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과 야구에 대한 단상

[야구공작소 양정웅]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린 지난 10월 30일, 우리는 김민식에게 잡힌 김재호의 타구를 끝으로 2017시즌 KBO리그와의 이별을 맞이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영화 같았던 시즌은 결말까지도 드라마틱했다.

그리고 같은 날, 우리는 또 하나의 이별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5차전이 시작하기 30여 분 전에 전해진 비보. 바로 영화배우 김주혁의 사망 소식이었다. KBO리그 최대의 축제마저 잠시 잊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김주혁은 탤런트 故 김무생의 차남으로 태어나 1998년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한국의 휴 그랜트’라는 별명처럼 차분하면서도 로맨틱한 이미지를 앞세워 <카이스트>, <프라하의 연인>, <싱글즈> 등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영화 <공조>와 드라마 <아르곤>에서 연기 변신을 시도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면모들을 선보이고 있던 차였다.

KBS <해피선데이–1박2일>에 고정으로 출연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점잖은 이미지를 깨버린 점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팀의 맏형이면서도 무언가 어설픈, 그럼에도 유쾌함과 친근함이 넘치는 모습으로 ‘구탱이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주혁과 야구

롯데 구단에서 게재한 김주혁에 대한 추모의 글.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페이스북 캡쳐)

 

사망 다음날, 롯데 자이언츠의 공식 SNS 계정에는 김주혁에 대한 추모의 글이 올라왔다. 시타로 한차례 나섰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 어째서 따로 추모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일까. 답은 김주혁의 필모그래피에 있다.

김주혁은 2011년 개봉한 영화 <투혼>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몰락한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이때 롯데 측이 촬영과 훈련을 지원해주고 두 주연배우를 시구ㆍ시타로 초청하면서 서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김주혁은 2014년 <1박2일> 촬영 당시 프로야구 응원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롯데 자이언츠’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YMCA 야구단>과 <투혼>, 두 편의 야구 영화에 출연했다. 그렇다면 우리 야구팬들은 이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그를 다시 추억해보는 것이 어떨까.

*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 주의

 

<YMCA 야구단>

<YMCA 야구단> 출연 당시의 김주혁(사진 오른쪽)

 

김주혁은 2002년 개봉작 <YMCA 야구단>에서 오대현 역으로 출연했다. 극중에서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등장하는 오대현은 황성 YMCA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모델은 실존인물인 필립 질레트), 그리고 신여성 민정림(김혜수)과 힘을 합쳐 YMCA 야구단을 창단하는 인물이다. 일본에서부터 야구를 접해 출중한 야구 실력을 지니고 있던 오대현은 자연스럽게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YMCA 야구단은 야구장 사용 권리를 놓고 일본군과 충돌하고, 오대현은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같이 공부했던 일본군의 히데오와 재회하며 일본군 야구부와의 대결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친일파를 향해 폭탄 테러를 감행하다가 입은 부상으로 인해 실제 경기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한다.

김주혁은 김혜수와 송강호(이호창 역)에게 주연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극 전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조연을 맡아 좋은 연기를 펼쳤다. 영화 자체도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YMCA 야구단>은 서울 관객 56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했고, 영화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은 제3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신인감독상을 수상하게 된다.

 

<투혼>

영화 <투혼>에서 김주혁의 출연 장면

 

김주혁은 이후 2011년작 <투혼>에서 윤도훈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윤도훈은 최고 구속 161km/h의 패스트볼을 바탕으로 3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던 왕년의 최고 투수. 그러나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영화의 시작 시점에는 그저 그런 패전처리 투수로 전락해 있다. 집에서마저 쫓겨나 후배의 집을 전전하고 다니는 형편이다.

2군으로 강등된 윤도훈은 그곳에서도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 부인인 오유란(김선아 분)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을 알게 되고, 그 충격으로 마침내 정신을 차린다. 유란의 수술 날 경기에 선발로 나서기를 자원한 그는 경기에서 엄청난 호투를 선보이고, 그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역시 달라지게 된다.

<투혼>은 설정상의 아쉬움과 스토리의 진부함으로 인해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원래 왼손잡이였던 김주혁은 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오른손 투구를 연습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는 등 꽤나 고생을 겪었지만 이를 계기로 오른손 사용이 보다 용이해졌다고 한다. 보다 전에 촬영한 <YMCA 야구단>에서도 우완투수로 등장했지만 이때는 공을 던지는 장면이 얼마 등장하지 않아 훈련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트리비아 또 하나. <투혼>의 주연배우였던 김주혁과 김선아 두 사람은 영화 홍보를 위해 <런닝맨>의 게스트로 함께 나섰던 적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배우가 시구, 시타를 맡은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연장까지 이어진 탓에 <런닝맨>은 결방되었고, 두 배우가 출연했던 <런닝맨>의 2부는 영화가 이미 막을 내린 10월 30일에야 전파를 탈 수 있었다.

10월 30일, 익숙한 날이지 않은가. 그렇다. 6년 뒤 그가 세상과 작별했던 바로 그날이다.

 

그를 떠나보내며

영화 <투혼> 출연을 계기로 2011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시타를 하던 김주혁의 생전 모습. (사진 = 롯데 자이언츠 제공)

 

사람들은 슈퍼스타의 퇴장에 눈물을 흘린다. 최동원에게 그랬으며, 신해철에게 그랬다. 자신의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의 빈자리는 항상 거대하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에 비하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했던 사람들의 퇴장은 와 닿는 정도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문득 그 자리에 더이상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우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쓸쓸함과 허전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김주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을 맡아왔던 ‘구탱이형’ 김주혁.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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