예은, 한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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