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2016년 – 이틀 연속 끝내주는 사나이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문규현이라는 이름이 KBO 리그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그리 크지 않다. 군 복무 시절을 포함, 무려 17년 동안이나 롯데 자이언츠에 소속돼 사직의 내야를 지켜왔고, 올스타에도 선정되기까지 했던 문규현이지만 막상 업적을 언급하라고 하면 무언가 쉽게 떠오르는 것은 없다. 16시즌 동안 1000경기가 넘게 출전했지만 100안타 시즌은 한 차례도 없었고, 두 자릿수 홈런은커녕 현역 막바지인 2017년과 2018년에 기록한 6홈런이 커리어 최고 기록이었다. 술자리에서 한 잔 정도 마시고 나서 “예전에 그런 선수가 있었지” 하며 떠올릴 수는 있지만 거나하게 취하면 쉽게 기억하기는 어려운 정도의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규현은 이상하리만큼 팬들의 뇌리에 ‘강강약약’이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1군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2010시즌 문규현은 류현진, 김광현, 양현종 등 당대 최고의 선발투수들을 상대로 좋은 기록을 올리면서 ‘에이스 킬러’ 별명을 얻었다. 이후로는 그때만큼의 상대전적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의문의 클러치 능력을 보여줬다. 2014년 9월 14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생애 첫 끝내기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 이후 문규현은 2018시즌까지 5시즌 만에 5번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특히 2016시즌에는 한 시즌에만 2개의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면서 팬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그냥 2개를 기록한 것도 아니고, 아예 이틀 연속으로 경기를 끝내는 타점을 올린 것이다. 이는 KBO 리그 역대 최초이자 2021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통산 타율 0.251의 문규현은 어떻게 2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달력을 2016년 6월 28일로 돌려보자. 이날부터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는 사직 야구장에서 주중 3연전을 가졌다. 롯데와 삼성은 시리즈 시작 전까지 1.5경기 차로 치열한 순위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그 순위 싸움이라는 것이 7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2015시즌 8위 팀이었던 롯데는 그럴 수 있었지만 전년도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이었던 삼성은 신구장으로 옮긴 첫 시즌부터 영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엇비슷한 전력과 성적을 가지고 두 팀은 치열한 매치를 예고했다.

첫날 경기부터 심상찮았다. 롯데는 시즌 내내 큰 활약이 없었던 선발 노경은이 6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최고의 투구를 선보였다. 그 사이 배터리를 이뤘던 포수 김준태의 데뷔 첫 홈런이 나오면서 노경은은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다. 그러나 2016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FA 듀오 윤길현과 손승락이 나란히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윤길현은 7회 등판했으나 포수 김준태의 송구 실수가 나오며 허무하게 동점을 허용했다. 손승락은 팀이 4대 1로 다시 리드를 잡은 후 9회 등판했으나 박한이에게 동점 투런 홈런을 내주는 등 무려 3실점하며 순식간에 리드를 날렸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롯데는 10회 말 등판한 안지만에게 정훈과 이우민이 안타를 기록하면서 1사 2, 3루 찬스를 만들었다. 여기서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문규현. 초구 몸쪽 공을 지켜본 문규현은 다음 공을 힘껏 잡아당겼고, 곧바로 만세를 불렀다. 맞자마자 외야수 키는 넘기는 것이 확정된 타구였고, 결국 쭉쭉 뻗어 나가면서 좌중간 펜스도 넘겼다. 끝내기 스리런. 문규현의 개인 통산 2번째 끝내기 안타이자 끝내기 홈런이었다. 문규현은 이날 3회 초 3루수를 맞고 옆으로 흐른 타구를 잘 잡아 이닝을 끝냈고, 7회 말에는 2대 1 리드를 잡는 적시타를 터트리는 등 팀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됐다.

그러나 이날 문규현의 활약은 다음 날 경기를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29일 경기에서 롯데는 1선발 조쉬 린드블럼을 투입했고, 삼성은 6월 들어 실질적인 에이스로 활약 중이던 김기태가 등판했다. 삼성은 1회 초부터 최형우와 박한이의 적시 2루타로 2점을 올렸고, 롯데도 곧바로 1회 말 한 점을 얻었다. 이어 2회 말에는 전날 경기의 히어로 문규현이 중견수 앞 적시타를 때려내면서 1이닝 만에 균형을 맞췄다. 이후 경기는 6회까지 별일 없이 흘러갔다. 양 팀 선발 린드블럼과 김기태는 경기 초반 실점 이후 무너지지 않으며 자신의 역할을 하고 내려갔다.

균형을 지키고 있던 승부의 추는 7회 들어 조금씩 삼성 쪽으로 기울었다. 롯데는 7회 초 등판한 이명우가 만루 위기를 만들었고, 구원 등판한 홍성민이 밀어내기를 허용하면서 역전을 허용했다. 이어 8회 초에도 박해민의 3루타와 백상원의 적시타로 한 점을 더 내주며 롯데는 2대 4로 뒤진 상황에서 9회 말 공격을 맞이하게 됐다.

삼성은 승리를 지키기 위해 당연하다는 듯 마무리 투수 심창민을 마운드에 올렸다. 그런데 선두타자 박종윤이 왼쪽에 떨어지는 안타로 살아나가면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어 강민호의 안타와 대주자 김재유의 2루 도루로 롯데는 무사 2, 3루 황금 찬스를 만들었다. 다음 타자 이우민의 타구는 2루수 백상원의 정면으로 향했다. 백상원은 3루 주자를 저격하기 위해 홈으로 송구했지만 공은 홈플레이트 옆으로 향하며 태그가 불가능하게 도착했다. 한 점 차로 쫓아간 롯데는 (번트 실패라는 고비도 있었지만) 더블 스틸로 역전 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타석에는 또 문규현이 등장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어제 경기를 재현해주기를 기다렸다. 6구까지 끈질기게 승부한 문규현은 7구째 변화구를 결대로 밀어쳐 2루수 쪽으로 공을 보냈다. 정상 수비였다면 2루수 글러브에 걸릴 수도 있었지만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삼성 내야진은 이 타구를 잡지 못했다. 타구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2루 주자 이우민도 홈 승부를 시도했고, 우익수 박한이의 송구보다 먼저 홈에 도착하며 경기를 마감했다. 5대 4, 롯데의 끝내기 승리였다.

역대 KBO 리그에서 이틀 연속 끝내기를 기록한 선수는 문규현을 비롯해 2003년 이숭용, 2018년 박한이, 2020년 주효상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 시리즈에서 이틀 연속 끝내기 안타를 터트린 것은 문규현이 역대 최초였다. 직전 일주일 동안 타율 0.429를 기록하며 쾌조의 타격감을 보여줬던 문규현은 이 시리즈에서 상승세의 절정을 보여주며 (믿을 수 없게도) 3할대 타율에 도달했다.

문규현은 시리즈 마지막 날인 30일 경기에서도 끝내기 찬스를 잡았다. 2점 차로 뒤지던 9회 말 2사 1, 2루에 등장한 문규현은 홈런 하나만 기록하면 3일 연속 끝내기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문규현은 적극적인 승부 대신 ‘기다림’을 택했고, 볼넷을 얻어내며 찬스를 이어갔다. 문규현의 인내심으로 만든 동점 기회에서 손아섭이 2타점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며 롯데는 패배 직전에서 살아났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0회 말에는 황재균이 중월 솔로포를 폭발시키면서 결국 롯데는 역대 최초로 3연전 끝내기 승리를 기록했다.

롯데는 삼성과의 3연전을 포함, 2016시즌에만 10번의 경기를 끝내기로 승리했다. 문규현에게 살짝 묻히기는 했지만 황재균은 두 차례 끝내기 홈런을 포함해 3번의 끝내기 안타를 만들면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끝내기가 많다고 성적까지 잘 나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7월 말 터진 ‘족발게이트’ 사건 이후 롯데는 처절한 추락을 시작했다. 결국 롯데는 2016시즌을 전년도와 같은 8위로 마감했다. NC 다이노스 한 팀을 상대로만 한 시즌 15패를 당한 것은 덤이었다.

PS. 문규현의 끝내기 안타는 정말 팀이 필요할 때만 나왔다. 통산 5차례 끝내기 안타 중 2016년의 이틀 연속 끝내기는 순위표에서 붙어있던 삼성을 내리는 데 기여했고, 나머지 3번의 끝내기는 순위 싸움이 한창이던 9월 이후에 나왔다. 특히 통산 마지막 끝내기 안타였던 2018년의 이른바 ‘한글날 대첩’ 끝내기는 롯데가 잠시나마 가을야구의 꿈을 꾸게 했던 소중한 안타였다.

2016년 6월 29일 삼성-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KBO 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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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롯데 자이언츠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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