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잠실 구장에서 펼쳐진 와일드카드 1차전은 LG가 4-3으로 승리했다.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와일드카드 경기는 4위팀이 무승부만 거둬도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대치 상태가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LG 선수들이 15회 초를 무실점으로 막은 뒤 끝내기(?)의 기쁨을 만끽하는 진풍경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날 경기 도중에는 비가 내렸다. 뒤에 비가 그치면서 경기가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큰 폭우가 계속되었다면 어땠을까?
일반적으로 정식경기가 성립되는 5회 이후에 콜드게임이 선언될 경우 그 시점의 점수 그대로 승패를 가른다. 이는 점수가 같아서 무승부가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야구규칙 7.01(c), (d)>
한 가지 예외는 서스펜디드(일시정지) 경기가 선언되는 경우다. 서스펜디드 경기는 콜드게임이 된 경기를 그 상태 그대로 일시정지한 다음 다른 날에 다시 그 시점부터 경기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이번 와일드카드 1차전에서는 7회를 제외한 모든 이닝은 서스펜디드 요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7회를 제외한 이닝, 가령 8회에 강우콜드가 선언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3 동점이었으므로 무승부가 된다. 그리고 키움은 다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 탈락한다.
다행히 올해는 이런 불상사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와일드카드 경기에 태풍이 들이쳐 강우콜드를 선언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날씨 무승부로 탈락하게 된 5위팀은 물론이고 승리한 4위팀조차 떨떠름할 것이다.
심판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심판은 와일드카드 경기에 한해서 보다 엄격한 강우콜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그렇게 할 근거는 무엇인가? 역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올해 와일드카드 경기는 무승부=패라는 특수한 상황의 빈틈이 보인 순간이다. 유사한 상황에서 실제 법이 적용되는 사례를 살펴보고 빈틈을 막을 실마리를 찾아보자.
법에서는?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내려지는 선고(‘강우콜드’)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그리 큰 것은 아니나 그 선고를 받는 개인(‘5위팀’)에 한해서는 무척 큰 영향(‘와일드카드 탈락’)을 미치는 경우다.
공직선거법 264조에서는 선거 당선인이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49조를 위반해 벌금 100만원 이상을 선고받을 경우 해당 직을 박탈하도록 규정한다. 나용찬 전 괴산군수는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고 2017년 4월 중도 퇴진했다. 이재수 현 춘천시장은 마찬가지로 선거법을 위반했으나 올해 1월 대법원에서 벌금을 90만원으로 확정해 시장직을 유지했다. 일반인에게는 60만원의 차이지만 이를 경계로 나용찬 씨는 전 군수가 되었고 이재수 씨는 현 시장이 된 것이다.
개인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을 얼마나 감안할지는 판사의 재량이다. 다만 재량의 발휘에도 어느 정도 기준이 있다. ‘양형인자’라는 것이다.
양형인자
양형인자는 양형, 다시 말해 형벌의 양을 결정하는 요인(인자)을 말한다. 형량 결정에 가장 크게 고려되는 중요한 요인을 ‘특별양형인자’라고 하고, 특별양형인자에 의해 결정된 범위 안에서 세부적인 조절에 활용하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요인을 ‘일반양형인자’라고 한다.
둘은 다시 각각 ‘행위 인자’와 ‘행위자/기타 인자’로 구분된다. 대법원 소속의 ‘양형위원회’에서는 행위 인자를 ‘범죄행위 자체에 관련되는 요소’, 행위자/기타 인자를 ‘범죄행위가 아닌 피고인 본인과 관련된 요소 및 범행 후의 정황에 관련되는 요소’로 설명한다. 아래 선거법의 예시를 본다면 일반양형인자에서 범죄에 ‘소극 가담’한 것은 범죄 자체와 관련된 것이므로 행위 인자이고, ‘진지한 반성’을 한 것은 범죄 자체와는 무관하므로 행위자/기타 인자가 된다.
<2020 양형기준 p.324>
와일드카드 경기로 돌아가자. 판사는 심판이다. 피고인은 키움이다. 죄는 없지만 포스트시즌에 5위로 올라간 게 죄다. 강우콜드라는 판결을 내림에 있어 판사가 고려해야 할 양형인자는 무승부=패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이 양형인자는 어디에 포함되어야 할까?
먼저 강우콜드 결정에서 무척 중요한 요인이므로 특별양형인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비와 관련된 요인이 아니라 키움 개인과 관련된 요인이므로 행위자/기타 요인이다. 강우콜드를 덜 선고하게 하는 요인이므로 ‘감경 요소’이며, 양형인자를 반영한 최종 판결은 “강우콜드를 선언하지 않는다.”였다.
<무승부=패 양형인자 정리>
물론 실제로 비가 아주 많이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설령 많이 왔다고 하더라도 평소와 다르게 강우콜드를 선언하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도 어느 정도 근거 있는 판단이었던 셈이다.
재량 살리기
이미 법전이 있음에도 다시 국가에서 양형위원회를 만들어 양형인자를 제시하는 이유는 판결에서 재량의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의 경우처럼 명확한 혈중 알코올 농도 기준이 있으면 그대로 적용하면 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개별 사항에 대해 일일이 명확한 기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판사의 양심과 재량에 의존하게 된다.
야구도 같다. 야구 규칙이 경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명시할 수 없으므로 야구 규칙8.01(c)에서는 “각 심판원은 이 규칙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항에 관해서는 재량에 의하여 재정을 내릴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심판이 재량껏 판단하되 책임도 심판이 진다. 남은 사람들이 할 일은 재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재량의 책임은 심판이 지는 것이지만 져야 할 책임이 과도하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와일드카드 경기에서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고 한들 강우콜드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명백히 선언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 뒤에 직면할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워 경기를 강행했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심판이 재량을 합리적으로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인 것이다.
필자는 심판이 보다 합리적으로 재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와일드카드전(또는 포스트시즌)에는 정식경기 성립 후 콜드게임 시 항상 서스펜디드 경기로 처리하도록 제안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 크게 3가지 장점이 있다.
1. 구체적으로 언제 콜드게임을 선언할지는 지금까지처럼 심판의 재량에 맡기면 된다.
2. 심판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우에 비교적 부담 없이 합리적으로 콜드게임을 선언할 수 있다.
3. 시간당 수십 mm의 폭우와 같이 물리적으로 콜드게임을 선언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뒷처리 과정이 깔끔해진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다 보면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번 경우에는 다행히 문제가 문제가 되기 전에 발견했다. 2021년에는 보완된 제도를 볼 수 있길 바란다.
야구공작소 오연우 칼럼니스트
에디터=야구공작소 한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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