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마운드를 떠나는 데이브 리게티 코치(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2017년 10월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투수코치로 기억될 데이브 리게티 코치가 현장에서 물러났다. 2000년부터 작년까지, 리게티 코치의 18년은 프랜차이즈 역사에서 코치가 재직한 임기로 두 번째로 길고 투수코치로는 최장이다.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라는 최악의 성적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됐지만 2017년에 있었던 일이 모두 리게티 코치 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를 단장 특별 보좌로 영전시킨 바비 에반스 단장도 공식적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인적쇄신’ 을 이유로 내세웠을 뿐 그의 탓을 하진 않았다. 실제로 헨리 뮬렌스(現 벤치 코치), 론 워터스(現 3루 코치) 등 함께 비판 받은 코치들도 물러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결국 현장에 남아 있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물러난 ‘올드 스쿨’ 코칭스태프는 리게티 혼자였다. 이에 대해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남은 두 코치는 곧 은퇴 예정인 브루스 보치 감독의 뒤를 잇는 감독 후보 0순위들이기에 이해의 여지가 있다.
이렇게 18년간 이어졌던 데이브 리게티 시대가 다소 껄끄럽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은 화려하고 특별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본다.
화려했던 뉴욕 양키스의 올스타 투수, 고향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다
화려했던 양키스 시절 ‘선수’ 데이브 리게티(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현역 시절 리게티는 뉴욕 양키스에서 선발로서 신인왕을 수상하고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으며 마무리로는 세이브왕까지 차지한 올스타 투수였다. 반면, 샌프란시스코는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40년간 쓰던 캔들스틱 파크를 벗어나 퍼시픽 벨 파크(現 AT&T 파크, 이하 편의상 AT&T 파크로 통칭)로 이전해 새로운 구장과 함께 새 시대를 열고 싶어 했다.
당시 연고지 산호세 출신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뛴 경험(1991~1993시즌)이 있는 그가 브라이언 세이빈 단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구단은 고령의 론 페라노스키 투수코치(당시 63세)를 단장 특별 보좌로 영전하고 젊은 리게티(당시 41세)를 후임으로 낙점했다. 18년 뒤 비슷한 이유로 물러나게 된 그를 보면 묘한 장면이다. 물론 구단이 단순히 젊고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경험이 일천한 그에게 코치를 맡긴 것은 아니었다. 선발과 마무리에서 준수한 성적(82승 252세이브)을 거뒀던 그가 투수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끼칠 것이란 기대가 있었고, 그는 18년간 3명의 감독과 함께 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18년
1기 – 더스티 베이커 감독 시절(2000~2002시즌)
1기 시절 최고의 역작 숀 에스테스(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1993년부터 시작된 베이커 감독 체제가 배리 본즈, 제프 켄트, J.T. 스노우가 포진한 강타선과 함께 보여줄 결과물에 적잖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강타선으로 화제를 몰고 다닌 샌프란시스코였지만 젊은 피 3인방(리반 에르난데스, 러스 오티즈, 커크 루이터)과 최고의 마무리 롭 넨을 위시한 투수들의 선전이 더 돋보인 팀이었고, 여기에 2001년 트레이드로 합류한 제이슨 슈미트는 화룡점정이었다.
리게티 부임 이후 팀 투수진의 성적은 소폭 개선됐다. 새로운 홈구장 AT&T 파크가 투수 친화적이었던 덕이 있긴 했지만, 좋아진 성적은 리게티의 지도력이 나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베이커 감독 시대에 리게티 코치가 이뤄낸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숀 에스테스였다. 1997년 19승 ERA 3.18을 기록하며 에이스 노릇을 하던 에스테스는 결정구인 커브로 탈삼진을 즐겨 잡던 투수였다. 하지만 그 후 잦은 부상에 시달려 본래의 스타일을 유지하긴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그것을 고집해 성적은 더욱 안 좋아졌다.
리게티는 에스테스가 더 이상 삼진에 집착하지 않길 바랐고 베이커 감독과 꾸준한 설득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0년 NLDS 2차전에서 발목 부상을 계기로 에스테스는 완전히 삼진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이렇게 바뀐 스타일로 에스테스는 6월 중순까지 6승 2패 ERA 2.41을 기록하며 산뜻한 출발을 했고, 승운은 없었지만 9승 8패 ERA 4.02로 부상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프로에서 선발투수로 전향한 뒤 어깨 부상과 부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조 네이선에게 투심 패스트볼 대신 포심 패스트볼을 권하면서 불펜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 또한 리게티 코치였다. 하지만 팀은 막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한 그를 A.J. 피어진스키의 대가로 미네소타 트윈스에게 넘겨주면서 2008년 브라이언 윌슨이 등장할 때까지 마무리 공백에 시달리게 된다.
2기 – 펠리페 알루 감독 시절(2003~2006시즌)
에이스로 다시 태어난 제이슨 슈미트(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10년 가까이 오로지 우승을 위해 달리고 팜을 황폐화시킨 대가는 참혹했다. 타선은 노쇠화됐고 2002년 월드시리즈 멤버 중 건재한 선발은 슈미트 1명뿐이었다. 어린 투수들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던 선수들도 성장할 틈 없이 트레이드되어 다른 팀으로 떠났다. 리게티의 품에 남은 씨앗은 많지 않았다. 드래프트 1라운드 출신 유망주는 맷 케인, 노아 라우리, 브래드 헤네시, 제롬 윌리엄스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케인과 라우리를 제외한 다른 둘은 부상과 부진으로 빠르게 정상 궤도에서 이탈했다. 이 시기 꾸준히 제 몫을 한 건 베테랑 슈미트, 루키 케인과 라우리 정도였다.
2001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하기 전 49승 53패 4.58 ERA를 기록하는 데 불과했던 평범한 투수 슈미트는 사이영 상 2위에 오를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변신의 비결은 극단적인 투수 친화적 구장이었던 AT&T 파크와 리게티 코치의 조언이었다. 리게티는 메이저리그의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홈런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지론을 고수했다. 이것을 가장 잘 받아들인 선수가 슈미트였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변화구를 선택하고 정면 승부를 피하던 그는 홈구장의 변화와 리게티의 조언에 힘입어 적극적인 패스트볼 승부를 하기 시작했고, 예전과 달리 효율적인 투구를 하게 됐다.
훗날 샌프란시스코의 첫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케인도 이 시기 리게티 코치의 도움을 받아 날개를 활짝 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케인은 포심 패스트볼과 파워 커브라는 2가지 무기를 주로 던지고 있었다. 리게티 코치와 구단 수뇌부는 케인을 마이너리그에서 더 경험을 쌓게 할지, 아니면 메이저리그에 남길지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놀랍게도 21세 남짓했던 케인이 이 회의에 참석해 직접 발언권을 가졌고 여기서 리게티 코치는 체인지업 장착을 권유했다. 이후 메이저리그에 잔류한 케인은 리게티의 지도 하에 투구폼을 교정하고 체인지업을 연마했고, 6년 후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올스타 투수로 거듭났다. 햇병아리 투수를 회의에 참여하도록 한 브라이언 세이빈 단장의 개방적인 태도, 리게티가 코치 생활 내내 강조한 ‘프로다움’을 실천해낸 어린 케인의 성숙함이 돋보인 장면이었다.
3기 – 브루스 보치 감독과 함께 한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2007~2014시즌)
최고의 파트너 브루스 보치와 함께(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 부임한 브루스 보치 감독은 리게티 코치에게 투수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유망주들과 함께 8년 간 두 번의 지구 우승과 세 번의 내셔널리그 우승,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냈고 한 번의 퍼펙트게임과 네 번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이 기간 팀 ERA 리그 전체 1위 1회(2010년), 2위 2회(2009, 2011년), 10위 이내 2회(2012, 2014년)를 기록했고, 같은 시기 리그 전체 3위의 평균자책점(ERA 3.73), 선발투수 평균자책점 전체 4위(ERA 3.84), 불펜 투수 평균자책점 전체 공동 3위(ERA 3.50)로 고르게 좋은 성적을 냈다. 현역 시절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다양한 보직을 고루 겪은 리게티 코치의 경험과 지도력이 뛰어난 유망주들을 만나 빛을 발한 때였고, 그 또한 이 시기의 제자들을 18년 임기 중 최고로 쳤다.
찬란한 영광의 시절이지만 리게티의 코칭 결과물에는 명암이 갈린 시기이기도 했다. 드래프트에서 낮은 순위에 지명됐던 브라이언 윌슨과 세르지오 로모는 리게티의 지도 속에 최고의 마무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이 돋보였던 배리 지토와 팀 린스컴은 끊임없는 하락세를 겪었다.
2번의 우승을 견인한 마무리인 윌슨과 로모는 구위가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스타일의 투수였다. 윌슨은 제구는 불안하지만 빠른 패스트볼과 커터가 인상적인 투수였고, 로모는 구속은 느리지만 안정적인 제구와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것 같은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다.
2008년부터 마무리 기회를 얻기 시작한 윌슨은 빠른 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우타자의 몸 쪽에 자신의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해결책으로 리게티는 투심 패스트볼의 빈도를 좀 더 높이길 권했고 그 후 윌슨은 우타자를 상대로 많은 땅볼을 유도해낼 수 있었다.
로모는 윌슨과는 다르게 패스트볼이 강점인 투수는 아니었지만 더욱 안정적인 제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게티는 그 점을 눈여겨봤다. 그는 투수들에게 가장 최고의 공은 정확한 위치에 꽂히는 로케이션과 완급 조절이 되는 공이라 가르쳤다. 로모는 이 점에서 가장 뛰어났던 투수였다. 비록 시속 90마일 언저리의 평범한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구종을 원하는 위치에 속도를 조절해서 넣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게티는 같은 공이라도 위치, 속도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공이 된다고 말했고 그 때마다 예시로 나온 것이 로모였다.
반면, 지토와 린스컴은 갈수록 하락하는 패스트볼 구속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지토는 구속을 끌어올리기 위해 스트라이드 폭을 넓히며 공을 좀더 앞쪽에서 놓으려 했고, 린스컴은 체중을 조절하고 스트라이드 폭을 수정했지만 되려 구속의 증가는 없이 다른 구종의 제구력에 악영향을 미쳤다. 리게티는 지토의 시도가 구속을 늘리기는커녕 릴리즈 포인트가 낮아지기 때문에 커브의 제구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안으로 리게티는 투심 패스트볼 습득을 권했지만 지토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지토는 리게티의 걱정대로 구속이 줄어들고 제구력이 불안해지는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
린스컴과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들의 코치를 자처한 린스컴의 아버지인 크리스는 리게티의 지론에 반대되는 노선을 선택했다. 리게티는 무리한 삼진 욕심은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크리스는 아들이 삼진을 잡아야 하는 투수라고 생각했다. 꾸준히 관계가 좋지 않았던 둘은 린스컴의 성적이 나빠지는 상황에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린스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마지막 2년 동안 리게티와 크리스는 냉전을 벌였고, 이렇다 할 반등 없이 2년 연속 사이영 상에 빛나는 린스컴의 자이언츠 생활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4기 – Post 2014 월드시리즈(2015~2017시즌)
에이스 매디슨 범가너와 데이브 리게티(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짝수해 샌프란시스코’라는 별명이 탄생할 정도로 눈부셨던 5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전력 질주를 하는 동안 등한시했던 유망주 관리 문제가 알루 감독 시절처럼 다시 불거졌다. 2009년 1라운드에서 지명한 잭 휠러는 2013년 트레이드로 떠나보냈고 그 이후에는 이렇다 할 투수 유망주가 등장하지 않았다. 여기에 여러 불운이 겹치며 마운드가 붕괴했다. 2015년에는 150이닝 이상 소화한 선발이 범가너와 신인 크리스 헤스턴밖에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렸다. 2017년에는 외부에서 영입한 투수들이 대거 부진하여 규정이닝을 채우며 ERA 4.00 이하를 기록한 선발이 존재하지 않았다.
2016년 하반기에는 기록적인 연패 끝에 진출한 와일드카드를 기점으로 기존 코치들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 해, 기대 받은 베테랑 투수들의 극심한 부진과 불펜 투수들의 더딘 성장으로 인해 리게티 코치에 대한 비판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많은 투자를 했음에도 강점이었던 마운드가 약점으로 전락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부상과 부족한 유망주 자원 속에서도 2015년 헤스턴과 조시 오시치, 2016년 타이 블락과 데릭 로, 2017년 크리스 스트라튼과 카일 크릭이란 유망주들을 성공적으로 데뷔로 이끈 리게티 코치였기에, 프런트로 물러난다는 소식에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2번째 기회를 받지 못한 채 리게티의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팀은 3번의 우승에 대한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2014년 월드시리즈를 기점으로 매디슨 범가너가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이며 에이스로 거듭났다. 그는 18년 동안 다듬어진 리게티 야구론의 정수를 이어받은 선수라 말할 수 있다. 범가너는 그동안 리게티가 강조했던 프로다운 마인드, 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인 승부를 하는 강심장, 구속 대신 로케이션과 완급 조절을 무기 삼아 시속 90마일 초반의 빠르지 않은 공으로도 리그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범가너는 2012년 월드시리즈부터 에이스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리게티 코치의 지도가 있었다. 그해 범가너는 9월 들어 갑작스레 구속이 줄어들고 구위가 실종된 모습을 보였고, 9월 평균자책점 5.47을 기록한 데 이어 포스트시즌 첫 두 경기에서도 4.1이닝 4실점, 3.2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다. 많은 이들은 부상을 의심했지만 리게티는 포기하지 않고 비디오 분석을 통해 범가너의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찾아 나갔다. 결국 리게티는 전반기보다 범가너의 팔각도가 떨어졌고 과도하게 몸을 비트는 탓에 공이 타자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NLCS 1차전이 끝난 뒤 11일이란 시간 동안 둘은 불펜에서 투구폼 수정을 이어갔고, 그러한 노력 끝에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7이닝 무실점 승리를 거뒀다. 이후 범가너는 2013년부터 꾸준히 ERA 2점대를 기록했고 2014년 월드시리즈에서 압도적인 투구로 팀의 우승을 이끄는 등 강력한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씁쓸하게 막을 내린 리게티 코치 시대
이제는 볼 수 없을 덕아웃 풍경(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많은 우승을 일궈내고 좋은 투수들을 배출해낸 리게티 코치였지만 마무리가 아름답진 못했다. 프런트와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다른 코치들의 보직 문제로 많은 얘기가 있었다. 그의 퇴임을 주장하는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코치진의 올드 스쿨 스타일 지도 방식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올드 스쿨’이라 비판 받은 코치 중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리게티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리게티는 선수들이 분석을 필요로 할 때 가장 먼저 기댄 사람이었다. 리게티 본인 스스로 ‘분석 팀과 친밀하게 지낸다’고 밝혔고, 샌프란시스코 선수들 역시 인터뷰를 통해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왔다. 리게티는 휴스턴의 우승으로 세이버메트릭스를 내세운 지도 방식이 각광받고 있지만 올드 스쿨 스타일의 팀이라 해서 분석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이런 연유로 리게티의 퇴진은 다소 의아하게 다가오게 된다. 3년간 뜻하지 않은 부상 탓에 마운드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리게티의 입장에선 팀의 ‘영전’ 조치가 억울할 법도 했지만 이젠 자신의 방식이 옳았음을 증명할 길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리게티는 단장 특별 보좌라는 또 다른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단장 특별 보좌라는 직책은 공로를 인정받은 명예직에 가깝지만 현재 샌프란시스코는 바비 에반스 단장의 아쉬운 행보에 브라이언 세이빈 前 단장을 일선으로 복귀시키는 강수를 뒀다. 이에 세이빈과 함께한 리게티의 역할도 어느 정도 있을 거라 예상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후임 커트 영 투수코치는 그의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이러한 짐작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2000년 밀레니엄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찾아와 세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 한 번의 퍼펙트게임과 네 번의 노히트노런 기록 달성에 공헌한 데이브 리게티 투수 코치. 비록 메이저리그 꼴찌 팀의 투수코치로 불명예스럽게 현장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코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 mlb.com, 팬그래프닷컴, SFGATE, SF크로니클
야구공작소 김동윤
에디터=야구공작소 이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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