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유감(有感)] 감동의 희석

#1

[야구공작소 오연우] 2017년 10월 30일 잠실 야구장. KIA와 두산의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가 열렸다. KIA가 3회 이범호의 만루홈런으로 5:0으로 앞서나갔고 6회에는 폭투와 실책까지 나와 다시 2점을 얻는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7회 말. 8번 양의지부터 시작된 이닝에서 두산은 10명의 타자들이 타석에 서며 6점을 뽑아 KIA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반면 KIA는 더 이상 도망가지 못했고, 9회 말 1점을 지키기 위해 에이스 양현종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리고 9회 말에 또 한 번 1사 만루의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에이스의 진가는 위기에서 드러나는 법. 양현종은 1점차 1사 만루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8번 박세혁과 9번 김재호를 각각 유격수 뜬공과 포수 파울플라이로 잡아내면서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 마지막까지 긴장감 넘치는 경기에 모든 야구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고, 극적으로 우승을 달성한 KIA 선수단과 팬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2

2024년 10월의 어느 날,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롯데가 삼성에 시리즈 전적 3승 무패로 앞선 가운데 한국시리즈 4차전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아무래도 지난해에도 우승을 차지한 삼성보다는 1992년 이후 32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롯데 측 열기가 더 강했다.
그런데 1회 초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롯데는 타자 일순하며 대거 5득점했고, 2회에도 4득점하며 경기 초반에 이미 대세를 결정지어 버렸다. 남은 것은 잔여 이닝을 소화하는 것뿐. 롯데 투수진은 이렇다 할 찬스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10-0로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다.
그런데… 9회 말 2아웃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순간, 분명 우승이 확정되어 기분이 좋긴 한데 기대했던 것만큼 날아갈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2는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2처럼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이 일어났는데 예상했던 것만큼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가 있다. 비단 야구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아주 기쁠 것 같았는데, 심지어 기뻐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기쁘지 않다. 왜 그런가?

이렇게 분명히 기뻐야 하는데 생각보다 기쁘지 않은 현상을 ‘감동의 희석’이라고 부르려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느낄 것으로 예상한 감동이 100이라고 하자. 그런데 특정한 경우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감동이 ‘새어나와’ 시간에 의해 ‘묽어진다’. 이렇게 되면 막상 실제로 기대하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느끼는 감동은 100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감동의 희석이다.

아직도 너무 막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아래 3가지 조건이 만족될 때 감동의 희석이 일어난다.

첫째, 일어날 것이, 혹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간절히 기대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 #2에서는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그 사건이다.
둘째,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이 ‘거의’ 확실해지는 시기가 와야 한다. #2에서는 롯데가 2회까지 9득점함으로써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셋째, 사건이 일어날 것이 거의 확실해진 시기로부터 사건이 실제로 발생할 때까지 시간적 간격이 있어야 한다. #2에서는 2회에 거의 확실해졌으므로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할 때까지 7이닝이라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기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 거의 확정되면 분명 기분이 좋다. 롯데가 2회에 9-0으로 앞섰을 때 기분이 나쁜 팬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100%가 아니기에 완전히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는 설레발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100% 일어난 사건이지 99% 일어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고, 99% 아니라 99.99%라도 정확히 100%가 아닌 이상 절대로 온전히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기분 좋은 상태로 있다 보면 감동이 조금씩 희석된다는 것이다.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느껴야 했을 감정을 거의 확정됐을 때부터 미리 조금씩 맛보다 보면 감동은 점점 묽어진다. 둘 사이의 간격이 멀수록 희석의 정도는 심해지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실제로 찾아왔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작아진 감동의 크기에 실망한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감동이 희석된 사례는 2012년 플레이오프 5차전이다. 롯데와 SK의 경기였는데 2회까지 롯데가 3-0으로 앞서 나갔으나 곧 동점을 허용했고 5회에는 3-5로 역전, 그리고 6회부터 박희수가 나오면서 재역전이 힘든 상황이 됐다.

당시 내 기분은 5회에 최저점으로 떨어졌고 남은 일은 패배가 확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졌지만 아직 진 것은 아니었기에, 패배가 확정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5회에 느꼈던 기분은 조금씩 희석됐다. 그리고 9회 초, 박종윤이 마지막으로 뜬공을 퍼올렸을 때는 예상했던 것만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우울한 기억이지만, 이 경우에는 롯데의 PO 탈락이 첫째 조건, 5회의 3-5 역전이 둘째 조건, 6~9회의 시간이 셋째 조건이 된다.(다만 2012년 당시에는 5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로 너무 배가 불러 있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어디까지나 반은 농담이고 반은 결과론이지만) KIA 팬들은 5차전 KIA투수진의 7회 대량실점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3승 1패로 기울어진 시리즈의 경기 초반 대량 리드, 혹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면 의외로 감동이 많이 희석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투수들이 실점해 준 덕분에 경기가 끝나는 순간 단 한 방울도 희석되지 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하지만, 어쩌면 7-0이 아니라 17-0으로 이겼더라도 KIA팬들은 똑같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가슴에 절대 묽어지지 않는 바다를 품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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