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재성 >
“별거 없는 유망주에서 사이영상 수상자까지 성장한 클루버의 빛나는 13년의 커리어가 지난 금요일에 끝이 났다.”
– 잭 메이셀 디 에슬레틱 기자
현지 시각 2024년 2월 9일. 201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이자 두 차례 사이영상 수상자, 코리 클루버가 은퇴를 선언했다.
클루버는 ‘클루봇(Klubot)’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는 마운드 위에서의 한결같은 무표정이 마치 로봇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클루버는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언제나 마운드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브레이킹 볼은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구종으로 손꼽히곤 했다. 그렇게 그는 2000년대 후반 약팀의 대명사였던 클리블랜드를 월드시리즈까지 이끈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의 전성기는 짧았다. 하지만 그 어떤 투수보다도 화려했다.
클리블랜드로 오기까지
1986년 4월 10일생의 클루버는 텍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코펠 고등학교 시절 85~87마일의 평범한 우완 투수였지만 뛰어난 변화구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이 있었고 2004년 드래프트에서 단 한 팀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이후 클루버는 팔꿈치에 두 개의 나사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플로리다, 딜란드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클루버는 주목받던 신입생은 아니었다. 실제로 대학 시절 첫해에 25이닝에 ERA 7.82에 그쳤다. 하지만 2006년 ERA 3.61, 2007년 ERA 2.05를 기록하며 대학 야구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클루버는 그해 드래프트에서 미지명의 설움을 딛고 4라운드 전체 139번으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2009년 싱글 A와 더블 A에서 ERA 4.55를 기록하는 등 마이너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런 클루버에게 첫 번째 큰 변화가 발생한다.
< 코리 클루버의 인생을 바꾼 크리스 안토네티 (현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단장) >
2010년 클리블랜드는 샌디에이고와 트레이드를 논의 중이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여러 명의 유망주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클루버였다. 하지만 여러 명의 유망주 중 클루버는 후순위였다.
그중 클루버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이는 현 클리블랜드 단장인 크리스 안토네티였다. 당시 단장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맡던 안토네티는 2010년 더블 A 리그인 텍사스 리그에서 클루버의 투구를 지켜보고 그에게 매료됐다.
“우리는 클루버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지켜봤던 유망주 중 가장 훌륭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체조건(6피트 4인치, 215파운드)이 좋았으며 평균 92마일에서 최고 95마일을 던졌다. 그는 많은 변화구를 던졌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타자들의 헛스윙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 2014년 안토네티가 클루버의 트레이드를 회고하며
결국 샌디에이고와 세인트루이스가 포함된 삼각 트레이드로 클루버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한다. 안토네티의 눈은 정확했다. 샌디에이고 시절 한 번도 팀 내 30위 유망주에 들지 못했던 클루버는 인디언스 이적 후 베이스볼 아메리카 팀 26위 유망주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클루버는 이듬해인 2011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한 투수 코치
2012년 5월, 클루버의 소속팀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됐다. 그렇게 평범한 휴식일이 될 줄 알았던 이날 오후는 클루버의 모든 것을 바꾼 날이 됐다.
당시 트리플 A팀인 콜럼버스 클리퍼스에서 뛰던 클루버를 투수 코치였던 루벤 니에블라(Ruben Niebla)가 지켜봤다. 그리고 클루버의 패스트볼을 보며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투심’이었다.
니에블라는 당시 트리플A 투수 코치였던 미키 캘러웨이와 함께 클루버에게 불펜 피칭에서 포심과 투심을 섞어 던지도록 지도했다. 그리고 코치진은 클루버에게 투심 위주의 피칭을 지시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다음 경기였던 워싱턴 내셔널스 마이너리그와의 경기에서 클루버는 34개의 패스트볼 중 31개를 투심으로 던졌다. 경기 결과는 6.2이닝 2실점. 이후 10번의 선발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8월부터는 조시 톰린을 대체해 클리블랜드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니에블라는 당시 클루버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의 나이와 경력에 변화에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어렵다. 그는 4라운드였으며 그에 걸맞는 능력과 약간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연마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클루버는 기꺼이 그 기회를 받아들였다.”
니에블라는 클루버의 변화구에 주목했다. 클루버가 당시 던졌던 커브, 슬라이더, 커터는 모두 뛰어났다. 하지만 패스트볼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니에블라가 그에게 투심을 권유한 것은 뛰어난 변화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투심을 보고 니에블라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다른 변화구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구종”이라 평했다.
2012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한 클루버는 이듬해 2013년, 26경기에서 11승 ERA 3.85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 항상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던 그조차도 사이영상 수상의 기쁨은 감출 수 없었다 >
세이버메트릭스가 만든 첫 사이영상
2014년 클루버는 데뷔 첫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당시 경쟁자는 펠릭스 에르난데스. 클루버는 18승 ERA 2.44를 기록했고 펠릭스는 15승 ERA 2.14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만 보자면 펠릭스의 근소 우위가 예상됐다.
두 선수의 사이영상 수상을 결정지은 요인은 ‘FIP’. 즉 수비 무관 평균자책점이었다. 2010년대 초반, 영화 머니볼 등의 열풍으로 세이버메트릭스가 인기를 끌면서 FIP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펠릭스가 무려 2.1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FIP에서는 클루버가 앞섰고 결국 근소한 차이로 그에게 사이영상이 돌아갔다.
< 2014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경쟁자 성적 비교 >
지금 보면 클루버의 사이영상 수상이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FIP의 개념은 지금보다 훨씬 생소했으며 투표 결과에 대해 의아해하던 팬들도 많았다. 클루버의 사이영상 수상은 클래식 기록만 보는 사이영상 투표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클리블랜드의 전성기를 이끌다
2015년, 클루버는 클리블랜드와 5년 3,850만 달러에 연장계약에 성공했다. 여기에 2년 구단 옵션이 있으며 사이영상 순위에 따라 최대 7,700만 달러까지 수령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지난 시즌 사이영상을 받았지만 2015년에는 다소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10승에 실패했으며 ERA 3.49를 기록했다. 하지만 여전히 낮은 2.90의 FIP를 기록했으며 5월 1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벤 시츠 이후 12년 만의 한 경기 18개의 삼진을 잡기도 했다. 10승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탈삼진 능력은 여전했다.
그리고 2016년, 클리블랜드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발돋움했다. 지난 시즌 데뷔한 린도어와 한층 성장한 라미레즈도 있지만 클루버가 로테이션의 중심을 잡아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해 18승을 기록했고 3.1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 세 번째로 많은 점수를 얻었다. 그리고 클루버는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무대에 오른다.
포스트시즌 데뷔전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클루버는 보스턴을 상대로 7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토론토를 상대로 두 번의 등판에서 11.1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렇게 클루버는 첫 포스트시즌에서 팀을 월드 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바우어, 카라스코 등의 부상으로 선발진에 구멍이 생긴 클리블랜드. 로테이션에 구멍이 생기자 프랑코나 감독은 월드 시리즈에서 클루버를 1,4,7차전에 등판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기대에 맞게 1차전 6이닝 무실점, 4차전 6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2승을 챙기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다른 선발진이 무너지며 결국 7차전까지 가게 됐다.
하지만 이미 포스트시즌에서 피로가 쌓였던 클루버는 4이닝 4실점으로 무너졌다. 데뷔 후 처음으로 단 한 개의 삼진을 잡지 못한 경기가 됐을 정도로 그의 피로는 상당했다. 비록 우승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그 누구도 클루버를 비난하지 못했다.
“그들(클루버와 앤드류 밀러)은 결국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들 없이 우리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 WS 7차전 이후 테리 프랑코나 감독 인터뷰
비록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듬해 클루버는 18승과 2.29의 ERA를 기록하며 두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데뷔 첫 20승을 기록했다. 2014년부터 5년간 그는 두 번의 사이영상 수상을 포함해 네 번의 사이영상 포디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불운, 그리고 저니맨
2019년 5월, 승승장구를 달리던 클루버의 커리어에 제동이 걸린다. 마이애미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한 그는 오른쪽 팔에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맞으며 강판된다. 결과는 골절. 이로 인해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지만 그의 복귀는 생각보다 늦었다.
8월 7일에야 재활 등판을 시작한 클루버는 세 번째 등판에서 단 20구 만에 다시 강판되고 말았다. 결국 클루버의 2019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클리블랜드는 그에게 1,750만 달러의 구단 옵션을 실행해 계약을 연장했다. 하지만 클루버는 다시 프로그레시브 필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12월 15일, 딜라이노 드실즈와 엠마누엘 클라세의 대가로 텍사스로 트레이드됐다. 그렇게 그의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클리블랜드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클루버에게 누적된 피로는 상당했다. 텍사스에서 그는 어깨 부상으로 단 한 이닝을 던지는 데에 그쳤다.
2021년 FA가 된 클루버는 뉴욕 양키스와 1,100만 달러짜리 1년 계약에 성공한다. 이전보다 부상 상태가 괜찮아졌고 5월 2일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개인 통산 100승을 거두며 지난 2년간의 부진을 씻어내는 듯했다.
< 양키스 시절 노히트 달성 후 환호하는 클루버 >
5월 19일에는 이전 팀인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노히트를 기록했다. 1999년 데이비드 콘 이후 첫 양키스의 노히트 투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경기에서 어깨 부상으로 다시 강판되며 오랜 기간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고 9월에 가까워서야 복귀하는 데에 그쳤다. 최종 16경기 5승 ERA 3.83을 기록하며 양키스에서의 1년을 마무리했다.
2022시즌은 탬파베이로 둥지를 옮겼다. 31경기에서 10승을 기록하며 4년 만에 10승을 달성했다. 비록 전성기 때보다는 구속은 떨어졌고 삼진도 줄었지만 164.0이닝 동안 21개의 볼넷을 내주며 안정적인 제구력으로 로테이션에 안착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2023년 보스턴으로 이적했으나 55.0이닝에 그쳤으며 ERA는 무려 7.04였다. 6월 20일을 이후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지 못한 채 재활에 매달렸다.
결국 그는 다시 재기하지 못하며 13년간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 21세기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코리 클루버의 선수 생활이 끝났다 >
클루버의 커리어를 돌아보며
월드시리즈 준우승, 3번의 올스타와 두 번의 사이영상 수상. 클루버는 그 어떤 투수들보다도 화려한 커리어를 보냈다.
클리블랜드 팬에게 클루버는 특별한 존재다. 엄청난 염가계약임에도 꾸준하게 2010년대 전성기를 이끈 에이스였으며 팀이 원하면 언제나 등판할 수 있는 헌신도 보여준 투수였다. 수많은 클리블랜드 팬들은 그가 다시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돌아오기를 바랐으나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가 한 경기 18개의 삼진을 잡으며 팀의 기록을 다시 날은 클리블랜드의 전설적인 투수 밥 펠러의 전시회를 열기 위해 그의 아내를 초대하고 맞이한 경기였다. 클루버의 그날 투구는 마치 펠러의 아내에게 자신이 이 시대의 밥 펠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는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21세기 밥 펠러였다.
“잊을 수 없는 놀이기구 같은 커리어였습니다. 마운드를 떠나지만 여전히 야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동안 배운 것을 다음 세대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 코리 클루버의 은퇴 인터뷰 中
그는 언제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 클루버를 추억하며 그의 두 번째 인생을 응원한다.
참고 = The Athletic, Fangraphs, Cleveland.com,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SNS
야구공작소 이재성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도상현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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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칼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