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양정웅]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Doha)를 1993년 가을에 집필된 한 편의 최루성 드라마로 기억할 것이다. 경기 종료 10초 전에 터진 이라크 선수의 기적 같은 골 하나 덕분에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고 그 기세를 몰아 2002년 월드컵 유치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한국 축구를 살린 ‘도하의 기적’이었다.
반면 대한민국 야구팬들은 도하를 2006년 가을에 집필된 한 편의 새드 엔딩 드라마로 기억한다. ‘2등은 꼴찌와 똑같다’고 할 수 있는 아시안게임 야구에서 과정이나 결과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게 동메달을 걸었다는 것은 선수단과 팬 모두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한국 야구를 울린 ‘도하의 비극’이었다.
특히 12월 2일에 열린 일본과의 경기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대표팀은 절대 지면 안되는 경기에서 4대0으로 리드를 잡고도 3회와 4회 갑자기 무너지며 역전을 허용했다. 경기 후반 뒷심을 발휘하며 7대7 동점을 만들었지만 결국 9회말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7대10 패배를 기록했다. 아시안게임 3회 연속 금메달 획득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오뎅환’의 탄생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당시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돌던 일본 대표팀 선수들의 직업명단.
훗날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거짓 직업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당시의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 사진 = 인터넷 커뮤니티 캡쳐
일본전의 패배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정예멤버를 상대로 2승 1패를 기록하며 한국 야구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린 지 고작 반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프로 하나 없는 일본에게 패했다는 것이 선수단에게는 당시 故 송인득 아나운서의 경기 종료 멘트처럼 “혀를 깨물고라도 죽고싶은 심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특히나 WBC에서 철벽 구원투수로 자리잡은 오승환이 흔들린 것은 경기 직후 <무한도전>에서 나온 유재석과 나경은의 교제 발표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승환은 이 경기에서 3번타자 초노 히사요시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는데, 당시 이 선수의 직업이 ‘신주쿠 길거리 오뎅장사’로 알려지며 ‘오뎅환’이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얻었다. 이는 한 네티즌이 장난으로 만든 ‘직업 명단’이 사실인 것처럼 잘못 알려진 탓이었다. 어묵장수로 알려졌던 초노 히사요시는 이후 프로에 입단해 2010년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신인왕을 수상했고, 사실 관계도 자연스럽게 바로잡혔다.
그러나 그 때의 오승환은 초노가 정말로 어묵장수였어도 무너졌을 만큼 지친 상태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의 눈물
오승환은 KBO 리그 최고의 마무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몸상태와 상관없이 태극마크를 다는 날도 많았다. / 사진 = 삼성 라이온즈 제공
오승환은 2006년 3월 제1회 WBC에 참가했다. 당시 그가 4경기에서 투구한 3이닝은 적다면 적은 수치이다. 그러나 오승환은 그 3이닝을 위해 보다 일찍 페이스를 끌어올려야 했다. 대표팀 소집으로 인한 후유증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페넌트레이스를 소화할 몸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승환은 2006시즌 내내 굳건하게 삼성 라이온즈의 뒷문을 지켰다. 63경기에서 79.1이닝을 소화하며 47세이브로 아시아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작성했다. 역대 최고의 조정 수비무관 평균자책점(FIP+)을 기록했으며(593.6, 70이닝 이상), 10번의 2이닝 이상 경기는 당시 세이브 2~4위였던 박준수, 정재훈, 구대성의 그것을 합친 것과 같은 수치였다.
그렇지만 오승환의 2006년은 페넌트레이스로 끝이 아니었다. 한화 이글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5경기에 나와 8이닝을 던지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열흘 가량의 휴식 뒤에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코나미컵에도 나와 1이닝을 던졌다. 이 시점까지 오승환이 국제대회와 페넌트레이스, 한국시리즈에서 던진 이닝의 총합은 90.1이닝. 전문 마무리로는 상당히 많은 이닝이었다.
땀흘리는 돌부처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 대표팀의 연습경기.
이때 불안한 모습을 보인 오승환은 결국 아시안게임에서 무너졌다. /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사실 오승환은 한국시리즈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한화 백업 포수 심광호에게 홈런을 허용하더니 6차전에는 9회 2개의 볼넷과 내야안타로 1사 만루를 만든 끝에야 겨우겨우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오승환이 페넌트레이스에서 3번 이상의 출루를 허용한 경기는 단 5번뿐이었다.
혹사 앞에 장사 없었다. 코나미컵이 끝난 후 불과 닷새 뒤에 대표팀에 합류한 그는 LG 트윈스와의 연습경기에서 홈런과 펜스 직격 2루타를 허용하며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언론에서도 체력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시안게임이 시작됐다. 대만과의 첫 경기에서 오승환은 4대2로 뒤진 9회초 1사에 등판했다. 나오자마자 안타 하나를 허용하면서 우려를 낳았지만 장젠밍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니, 보여주는 듯 했다.
불운에 울어야했던 일본전
일본과의 풀 리그 2차전, 2006 페넌트레이스 MVP 류현진은 3회 상대한 8타자 중 7타자를 루상에 내보내며 4대0의 리드를 한순간에 날리고 마운드를 떠났다. 류현진을 구원한 우규민과 이혜천은 각각 아웃카운트 한 개만을 잡고 내려갔고, 이로 인해 뒤이어 나온 윤석민은 혼자 3.2이닝을 던져야만 했다. 그리고 7회말 2아웃에서 주자 두 명을 남겨두고 내려간 윤석민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온 투수는 바로 마무리 오승환이었다.
그러나 오승환도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좁아진 스트라이크 존에 흔들린 그는 볼넷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등판하자마자 첫 타자에게 볼넷. 다음 타자를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고 이닝을 마쳤지만 8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처음 4명의 타자에게 3개의 볼넷을 허용했고, 여기에 7회와 9회에 기록한 하나씩의 볼넷을 더해 오승환은 이 경기에서 총 5개의 볼넷을 기록했다.
2005년 데뷔 후 한국에서의 아홉 시즌 동안 오승환의 한 경기 최다 볼넷은 3개였다. 이날 야구를 본 팬들은 희귀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삼진과 포수 뜬공으로 1사 만루의 위기를 넘겼지만 정상 컨디션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운명의 9회말. 8회까지 이미 42구를 던졌지만 오승환을 구원할 투수는 없었다. 선두타자 볼넷, 그리고 희생번트로 1사 2루. 여기서 오승환은 2번타자 요시무라 다카시에게 내야뜬공을 유도했다. 하지만 경기가 열린 알 라얀 야구장에는 경기 내내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유격수 박기혁은 이 공을 잡지 못했다. 비어 있던 1루가 채워졌다. 타석에는 어묵장수가 아닌 일본 사회인야구 최고의 타자 초노 히사요시.
그리고 야구 대표팀은 멸망했다. 2구째 오승환이 던진 한가운데 슬라이더는 초노의 방망이에 맞고는 바람을 타고 우측 펜스 너머로 가 버렸다. 7대10, 일본의 승리였다.
다시 생각해야 할 오승환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이 열린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도하의 비극’은 2008년 베이징과 2015년 도쿄에서의 극적인 승리로 인해 잊히고 있다. 그날 오승환이 맞았던 홈런 한 방도 기억의 담장을 넘어가 사라졌다. 한국과 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구원투수가 된 지금의 오승환에게 그때의 아픔은 젊은 날의 시행착오 정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홈런은 그저 웃음거리로만 치부하기엔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다. 24살의 젊디젊은 투수였던 오승환이 끝내 무너진 것은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人災)’였다. 위기가 있었지만 끝내 부활한 오승환이기에 그저 희화화되는 것으로 그쳤지만, 실은 그 역시 혹사로 사라진 여러 선수들의 발자취를 따라 갈 뻔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그저 너무 잘 던진 것뿐이었다. ‘오뎅환’이라는 별명 안에는 불펜 에이스로서의 책임감과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어묵 국물처럼 진하게 배어 있다.
기록 출처 : STATIZ.com, KBO 연감
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