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려고 하는 ‘여우’

 

[야구공작소 양정웅] 1980년대 어느 날 대구 시민야구장, 경기는 8회로 접어들었다. 당시 구심의 볼 판정에 양 팀 선수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경기장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그 분위기 채로 경기는 8회에 접어들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마운드엔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에이스 김시진이 있었다. 포수 마스크는 그의 절친인 이만수가 쓰고 있었다.

사건은 이때 터졌다. 김시진에게 높은 볼을 요구한 이만수가 공을 잡기도 전에 미트를 내려버린 것이었다. 공은 구심이던 최화용 심판의 가슴팍으로 향했고, 100km/h가 넘는 공에 정통으로 맞은 최 심판은 그대로 쓰러졌다. 급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최 심판은 퇴장 콜도 외치지 못한 채 대기심과 교체돼 경기장을 떠났다. 이후 사연을 들은 심판진의 ‘단체행동’까지 나오며 결국 이만수는 심판진에게 사과했다.

 

 현역 시절 이만수의 수비 장면(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2018년 4월 10일, 그 날과 같이 공교롭게도 대구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 두산의 포수 양의지는 7회 초 타석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구 바깥쪽 변화구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중계화면 상의 투구추적시스템에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투구로 나타났다. 타자석을 벗어나 무언의 항의를 했던 양의지는 결국 어정쩡한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며 타석을 마쳤다.

그리고 7회 말, 30여 년 전 사건이 재현됐다. 투수 곽빈의 연습 투구를 받던 양의지가 갑자기 볼을 피해버린 것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양의지의 뒤에 있던 정종수 구심의 다리에 맞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김태형 감독이 곧바로 양의지를 불러 주의를 주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양의지는 고의가 아니었다고 항변했지만, 벌금 300만 원과 봉사활동 80시간의 징계를 받았다.

위와 같이 이만수와 양의지는 ‘볼 패싱’ 의혹을 산 행위로 곤욕을 치렀다. 이런 구설수만 비슷한 것은 아니다. 두 선수 모두 당대 최고의 포수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최상위권의 타격을 자랑하는 선수란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공통점을 들자면, 삼진을 적게 당하는 포수라는 것이다.

 

이만수는 공갈포다?

1983년, 지역 어린이 팬들을 위해 ‘홈런교실’을 열었던 이만수(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포수라고 하면 왠지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백두산 같은 선수가 떠오른다. 프로레슬러나 록 밴드의 드럼 연주자 같은 체형을 가지고 한 방을 노리는 듯 큰 스윙으로 일관하는 그런 선수 말이다. 물론 이만수에게도 이런 이미지가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 이만수는 큰 스윙으로 홈런만을 노리는 ‘공갈포’ 같은 선수였다.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큰 스윙을 해 ‘탈모왕’이라는 별명이 있던 홈런 라이벌 김봉연처럼.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김봉연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홈런보다 삼진이 적은 홈런왕이었다(1982년 홈런 22개, 삼진 16개). 이만수 역시 꾸준하게 적은 삼진을 기록한 타자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림1) 1982~1997시즌 리그 평균 삼진율과 이만수의 삼진율 비교(기록=STATIZ)

 

이만수의 전성기인 1980년대는 전체적으로 삼진이 적은 시대였다. 2014 ~2017시즌 KBO 리그 삼진율은 17.5%였다. 그런데 이만수가 골든글러브 5연패의 업적을 이룩한 1983~1987시즌 동안엔 10.7%밖에 되지 않았다. 규정타석을 채우고도 한 자릿수의 삼진을 기록한 선수가 나오기도 했다(1988 김일권 343타석 8삼진).

그중에서도 이만수는 삼진을 적게 당하는 편에 속하는 타자였다(그림1 참고). 특히 그가 3년 연속 홈런왕을 달성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 놀라운 수치다. 1987년에는 18홈런으로 리그 홈런 2위에 오름과 동시에 최저 삼진 10위를 기록했다(300타석 기준). 그보다 삼진을 적게 당한 타자 9명의 홈런 총합은 22개였다. 1991년에는 개인 최다인 446타석에 들어서 17홈런-27삼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뽐냈다.

 

 그림2) 이만수와 당대 주요 포수(장채근, 유승안, 김동기)의 삼진율 비교(기록=STATIZ)

 

당대 이만수와 경쟁하던 포수들과 비교하면 더욱 빛이 난다.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유승안과 장채근, 김동기가 단 한 시즌도 이만수보다 낮은 삼진율을 기록하지 못했다. 한 시즌에 40삼진 이상 당해본 적 없는 장효조와 비교할 순 없지만, 이만수의 활약은 이를테면 ‘마스크 쓰고 홈런 잘 치는 장효조’라도 봐도 무방하다.

 

 

여우같이 삼진을 당하지 않는 양의지

 올 시즌 폭발적인 활약으로 FA 초대박을 향해 가는 양의지(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은 현역 시절 삼진을 잘 당하지 않았다. 테이블세터로 주로 나서면서 40삼진 이상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코스로 던져도 삼진을 잡기 어렵다는 인상이었다. 상대하는 투수에겐 얄미운 여우 그 자체다. 그런데 2010년대에 나타난 ‘곰의 탈을 쓴 여우’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양의지는 6월 14일까지 타율 0.399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떡상’ 중이다. 시즌이 시작하고 두 달 동안 가장 낮은 타율이 0.381(4월 18, 19일)일 정도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근 20년간(1999~2018년) 양의지보다 오랜 기간 4할을 유지한 선수는 2012시즌 김태균과 2014시즌 이재원 두 명뿐이다. 이 기세라면 이재원이 기록한 포수 최장기간 4할 타율 (2014 시즌 팀 75경기), 그리고 이만수의 포수 최고 타율(1987시즌 0.344)도 깰지 모른다.

 

 그림3) 2010~2018시즌 리그 삼진율과 양의지의 삼진율 비교(기록=STATIZ)

 

그림3)에서 볼 수 있듯 양의지는 주전으로 등극한 2010시즌 이후로 꾸준히 리그 평균보다 삼진을 적게 당하는 타자였다. 하지만 2010시즌 20홈런 이후로 이렇다 할 장타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똑딱이’로 남는 듯했다. 반전은 2015시즌에 일어났다. 삼진율이 리그 평균 수준으로 올랐지만, 홈런이 작년보다 두 배나 늘어났다(2014년 10홈런 → 2015년 20홈런).

더 놀라운 일은 2016시즌에 일어났다. 홈런은 커리어 하이를 찍으면서(22홈런) 삼진율을 놀라운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마스크를 쓴 이용규’라고 할 수준이다(이용규 통산 삼진율 8.8%). 2017시즌 후반기엔 사구 여파로 잠시 주춤했지만 이번 시즌도 순항하고 있다. 순장타율(장타율-타율) 0.268을 기록하면서 삼진율을 다시 10% 이하로 낮췄다.

 

 그림4) 양의지와 2010년대 주요 포수(강민호, 이재원, 김태군)의 삼진율 비교(기록=STATIZ / *이재원, 김태군은 2013시즌 이후 비교)

 

양의지가 이만수의 ‘삼진당하지 않는 포수’의 타이틀을 이을 적자(嫡子)란 것은 동시대 포수들과 비교하면 확인할 수 있다. (그림4 참고) 양의지보다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강민호는 고정 클린업이 된 2012시즌 이후 삼진이 급상승했다. 컨택에 특화된 이재원과 ‘똑딱이’인 김태군 역시 양의지보다 삼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만수가 장효조와 비견된다면, 2015시즌 이후의 양의지는 ‘발 느린 정근우’나 ‘홈런 적은 김현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적은 삼진=최고 포수’는 아니지만…

물론 삼진이 적은 것이 포수의 덕목은 아니다. KBO 리그 통산 삼진 1위의 박경완(1,605삼진), 2010년대 삼진 3위 강민호(775삼진)를 두고 “삼진이 많으니 수준 낮은 포수다”라고 하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만수나 양의지가 삼진이 적었던 시즌에 무조건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 두 선수는 후대에 남을 만 하다. 이만수의 시기에는 김경문이나 김용운, 양의지의 시대에는 이지영이나 김태군 같은 포수들이 삼진을 적게 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삼진을 줄이면서 장타력을 포기했다. 반면 이만수와 양의지는 20홈런을 거뜬히 칠 수 있는 파워까지 갖춘 선수다.

이만수와 양의지, 두 선수는 현시점에서 어마어마한 기록의 차이가 있는 선수들이다. 그리고 공포의 풀스윙으로 놀라운 컨택 능력을 보인 이만수와 모든 공을 다 쳐 낼 듯 부드러운 스윙을 보여주는 양의지의 스타일은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지금 양의지가 걷고 있는 길은 이만수가 걸었던 길과 비슷하다. 타격에서 절정의 기량을 보이는 양의지는 이만수를 따라잡고 ‘신’의 영역에 오를 수 있을까?

 

기록=STATIZ / 6월 14일 기준

에디터=야구공작소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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