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걸린 꿈의 구장, 반세기 넘은 그들만의 리그

출처: 위키피디아

올여름 야구팬들에게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찾아왔다. 영화 <꿈의 구장>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꿈의 구장> 개봉 30주년을 맞아 영화 내용을 현실화하는 꿈의 구장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코로나19 여파로 1년 미뤄진 끝에 한국 시간으로 지난 13일 아이오와주 옥수수밭의 야구장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경기는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명승부였다. 화이트삭스는 7-8로 뒤지던 9회 말 1사 1루 톱 타자 팀 앤더슨이 양키스 잭 브리튼의 마지막 공을 담장 밖 옥수수밭으로 날려 보내며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TV 시청자는 600만 명에 육박하며 2005년 이후 정규 시즌 경기로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꿈의 구장>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꿈의 구장>은 한 야구팬의 ‘꿈’에 관한 영화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열성팬이었던 아버지를 떠나보낸 주인공은 어느 날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지으면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들이 돌아온다는 계시를 받는다. 그는 미친 짓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을 만든다. 마침내 조 잭슨을 비롯한 7명의 선수가 야구장에 나타나며 꿈이 이뤄진다.

<꿈의 구장>은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 중 손에 꼽히는 수작이다. 흥행은 물론 1990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또 한 편의 야구 영화가 스크린에 걸렸다. <꿈의 구장>처럼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진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특별한 영화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1992>다.

<그들만의 리그>는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활약했던 여자야구선수들의 이야기다. 포수 도티와 투수 키트 자매는 여자 프로야구리그 출범을 앞두고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같은 팀에 입단한다. 키트는 리그 최고 선수로 꼽히는 도티를 질투하고 갈등 끝에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된다. 이후 두 사람은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우승을 두고 맞붙는다. <델마와 루이스>의 지나 데이비스와 팝스타 마돈나가 선수로 분했고 톰 행크스가 메이저리그 스타 출신 주정뱅이 감독 역을 맡았다.

 

실화‘였던’ 그들만의 리그

영화 속 여자 프로야구리그의 모티브는 1943년 출범한 전미여자프로야구리그(All-American Girls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AAGPBL)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선수가 징집돼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했다. 여자 프로야구리그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탄생했다.

시카고 컵스의 구단주 필립 K. 리글리가 리그 설립을 주도했다. 그는 브랜치 리키 등과 함께 이사회를 구성하고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스카우트를 파견하는 한편 트라이아웃을 열어 선수를 수급했다. 메이저리그 연고지가 아니었던 일리노이주 록포드(Rockford), 위스콘신주 레이신(Racine)과 케노샤(Kenosha), 인디애나주 사우스 밴드(South band) 4개 도시에서 원년 구단이 창단됐다. 이로써 4개 구단, 60명의 선수로 이뤄진 여자 프로야구리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43년 5월 30일 록포드와 레이신에서 개막전이 펼쳐졌다. 정규 시즌 108경기 끝에 전반기 1위 레이신과 후반기 1위 케노샤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고 레이신이 초대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그해 AAGPBL을 보러 야구장을 방문한 관중은 약 17만 명에 달했다. 인기에 힘입어 이듬해 리그엔 두 팀이 새롭게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에도 45만 관중을 기록하며 인기가 계속됐다. 1948년은 미국 여자야구의 화양연화였다. 그해 10개 구단으로 규모가 커졌고 91만 명이 야구장을 찾았다. 전성기를 맞은 여자야구는 쿠바와 남아메리카에서 포스트시즌 투어를 치르며 세계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복무를 마친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복귀하고 TV 중계가 시작되며 관중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작은 공과 넓은 내야, 오버핸드 피칭 등 소프트볼과는 구별되는 규정 탓에 소프트볼 선수 풀에서 야구 선수를 수급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관중 감소로 적자가 계속되자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는 구단주가 늘어났다. 내리막을 걷던 리그는 1954년 5개 팀으로 쪼그라들었고 결국 그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개인과 구조의 엇박자

AAGPBL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그라운드 안팎을 둘러싼 ‘금녀의 벽’을 허무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일본의 너클볼러 요시다 에리는 2008년 독립리그 신인 지명을 받으며 남자 선수들과 같은 무대에서 뛰었다. 한국에선 1999년 덕수고 투수 안향미가 대통령배 전국대회 4강전에 선발 등판하며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정식 경기에 출전했다. 지난해엔 서울대학교 투수 김라경이 4경기 동안 9.2이닝을 소화하며 엘리트 대학야구 최초의 여자 선수로 등장했다.

미국의 모네 데이비스는 지난 2014년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완봉승을 거뒀다. 소프트볼 선수 출신 알리사 내켄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코치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정식 여성 코치가 됐다. 지난해엔 양키스 부단장 출신 킴 응이 마이애미 말린스 단장에 오르며 여성 단장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개인’의 노력에 의한 성과였다. 개인을 뒷받침할 여자야구의 구조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AAGPBL 이후 여자 프로야구리그가 자취를 감춘 미국에선 야구선수라는 꿈을 포기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모네 데이비스는 현재 소프트볼 선수로 전향했다. 올해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텍사스주 리틀 야구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 중인 엘라 브루닝 역시 데이비스와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여자야구는 사회인 리그 성격이 짙다. 프로는 고사하고 실업팀도 없기 때문에 본업이 따로 있는 선수가 대부분이다. 어린 선수들의 현실은 더욱 암울하다. 고등학교 여자 야구부가 전무한 탓에 리틀야구를 할 수 없는 중학교 3학년 이후 야구를 전문적으로 계속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이 4개 팀으로 이뤄진 여자프로리그(일본여자야구리그, JWBL)를 운영하고 있다.

 

야구선수라는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과거 AAGPBL엔 성차별이라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사무국은 선수들에게 야구 실력 외에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요구했다. 선수들은 연습 후 매력 학교(Charm School)에서 사교 예절과 화장법, 머리 손질법 등의 이른바 ‘뷰티 루틴’을 배워야 했다. 흡연과 음주는 금지됐으며 외출은 구단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됐다. 구시대적이고 차별적인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하나 있었다. 여자 선수들이 야구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인식은 조금씩 바뀌었고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됐다. 그러나 그들이 치고 달리는 환경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요시카 에리를, 김라경을, 모네 데이비스를 보며 꿈을 가질 수는 있지만 꿈을 펼치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꿈의 구장>은 30년 만에 현실이 됐다. 반면 <그들만의 리그>는 여전히 영화 속 이야기로 남아있다. 꿈의 구장 프로젝트는 흥행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영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여자야구 문제는 다르다. 여자 선수들이 록포드나 레이신의 야구장에서 몇 경기한다고 해서 그들의 꿈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선 이벤트성 현실화를 넘어선 장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여자 선수들에게 꿈을 이룰 기회를, 야구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터전을 가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야구에는 우는 거 없어(There’s no crying in baseball)!”라는 극 중 톰 행크스의 명대사처럼 더 이상 야구를 한다는 이유로 슬퍼해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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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작소 김진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김준업, 전언수

자료 참고 = AAGP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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