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
한동안 싱커는 투수들에게 외면받았다. 뜬공 혁명 이후 투수들은 땅볼보다 삼진을 원했다. 이에 헛스윙을 많이 유도하는 포심의 가치가 급부상했다. 싱커는 그 흐름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실제로 게릿 콜과 타일러 글래스나우는 싱커를 과감히 포기하고 포심에 집중해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했다.
싱커의 Run Value(구종 가치)는 투수가 왜 싱커를 버려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싱커가 유행하던 2010년대 중반에도 싱커의 Run Value 값은 음수로, 투수에게 싱커는 던질수록 손해를 보는 구종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투수들이 다시 싱커를 던지기 시작했다. 2021년 포심 대비 싱커를 던지는 투수의 비율은 43%까지 떨어지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그 이후 점차 반등하기 시작했다.
< 포심 패스트볼 대비 싱커 투구 비율, 단위 : % >
< 싱커의 Run Value 변화 >
2022년부터 싱커의 Run Value 값이 음수에서 양수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 투수들에게 싱커는 던질수록 손해를 보는 구종이 아닌 던질수록 이득이 되는 구종이 된 것이다.
헌터 브라운은 2024시즌 중반 싱커를 장착하며 성적이 급상승했다. 카를로스 로돈, 잭 라이터, 폴 스킨스 등 최근 많은 투수가 싱커를 장착하고 있다. 심지어 한때 싱커를 버리고 포심 패스트볼에 집중해 에이스 반열에 오른 콜과 글래스나우마저 다시 싱커를 던지기 시작했다.
싱커는 어떻게 다시 가치 있는 구종이 되었으며, 투수들은 왜 다시 싱커를 던지기 시작했을까?
포심, 그리고 하이 패스트볼이 약해지고 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많은 투수가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기 시작했다. 투수들은 인플레이 타구를 줄이기 위해 삼진을 늘리고 싶어했고 하이 패스트볼은 삼진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휴스턴의 크리스티안 하비에르는 리그에서 하이 패스트볼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투수 중 한 명이다. 하비에르는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두 구종을 90% 가까이 구사하는 투 피치 투수이지만, 뛰어난 수직 무브먼트 때문에 타자는 하비에르의 하이 패스트볼에 알고도 당했다.
2023년 ALCS 3차전, 팀이 시리즈 전적 0승 2패로 몰린 상황에서 등판한 하비에르는 하이 패스트볼로 텍사스 타자들은 압도했고, 이 경기를 계기로 휴스턴은 시리즈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7차전, 월드 시리즈 진출에 1승만을 남긴 상황에서 다시 하비에르가 선발로 등판했다. 하지만 7차전에서 하비에르는 0.1이닝 3실점으로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하비에르의 하이 패스트볼은 이전 경기들과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텍사스 타자들의 대처였다. 하비에르가 허용한 4개의 안타 중 3개는 하이 패스트볼을 공략한 타구였다.
경기 도중 리포터 톰 버두치는 “이미 3차전에 하비에르의 투구를 보았기에 이번 경기에서 하비에르의 하이 패스트볼은 이전보다 평범해 보였을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아무리 위력적인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지라도 타자에게 익숙해지면 공략당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리그 전반에 하이 패스트볼이 유행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타자들은 수없이 많은 하이 패스트볼을 상대해 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하이 패스트볼에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포심 패스트볼 하이 존1 투구 비율, 단위 : % >
< 하이 존 포심 패스트볼 헛스윙률 , 단위 : % >
< 하이 패스트볼 타석당 배럴 타구 비율, 단위 : % >
투수들의 하이 패스트볼 구사 비율은 해마다 증가해왔다. 그러나 헛스윙률은 점차 감소하고 배럴 타구 허용은 늘어나고 있다. 하이 패스트볼의 위력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신호다.
구속 혁명은 하이 패스트볼 유행에 날개를 달아줬다. 빠른 구속은 좋은 포심을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구속이 높아질수록 투수들은 더 위력적인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었다.
<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단위 : 마일 >
하지만 그동안 꾸준히 오르던 포심 평균 구속은 2024년에 상승세가 꺾였다. 2025년 들어서는 더 이상 빨라지지 않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구속 혁명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 패스트볼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구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들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2024시즌 보스턴 레드삭스가 시도한 전략, 이른바 ‘패스트볼 버리기’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보스턴 전략의 본질은 ‘더 경쟁력 있는 공을 던지자’다. 보스턴은 이를 위해 경쟁력 없는 포심 대신 경쟁력이 있는 변화구의 비중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보스턴은 본인들이 내세운 전략이 지속 가능한 전략인지는 증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수들이 버림받은 패스트볼이었던 싱커를 해결책으로 꺼내 들기 시작했다. 한때 경쟁력을 잃었다고 평가받았던 싱커는 이제 그 자체의 경쟁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포심 경쟁력까지 함께 끌어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싱커는 어떻게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싱커의 진화
싱커가 외면받던 사이, 싱커는 살아남기 위해 진화했다. 더 빨라졌고, 더 많이 떨어지고, 더 많이 타자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 싱커의 평균 구속, 수직 무브먼트, 수평 무브먼트2 변화 >
현재 싱커가 더 많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과거에도 싱커는 떨어졌다. 하지만 과거의 싱커는 지금과 같은 수평 무브먼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싱커의 부활에는 이 수평 무브먼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싱커의 수평 무브먼트가 어떻게 싱커의 부활을 이끌었는지 알아보자.
싱커의 활용 공간 넓히기
2015년 댈러스 카이클은 싱커를 앞세워 사이영상을 차지했다. 당시 카이클은 땅볼 유도를 위해 싱커를 활용했다. 땅볼 유도를 위해 싱커를 철저히 낮게 던졌다.
< 2015년 댈러스 카이클 싱커, 슬라이더 히트맵 >
10년의 시간이 흐르며 싱커의 수평 무브먼트가 증가했고 결정적으로 횡 무브먼트가 극대화된 스위퍼가 등장했다. 이는 싱커의 새로운 활용법을 가져왔다.
횡으로 크게 움직이는 스위퍼는 기존 슬라이더보다 높게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스위퍼는 좌우의 차이를 이용해 헛스윙을 유도하는 구종이기 때문이다. 스위퍼가 비교적 높게 형성되더라도 타자에게 멀어지는 방향으로 휘어져 나간다면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싱커는 스위퍼와 터널링 효과가 가장 큰 구종이다. 즉 스위퍼를 높게 던지는 만큼 싱커를 높게 던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싱커를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 2024년 마이클 킹 싱커, 스위퍼 히트맵 >
2024시즌 마이클 킹은 우타자를 상대로 싱커와 스위퍼를 주무기로 활용했다. 킹의 싱커 히트맵은 카이클과 비교하면 높게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킹의 스위퍼 히트맵도 카이클의 슬라이더 히트맵보다 더 넓다.
< 낮은 존3 싱커 투구 비율, 단위 : % >
스위퍼가 유행하기 시작한 2021년부터 낮은 싱커의 투구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스위퍼의 횡 무브먼트가 싱커의 활용 공간을 넓게 만들어줬다.
패스트볼 공존하기
루이스 세베리노에게 2023시즌은 야구 인생 최악의 시즌이었다. 2023시즌 최종 성적 19경기 89.1이닝 4승 8패 ERA 6.65로 한때 사이영상 경쟁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몰락이었다.
여전히 세베리노는 평균 96.4마일의 위력적인 포심을 구사했지만 포심의 wOBA는 0.457에 달했다. 부상으로 슬라이더 제구력이 무너진 탓에 타자들은 존 안에 들어오는 포심을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었다.
2024시즌 세베리노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메츠와 1년 1,3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선발 로테이션 자리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 예측 모델에서 4점대 중후반 ERA를 기록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2024시즌 세베리노는 31경기 11승 7패 ERA 3.91을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다. 이 반등에는 싱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베리노의 싱커는 무브먼트가 뛰어난 구종이 아니다. 싱커의 평균 구속은 95.3마일로 리그 평균 이상이지만 우투수 평균보다 4.4인치 덜 떨어져 싱커 그 자체로의 구위는 리그 평균 이하로 평가받는다(Fangraph stuff+ 99).
세베리노 역시 킹처럼 우타자를 상대로 싱커와 스위퍼를 주무기로 활용했다. 하지만 좌타자를 상대하는 방식에서는 세베리노가 싱커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세베리노는 킹처럼 위력적인 체인지업을 던질 수 없지만 킹보다 더 빠른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다. 세베리노가 선택한 방법은 더 많은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이었다. 2023년과 달라진 점은 포심의 비중을 줄이고 싱커의 비중을 늘린 것이다.
< 2024년 루이스 세베리노 좌타자 상대 패스트볼 구사 비율4 >
< 2024년 루이스 세베리노 좌타자 상대 포심, 싱커, 커터 히트맵 >
이전까지는 존 안으로 패스트볼이 들어올 때 타자들이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는 포심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베리노는 포심과 함께 싱커, 커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타자들이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를 세 가지로 늘렸다. 그 결과 2024시즌 세베리노는 포심 wOBA를 0.327까지 낮추며 포심 성적 개선에 성공했다.
MLB.com 기사에 의하면 포심, 싱커, 커터를 모두 구사하는 투수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현재 다저스에서 뛰고 있는 맷 소어는 “더 많은 패스트볼을 구사하는 변화를 가져가면서 나에게 타자를 공격할 더 많은 방법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맷 소어는 이번 시즌 다저스로 이적하면서 커터와 싱커의 비중을 끌어올렸다. 프리시즌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결과 다저스 40인 로스터 진입에 성공했다.
< 세 종류의 패스트볼(포심, 싱커, 커터)를 모두 구사하는 투수의 비율 >
잭 라이터의 “투심(싱커)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포심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말은 싱커를 대하는 투수들의 새로운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이제 투수들은 싱커를 포심을 대체하는 구종이 아닌, 포심을 보호하기 위한 보조 구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치며
야구란 스포츠가 사라지지 않는 한 투수와 타자의 수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투수는 새로운 구종과 투구 패턴을 들고나왔고, 타자는 그에 적응하면서 투수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줬다.
타자들은 하이 패스트볼을 공략하며 투수들에게 새로운 숙제를 제시했다. 투수들은 그 해답을 싱커에서 찾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외면받았던 싱커는 새로운 활용 방법과 함께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부록: Baseball Savant 존 구분
참조 = Fangraphs, MLB.com, Baseball Savant, The Athletic
야구공작소 탁원준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익명,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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