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 인천광역시 >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1931년 미국의 트래블러스라는 보험사의 계약 심사 부서에 근무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가 ‘산업재해 예방:과학적 접근’이란 책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1:29: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어떤 대형 사고가 한 번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번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이상 징후가 나타난다는 통계적 의미다. 산재에서 출발했으나 오늘날엔 여러 위험이 내포된 분야에서 널리 통용된다.
야구장도 예외는 아니다. 야구장에선 다양한 사고가 발생한다. 물론 불가항력이 전혀 없었다고 확언할 순 없다. 다만 대부분은 수백 번의 이상 징후와 수십 번의 작은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데서 기인했다는 걸 부정하기도 어렵다. 때로는 사소한 부주의, 안전에 관한 불감증이 그러한 요인들을 파생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기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다는 점도.
지난해 5월 27일 마산야구장 외야 펜스 붕괴 사고가 있었다. NC 다이노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퓨처스 경기가 열리고 있던 때였다. 좌측 폴대부터 가운데 펜스까지, 20여m의 펜스가 떨어져 나갔다. 40년 프로야구 역사상 야구장 펜스가 무너져 경기가 중단된 건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정확히 말해 무너진 건 펜스에 부착된 보호 패드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13년 ‘프로야구 경기장 펜스 보호 패드 기본 지침’을 확정, 발표했다. 모든 경기장 펜스에 두께 80mm 이상의 보호 패드 설치가 의무화(적용 시점은 2015년 시즌 개막 전까지)됐다. 보호 패드를 경화시켜 충격 흡수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광고용 페인트의 사용 자제안과 매년 성능시험을 거쳐 규정에 미치지 못하면 보수 또는 재설치를 요구하겠다는 계획도 담겼다.
마산야구장을 2군 구장으로 사용하는 NC는 2015년 3월, 이 보호 패드를 교체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기관이 실시한 충돌 안전 시험에서 가장 우수한 등급을 받은 제품이라는 보도자료와 함께였다. 그 후 7년이 지난 시점에 사고가 났다. 그리고 사고 당시 떨어져 나간 패드의 모습을 보면 의아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보호 패드가 떨어져 나간 마산야구장 펜스 >
1보호 패드는 휘거나 비틀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지대와 충격 완화를 위한 폼, 표층 커버로 구성된다. 표층 커버는 패드의 외곽을 마감하는 박판형 소재로 방염과 발수 성능이 필수다. 방염은 화재 시 빠른 확산을 예방, 발수는 습기의 침투로 접착력이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보호 패드 제조사들은 표층 커버가 폼과 지지대의 뒷면을 완전히 감싸도록 설치할 것을 권고한다. 앞서 언급한 습기를 막기 위해서다. 부득이하게 다 감싸지 못할 때라도 지지대의 뒷부분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아 내부로의 빗물 유입을 차단해야 하며, 패드 단위마다 적절한 개수의 습기 배출용 배수구도 설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마산야구장의 보호 패드를 보면 지지대 뒷면이 훤히 드러난다. 지지대는 물론 이와 맞닿은 외벽 역시 오랜 습기의 흔적이 남아있다. 접착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형태다.
< 장충리틀야구단 펜스 보호 패드 설치 시방서>
2 화재 리스크에 대한 부분은 더 심각하다.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보호 패드가 선수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화재는 수많은 관중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서다. 인명 피해의 많고 적음이 경중을 나눌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더 많은 사람의 심각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철저한 관리가 요구되는 영역이란 얘기다.
지난 몇 년간 국가안전대진단 대상에 포함됐던 야구장들의 안전 관리 실태는 참혹했다. 언론을 통해 보도됐기에 부담 없이 언급할 수 있는 인천 문학야구장의 사례(점검 2021년 10월 18일)를 보면 소화기 내구연한 초과, 소화 펌프 모터 불량, 화재탐지설비(제어스위치, 감지기) 작동 불량이 적발됐다. 소화기의 내구연한은 10년이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야구장은 연 2회 이상의 소방 점검이 필수인데, 10년이 지난 소화기 하나 걸러내지 못했단 거다. 화재 발생 사실을 무엇보다 빠르게 잡아내야 할 감지기, 불을 꺼야 할 소화 펌프 역시도.
< 2021년 인천광역시 국가안전대진단 결과 (문학야구장). (링크) >
비단 문학야구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야구장에선 법적으로 설치해야 할 감지기, 피난 유도등이 없었고, 임의적인 구조 변경으로 방화구획(화재 시 불길과 연기를 차단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과 스프링클러가 훼손된 사례도 있었다. 또 다른 야구장에선 여러 주체가 서로 관할이 아니라며 미루는 동안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지하구가 있었고, 층간 상부 하중을 지탱해주는 내력벽에 균열이 생긴 곳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국내 야구장에서 화재로 인한 대형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안전 불감증에 빠진 사이 수백 번의 이상 징후는 계속되고 있다. 이를 알아채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언제 한 번의 큰 사고로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공교롭게 감지기가 고장 난 곳에서 불이 나고, 그 영역을 커버해야 할 스프링클러나 소화 펌프가 먹통이라면? 뒤늦게 발견한 사람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갔지만 압력이 떨어진 상태라면? 때마침 방화구획이 깨져 연기가 빠르게 확산되며 시야를 가렸는데 피난 유도등도 없다면? 야구엔 만약이 없다지만, 안전은 언제나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참고 = 인천광역시, KBO, 국민체육진흥공단
야구공작소 이아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박주현 홍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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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돈쓰는걸 아까워하면 안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