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
이전 시리즈에서는 일본 여자야구가 실현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를 살펴봤다. 여자야구는 선수들이 야구, 일, 학업을 병행하며 성평등과 여성의 역량 강화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여자야구 타운’ 제도를 통해 지역과 협력해 발전 모델을 구축하고, 대회와 이벤트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며 여자야구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일본 독립 야구가 갖고 있는 사회적 가치를 소개하고자 한다.
재정 위기 속의 독립 야구, 자립의 길은
독립 야구는 많은 이들에게 꿈의 연장선으로 불린다. 프로 진출에 실패한 선수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된 독립 야구 리그는 출범 당시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201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 야구단 성남 블루 팬더스의 관계자는 한국의 독립 야구를 ‘아카데미’로 규정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과 일본의 독립 야구는 선수가 급여를 받고 소속감과 책임을 느끼지만, 한국의 독립 야구는 선수들이 회비를 내며 자신의 꿈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9년 출범한 국내 유일의 독립 야구 리그 ‘경기도 리그’는 6년째를 맞이했지만, 운영난은 여전히 심각하다. 각 구단은 선수 및 코칭스태프의 훈련비와 운영비 명목으로 연간 약 3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로 경기도의 지원을 제외하면 필요한 예산의 60% 이상을 외부에서 자체 조달해야 한다.
그러나 연고 지방자치단체와 기업들은 그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 지자체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구단을 지원할 행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독립 야구 선수들이 지자체 구성원으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지역민의 세금으로 이들을 지원할 명분도 부족하다.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프로 진출 실패 선수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지만, 야구와 무관한 일반 주민들의 공감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민간 기업들 역시 프로야구보다 리그의 수준과 인지도, 수익성이 낮아 마케팅 파트너로서의 가치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구단 경영진이 프로팀 입단을 빌미로 선수들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전지훈련비를 횡령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독립 야구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독립 리그 3년 연속 챔피언 연천 미라클은 연고지인 연천군으로부터 매년 3억 원의 지원금을 받아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연천 미라클은 연천군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인 야구인들을 위한 무료 레슨을 진행하고, 리틀 야구단을 운영하며, ‘야구 도시’라는 지역 정체성 구축에 힘쓰고 있다. 이는 독립 야구가 단순히 선수들의 재기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자체의 도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 지역 행사에 부스를 마련한 연천 미라클 >
이처럼 한국 독립 야구의 현실은 ‘독립’이라는 단어와 다소 거리가 있다. 이는 독립 야구가 진정한 의미의 자립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독립 야구가 본래의 취지와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재정적 안정성이 필수적이다. 지금까지는 수동적인 자세로 지원을 기다리기만 했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역 사회와의 협력 및 선수 육성의 의무를 가진 일본 독립 야구
일본의 독립 야구는 지역 밀착형 운영이 가장 큰 특징이다. 독립 야구는 단순히 선수에게 프로의 길을 열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와 밀접하게 협력하여 팬들과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지역 스포츠 문화를 육성하는 장이다. 따라서 다수의 지역 기업과 지자체의 지원이 운영자금이 되고 있으며, 운영 및 육성 방침에 영향을 준다.
NPB(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야구를 하는 것”이 주된 의무이지만, 독립 야구 선수들은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의 의무도 갖고 있다. 독립 리그 선수들의 평균 급여는 약 150만 원으로, 생계를 위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한다. 이들은 지역 식당에서 일하거나 사무직 등 다양한 일을 통해 지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프로야구에서는 선수들의 사회 공헌 활동이 선택 사항인 반면, 독립 야구 선수들에게는 필수로 여겨진다. 이들은 지역 축제에 참여하고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복지 시설을 방문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독립 야구 선수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야구만 해온 경우가 많아, 이러한 활동은 사회를 경험하는 첫걸음이 된다.
처음에는 야구와 무관한 지역 주민들이 “왜 이런 곳에서 야구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팀과 선수들은 지역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해왔다. 독립 야구팀은 ‘우리 동네 팀’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운영 자금을 확보하며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사회 공헌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독립 야구의 또 다른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NPB 선수를 육성하는 것이다. 이 의무는 매년 독립 야구 리그의 홈 개막전에서 드러난다. 지역 정치인과 시장은 축사에서 항상 올해는 한 명이라도 더 NPB로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독립 리그가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NPB에 선수를 보내는 것이 마을 주민의 가장 큰 목표로 자리 잡고 있다. 독립 리그의 팬들과 관계자들은 독립 리그를 졸업한 선수들의 이후 활약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들이 정식 선수로 등록되거나 1군 경기에 출전할 경우 SNS에는 축하 메시지가 두드러진다. 팀을 떠나더라도, ‘우리 팀’ 출신의 선수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선수’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독립 리그 출신 선수들이 프로에 진입하는 숫자는 매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시코쿠ILplus、BCL、NLB、BSL、KAL 등 다수의 독립 야구 리그로부터 총 177명의 선수(투수 88명, 포수 27명, 내야수 36명, 외야수 26명)가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2005년에는 단 2명에 불과했던 독립 리그 출신 프로야구 선수가 2024년에는 무려 18명에 달했다. 특히 올해 한신 타이거스는 2024년 드래프트에서 9명 중 무려 5명(3명은 육성선수)을 독립리그 출신으로 지명하며, 독립 야구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 연도별 독립 리그 NPB 드래프트 지명 실적 >
< 2024년 NPB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지명받은 독립 야구 선수 사노 타이요 >
이러한 의무는 독립 야구의 재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독립 리그에서 NPB로 드래프트 지명을 받은 선수들은 계약금이나 첫 해 연봉에서 일정 금액을 소속된 독립 리그 구단에 지급해야 한다. 독립 리그는 티켓 판매와 굿즈 판매 수익이 프로 리그에 비해 제한적이어서 안정적인 재정 확보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 리그 구단이 NPB로 선수를 보내고 받는 금전적 보상은 구단 운영에 크게 기여한다.
지역 문제를 함께 해결해 가는 BC 리그의 MIKITO AED PROJECT
일본의 독립 야구의 지역사회 밀착형 운영의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독립 리그 중 하나인 루트인 BC 리그의 ‘MIKITO AED PROJECT’다. 스포츠 시설에 AED를 보급하고 사용 방법을 알려 안전한 스포츠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독립 야구 리그 중 하나인 BC 리그는 2006년 리그 창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많은 지자체와 기업들이 독립 리그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관중이 모일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BC리그의 대표인 무라야마 씨는 학부모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에는 니가타에 사는 9살 아들 미즈시마 미키토가 야구 시합 전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과 함께, 아들이 니가타에 야구팀이 생기면 꼭 응원하고 싶어 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 편지에 용기를 얻은 무라야마 씨는 다시 지자체와 기업에 협조를 구했다. 그 결과 니가타, 시나노, 토야마, 이시카와 4개 구단 창단에 성공하여 독립 리그가 출범할 수 있었다.
리그 관계자들은 소년이 심장 발작을 겪었을 당시 AED(자동체외식 제세동기)가 현장에 있었다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로 인해 ‘MIKITO AED PROJECT’가 시작되었다. BC 리그의 공식전에서는 항상 이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진다.
<경기장에 방문한 팬들에게 나눠주는 MIKITO PROJECT 응원 도구 >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표는 지역 사회에 AED를 보급하여 스포츠 활동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다. BC 리그의 야구팀들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이 자금을 지역 사회에 AED를 기부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BC 리그는 총 33대의 AED를 지방 자치단체와 스포츠 시설에 기부해 보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응급처치 교육을 제공하여 심정지 발생 시 신속하게 대응할 방법도 교육하고 있다. 독립 야구 선수들이 직접 사용 방법을 익혀 강습회를 열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사회와의 유대감을 더욱 강화했다. 선수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소중한 정보를 전달하며,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돕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은 설비 및 서비스 분야의 기업으로부터 스폰서 확보로 이어지기도 했다.
< BC 리그 선수들에 의한 리틀 야구 AED 강습회 >
일본의 독립 야구는 선수 육성과 지역 사회 기여를 동시에 이룰 방안을 모색해, 독립 야구가 단순한 선수 재기의 무대를 넘어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될 때 독립 야구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독립 구단과 선수들의 주체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독립 야구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꿈을 키워갈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 독립 야구도 일본의 사례처럼 지역 사회와 깊이 연결된 진정한 의미의 독립 리그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 = BC 리그, 토야마 GRN 썬더버즈, 한신 타이거, 연천 미라클, KBS, 경인일보, 착한 자본의 탄생(김경식 저), Gratton, Chris; Preuss, Holger (2008). ISO26000(국제표준화기구 사회적책임 표준), etc.
야구공작소 천태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강상민,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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