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감술사] 2001년, 포스트시즌 보이콧 ‘미수’ 사건

[야구공작소 오연우] 1994년 8월 12일, 메이저리그에서는 파업이 일어났다. 선수들의 몸값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자 구단들은 팀 연봉 총액 상한제를 적용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선수들이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양측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232일이 지난 이듬해 4월 2일에야 파업이 끝났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긴 파업이었고 최초로 포스트시즌이 취소된 파업이었다.

한편 KBO에서는 아직까지 파업이 일어난 적이 없다. 선수협이 설립된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선수협이 설립될 때 정도를 제외하면 파업이 일어날 정도로 선수와 구단 간에 큰 갈등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딱 한 번, 선수협이 설립된 직후인 2001년에 파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포스트시즌 보이콧이었다.

 

발단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가 문제였다. 1998년부터 시작된 외국인 선수 제도는 ‘2명 보유, 2명 출전’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2000년 8월 1일에 열린 제 9차 이사간담회에서 ‘시즌 중 외국인선수 교체의 어려움과 예산 낭비를 감안해’ 2001년부터 3명 보유, 2명 출장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 불씨가 된다.

보유 한도를 늘리기로 한 2000년 8월까지는 아직 선수협이 온전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선수들이 집단 행동을 할 수조차 없었다. 2001년은 조용히 3명 보유, 2명 출전으로 바뀐 채 시즌이 시작됐다. 그러나 2001년 1월 선수협이 자리잡고 나자 서서히 힘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전개

2001년 7월 16일, 이호성을 회장으로 한 선수협은 대전 유성호텔에서 제 1차 대의원 총회를 가졌다. 여기서 선수협은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 축소를 결의하고 이를 KBO 이사회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사회 측에서 이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당장 연초까지만 해도 선수협의 성립 자체를 놓고 싸우던 상황 아니었던가. 자존심 때문에라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터였다. 9월 7일에 열린 제 5차 이사회에서는 예상대로 ‘현행 유지’로 결정됐다.

선수협도 가만 있지 않았다. 9월 19일 서울 모처에서 선수협과 KBO 이상일 사무차장, 한화 황경연 단장, 두산 곽홍규 단장이 참석한 가운데 ‘선수관계위원회’가 열렸다. 하지만 구단 측이 절대 불가 방침을 밝힘에 따라 나진균 당시 선수협 사무총장이 포스트시즌 보이콧 의사를 나타냈고, 페넌트레이스 종료일에 선수협 긴급 대의원 총회를 열고 포스트시즌 보이콧 방안을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나진균 선수협 사무총장은 “국내 선수 보호를 위해 외국인 선수 수를 줄이는 방안은 반드시 해결돼야 하는 문제인데 구단측이 절대 불가 방침을 밝혔다.”, “구단측이 용병 문제를 이사회에서 재고조차 할 수 없다고 하니 선수협도 강경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프로야구사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대전유성호텔, 故 최동원이 1988년 최초로 선수협을 설립한 곳도 이곳이다.>

위기

이후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고 어느덧 페넌트레이스가 끝났다. 끝난 당일인 10월 4일에 대의원총회가 열렸고, 총회에 참석한 47명의 대의원 중 43명의 찬성으로 보이콧이 결정됐다.

이호성 선수협 회장은 “한국야구위원회 이사회가 내년부터 용병을 3명에서 2명으로 줄이기로 선수협과 합의하고도 이를 뒤엎는 등 올 초 문화관광부에서 합의한 내용들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KBO 이사회가 번번이 합의사항을 깨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선수들은 포스트시즌을 보이콧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호성 회장이 ‘올 초에 줄이기로 합의했다’고 함은 2001년 1월의 구두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선수협 파동이 잦아들 즈음에 선수협 측에서 용병 수를 3명에서 2명으로 줄여달라고 했고, 이때 사장단이 구두로 약속을 대신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선수협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했다.

그러나 구두약속은 구두약속이었을 뿐이었다. 사장단에서는 구두 약속의 존재를 부인했고 KBO 이상국 사무총장은 “선수들이 직업정신을 망각한 것 같다.”, “구단이 경기를 구걸할 순 없으며 이사회에서도 절대 타협을 안 할 것”이라고 강경책으로 나왔다.

 

절정

선수협의 보이콧에 대해 KBO에서도 맞불 작전을 펼쳤다. 10월 5일 KBO는 긴급 이사회를 열고 10월 7일부터 예정된 포스트시즌 전 경기를 예정대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준플레이오프 대전 팀인 두산과 한화는 이날 준플레이오프 출장 선수 명단까지 발표했다. 다만 출장 선수 명단 발표 자체는 단순히 엄포에 가까웠다. 엔트리에는 양 팀의 주요 선수들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실 이 선수들이 출전을 거부한다고 해도 별다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KBO는 유화책으로 2002년 시즌 종료 후 용병 한도 축소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는 안을 던지긴 했지만 미끼가 너무 약했다. 당연히 선수협에서는 거부했고 대책 없이 시간만 흘렀다.

 

결말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외국인 선수를 2명 보유하느냐 3명 보유하느냐는 직접 밥그릇이 달린 선수 입장에서 큰 문제지 구단 입장에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앞서 1994년의 MLB와는 달리 구단 재정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단들이 포스트시즌 파행(및 포스트시즌 수입 파행)이라는 위험을 무릅쓸 이유도 없기에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어쩌면 구단들이 진짜로 원했던 건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수협 설립 건이 마무리된 후 벌어진 첫 싸움. 순순히 져줄 수는 없는데 막상 선수협에서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자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달리 말하면 구단 측도 ‘자존심만 세워주면’ 언제든지 싸움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10월 6일 선수협과의 회동에서 선수협이 기존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2003년 시즌부터 2명 보유 2명 출전으로 환원할 것을 제안했다. 구단 측도 이를 곧바로 받아들였고, 너무나 간단하게 이 모든 소동이 끝나게 된다.

 

그 이후

이후 2003년부터 예정대로 2명 보유, 2명 출전으로 돌아오게 된다. 2004년 병풍 사건으로 선수 수급이 부족해졌을 때를 비롯해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를 늘리자는 주장도 꾸준하게 있었지만 선수협의 강력한 반대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한편 2010년대에 들어서자 이제는 구단 측에서도 외국인 선수 한도를 적극적으로 늘리려고 하지 않았다. 좋은 외국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이상 수만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NC가 창단할 당시 KBO는 NC에 창단 특례로 외국인 선수 4명 보유, 3명 출전의 혜택을 주고 기존 8개 구단에 대해서도 3명 보유, 2명 출전으로 보유 한도를 늘려 주려 했다. 그러나 막상 NC를 포함한 많은 구단들이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여 이 안은 부결되었다. NC만 3명 보유, 2명 출전의 혜택을 받았다.

전 구단의 보유 한도가 3명으로 바뀐 것은 잘 알려진 대로 2014년부터다. kt의 창단에 따라 선수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었고 이번에는 선수협에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9, 10구단의 창단으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난 상황이었기에 반대할 명분도 적었지만, 2001년의 치열했던 파업 미수 사건을 생각해 본다면 다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받아들인 것 같은 기분도 지우기 어렵다.

Be the first to comment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