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유감(有感)] 공부하는 팬

<221B Baker Street>

 

[야구공작소 오연우] 셜록 홈즈를 좋아한다면 ‘거물급 의뢰인’이라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루너 남작이라는 흉악범에게 푹 빠진 바이올렛이라는 귀족 아가씨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작중에서 홈즈는 남작의 집을 정찰하기 위해 왓슨을 보낸다. 이때 홈즈는 남작이 중국 도자기 수집가인 것을 알고 남작을 만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왓슨을 도자기 애호가로 위장시킨다. 하지만 의사인 왓슨이 도자기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다. 하루 동안 벼락치기를 하고 남작의 집으로 갔지만 결국 남작의 떠보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가짜라는 것을 들키고 만다.

자, 이제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1. 왓슨은 도자기 애호가인가?
2. 만약 왓슨이 도자기를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을 공부하고 갔다면 왓슨은 도자기 애호가인가?

 

팬은 공부하지 않는다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야구팬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야구를 좋아한다. 때로는 좋아하는 것을 넘어 야구에 중독되어 있기도 하다. 주위 모든 것이 야구와 연관되어 보인다. 야구 이야기가 즐겁고 무엇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

<MLB 팀 로고가 떠오른다면 훌륭한 팬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있다. 팬은 야구를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배우고 익힌다는 사전적 의미의 공부는 열심히 한다. 사실 야구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누구보다 야구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니 당연하다.

여기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야구 자체에 대한 애정은 없으나 단순히 지식의 양을 늘리기 위한’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야구 기사를 보면서 야구를 공부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팬은 없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왓슨은 1년이 아니라 10년을 공부해도 도자기 애호가는 아니다.

 

공부하는 팬

야구팬 중에서도 특별히 야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있다. 팬덤 내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경이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구체적으로 왜 경이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아는 게 많아서인가? 그렇다면 왜 야구 해설자나 야구 전문 기자와 같은 현업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경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많이 아는 팬이 대단한 이유는 그것이 ‘팬으로서’ 성취한 위업이기 때문이다. 팬은 공부하지 않는다. 야구가 생업의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의 열정과 관심이 있다는 방증이다. 이들은 그저 좋아해서 자꾸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획득한 지식만으로 높은 경지에 올랐기에 대단하고, 그래서 경이의 대상이 된다. 팬이 다른 팬의 지식에 경의를 보낼 때는 무의식적이지만 상대가 공부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정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가끔은 야구를 ‘공부해서’ 많이 아는 팬을 보게 된다. 이 팬들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야구를 참 다방면으로 많이 안다. 어떤 팀의 어떤 선수 이야기를 해도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많은 경우 다른 스포츠에도 조예가 깊다.

둘째, 현장에서든 영상으로든 라이브로 경기를 보는 일이 드물다. 이들은 야구보다는 야구 지식 습득을 즐기며 야구 이슈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지식 습득의 측면에서 보면 3시간 넘게 직접 경기를 보고 있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도 없다.

셋째, 드러나는 지식은 많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팬이라면 한 번쯤은 자랑으로, 혹은 실수로라도 야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이들은 그런 일이 극히 드물다.

왓슨의 질문과 함께 생각해 보자. 이들은 야구팬인가?

 

‘열등감의 발로’라고 하더라도

야구를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그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팬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은 사실 야구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야구팬이 아니라 야구 지식 팬인 것이다.

여기에 이들이 효율적으로 야구를 공부해서 야구팬 사이에서 경의를 받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팬이 팬에게 경의를 보낼 때의 암묵적인 가정, 다시 말해 공부하지 않고도 이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불문율을 깨고 그에 합당하지 않은 경의를 받는 모습을 본능적으로 규칙 위반의 결과라고 느끼고 만다.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야구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 및 기록, 연도별 타이틀 수상자, 팀별 로스터 등을 다 외우게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시험 치는 것처럼 마음먹고 외우면 길어야 한 달이면 충분할 것이다. 아마 팬 중에서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는 사람의 지식도 대놓고 외우려고 작정하면 두어 달이면 따라잡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외운 사람을 야구팬이라고 할 수 있는가? 팬으로서 경의를 받을 만한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야구를 즐기는 방식은 제각각이고 누구도 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이 그저 이들의 지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열등감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다만 야구팬으로 여기고 경의를 표한 사람들이 사실은 야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의 허무감은, 비록 이것이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해도,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에디터=야구공작소 박기태

ⓒ야구공작소. 출처 표기 없는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상업적 사용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Be the first to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