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양정웅]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대를’
– 김광석 ‘그날들’ 가사 중
이제 갓 20대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 김광석과 최동원은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름이다. 김광석 노래를 들으면, 혹은 최동원의 열정을 떠올리면 괜스레 눈물이 난다는 내 앞 세대의 말에 직접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도 두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그에 못지 않게 각별하다. 특히 내가 4살 때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김광석과는 달리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생존했던 최동원에 대한 기억은 몇 가지가 있다.
2004년 <브레인 서바이버> 출연 당시의 최동원 (사진=프로그램 캡쳐)
그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2004년쯤이다. 당시 인기 예능이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일밤) ‘브레인 서바이버’의 2004년 프로야구 개막특집에서였다. 양준혁, 장종훈, 정수근, 홍성흔 등 당시의 현역선수들과 함께 최동원이 나왔다. 차명석이나 이병훈이 뭔가 솔직하지만 부드러운 느낌이었던 반면, 본인의 외모 자랑에 MC가 태클을 걸자 “있는 이야기 좀 다했는데 왜 짜증을 내요?”라면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던 그의 순수한 모습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05년, 내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보러 다니기 시작할 때 실제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한화 이글스의 사직 원정 경기, 왜인지는 몰라도 최동원 당시 투수코치가 1루 쪽(정확히는 지금의 홈팀 불펜 자리)으로 왔었다. 지금은 야구장에 비어걸들이 돌아다니지만 그때만 해도 월드콘이나 새우탕면을 파는 ‘아지매’들이 있었다. 최동원은 그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이고 마 최동원씨 얼굴이 훤하네예!”
“요새 운동 좀 열심히 한다 아입니꺼”
“최동원씨 꼭 롯데 돌아오이소”
“예예”
나도 질 수 없었다.
“최동원 코치님 저 중학생인데 코치님 팬입니다”
“중학생?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이”
그리고 최동원은 3루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와 나눠본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2011년 벌어졌던 ‘레전드 리매치’ 당시 경남고 감독이었던 허구연 (사진=중계화면 캡쳐)
대학에 입학한 2011년, ‘레전드 리매치’라는 이름으로 군산상고 출신과 경남고 출신 선수들이 맞붙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과감히 부산에서 서울까지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무궁화호를 타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 경기를 보러 갔다. 그런데 당연히 선발일 줄 알았던 최동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선발은 조계현 vs 박보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왜 그가 등판하지 않는지는 모른 채 “마 허구연! 최동원 등판 안 시키나!” 하고 외쳤던 기억이 난다.
2011 ‘레전드 리매치’ 경기 전 행사. (사진=양정웅)
경기가 끝나고 서울에 살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친구가 “야 최동원 암이라던데?”라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아침에 배달된 스포츠신문을 봤다. 그의 얼굴은 핼쑥했으며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누가 봐도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하고도 그는 “산에서 식이요법으로 체질을 바꾸고 있다. 등판해야 되는데 허리를 삐끗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는 진실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그가 대중들에게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2011년 9월 14일. 최동원은 세상을 떠났다. ‘그대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이렇듯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가 유독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오늘은 최동원이 살아있었다면 61세 생일, 즉 환갑이 되는 날이다.
에디터=야구공작소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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