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에 서있는 남자, 브론슨 아로요의 은퇴

(일러스트=야구공작소 황규호)

때는 2017년 6월, 신시내티 원정을 떠난 LA 다저스의 감독 데이브 로버츠는 상대팀 선발투수를 보고 불현듯 당황했다. “어떻게 아직도 던지고 있어?(How are you still pitching?)”가 그의 첫 마디였다. 그를 당황시킨 상대팀 선발투수는 베테랑인 브론슨 아로요였다.

둘의 인연은 남다르다. 선수 시절 데이브 로버츠가 ‘더 스틸’을 선보인 2004년, 브론슨 아로요는 로버츠와 함께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다. 1977년생인 아로요는 1972년생인 로버츠와 5살 차이다. 로버츠가 36세 시즌이었던 2008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에도 아로요는 40세인 올 시즌 17경기에 등판했다.

감독이 되어 선수인 아로요를 다시 만난 로버츠는 “내가 코치를 하고 있던 나이에 아로요는 빅리그의 선발투수로 나서고 있다. 경의를 표할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로버츠의 저주였을까. 아로요는 로버츠가 이끄는 다저스를 만나 3이닝 5실점의 부진한 기록을 남기고 강판당했다. 그 경기를 끝으로 아로요가 60일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자 현지에서는 아로요의 은퇴를 기정 사실화하기 시작했다. 아로요가 이를 인정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9월 24일, 실질적인 친정팀인 보스턴을 불러들인 신시내티의 홈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은퇴식을 가졌다. 결국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셈이다.

 

평범한 AAAA 투수

플로리다 태생의 고졸 우완 투수인 아로요는 199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피츠버그의 선택을 받았다. 특급 유망주들이 대개 빠른 구속으로 준수한 탈삼진 능력을 갖춘 반면 아로요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아로요는 준수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입단 5년만인 2000년에 트리플A로 승격, 8승 2패 3.65의 성적을 거두고 6월에 메이저리거가 됐다. 그는 데뷔 시즌 20번의 등판 중 12번을 선발 등판했을 정도로 넉넉한 기회를 받았지만, 6.40의 ERA로 인상적인 첫 시즌을 보내지는 못했다.

피츠버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하게 기회를 줬지만 아로요에게 눈에 띄는 성장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피츠버그에게 빅리그에서 9승 14패 ERA 5.15의 성적을 거둔, 연봉조정권리가 다가오는 투수를 데리고 있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피츠버그는 2002년 겨울, 빅리그 3년차 시즌이 끝난 아로요를 계약이관공시(DFA) 처리한다.

 

보스턴에서 반전에 성공하다

웨이버 공시가 된 아로요를 데려간 팀은 명문구단 보스턴이었다. 아로요는 보스턴에서도 대부분 트리플A에 머물렀지만, 2003년 8월 11일에 퍼펙트 게임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다. 그의 팀이 속한 인터내셔널 리그 역사상 역대 4번째 9이닝 퍼펙트 게임이었다.

그 덕분인지 이윽고 아로요는 빅리그에 복귀했고, 롱릴리프로서 17.1이닝 ERA 2.08로 호투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되기에 이른다(3경기 3.1이닝 5K 1실점).

이듬해엔 김병현과의 경쟁끝에 팀의 5선발로 정착하는데 성공, 32경기에서 10승 9패 ERA 4.03의 10승 투수로 거듭났다. 가을엔 선발투수로서 팀이 밤비노의 저주를 끊는 순간을 함께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파리채 블로킹 사건’에 연루되어 유명해진 것도 바로 이 때다(ALCS 6차전).

2005시즌 아로요는 더욱 완숙한 모습으로 35경기 14승 10패 4.51 ERA로 선발 로테이션을 지켰다. 무엇보다 205.1이닝을 소화하며 처음으로 200이닝을 돌파했다. 보스턴은 연장 계약 시기가 다가온 아로요를 놓치려 하지 않았고 아로요 또한 팀에 남기를 원했다. 보스턴과 아로요는 결국 3년 1125만 달러에 합의했다(그의 에이전트는 2000만 달러 이상을 받아낼 수 있다고 설득했으나, 아로요는 직접 ‘홈 디스카운트’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표=이적한 아로요, 똑같은 3시즌 성적 비교>

그런데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둘의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먼저 뒤통수를 친 것은 보스턴이었다. 보스턴이 스프링캠프 기간에 장타자 윌리 모 페냐를 받고 아로요를 신시내티로 트레이드한 것이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이닝이터

아로요는 동요하지 않고 곧 보스턴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윌리 모 페냐가 약 1.5시즌 동안 겨우 16홈런을 치고 보스턴을 떠난 반면, 아로요는 신시내티 이적 첫 시즌인 2006년에 14승 11패 ERA 3.29에 240.2이닝을 소화하며 내셔널리그 최다이닝 1위를 차지했다.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로 선정되는 쾌거도 이뤄냈다.

그리고 아로요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그의 평균구속은 시속 90마일을 넘지 못했지만 제구력은 9이닝당 2~3개의 볼넷만을 허용할 정도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하이키킹의 독특한 투구폼과 팔각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투구로 맞춰 잡는 투구를 펼쳤다.

덕분에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었던 아로요는 2006년부터 2013년까지 1690.1이닝을 소화하며 내셔널리그 이닝 1위를 기록했다. 동기간 1번을 제외하고 매년 200이닝을 넘겼다(넘기지 못한 그 1번도 199이닝).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이닝이터였다.

*2006~2013 NL 이닝 순위
1. 브론슨 아로요 1690.1이닝
2. 맷 케인 1674.2이닝
3. 콜 해멀스 1596.2이닝
4. 폴 마홀름 1444.1이닝
5. 팀 린스컴 1411.2이닝

하지만 그의 느린 공이 항상 범타를 유도할 순 없었다. 더구나 신시내티의 홈구장인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GABP)는 내셔널리그에서 손 꼽히는 타자친화구장이다. 아로요는 신시내티에서 평균적으로 매해 30개 가량의 피홈런을 허용했다. 2011년엔 무려 46개의 피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시즌 최다 피홈런 3위의 불명예를 떠안기도 했다. 그에게 피홈런이란 피할 수 없는 세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역대 단일시즌 피홈런 순위
1. 버트 블라일레븐 50개
2. 호세 리마 48개
3. 브론슨 아로요 46개
3. 버트 블라일레븐 46개

그럼에도 아로요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15승 시즌을 보내는 등 명실상부한 신시내티의 에이스였다. 그는 신시내티에서 9시즌 동안 108승을 거두며 구단 역사상 19번째 100승 투수가 됐는데, 이는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GABP)가 개장한 2003년 이래 구단의 최다승 기록이다.

*GABP 개장 후 신시내티 다승 순위
1. 브론슨 아로요 108승
2. 자니 쿠에토 92승
3. 애런 하랑 75승
4. 마이크 리크 62승
5. 호머 베일리 60승

신시내티는 아로요가 있는 동안 2번의 중부지구 우승을 이뤘고 총 3번 포스트시즌에 나가며 2000년대의 중흥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가을야구 시즌인 2013년 겨울에 정든 신시내티를 떠났다. 당시 신시내티 선수 중에는 아로요와 추신수가 FA 자격을 얻었는데, 신시내티는 둘 대신 호머 베일리를 택했다(6년 1억500만 달러 연장계약).

 

잇단 부상과 노장의 내리막길

신시내티와의 재계약이 무산된 아로요는 서부지구의 애리조나와 보장액 2년 2800만 달러의 FA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적한 구단이 몸에 맞지 않았던 것일까. 시즌을 치르던 도중인 6월, 아로요는 오른쪽 팔꿈치 인대 파열로 토미존 수술을 받고 시즌 아웃을 당하고 만다. 만 37세의 나이는 부상에 치명적이었다.

결국 아로요는 수술과 재활을 거치며 3년 동안 빅리그 무대를 밟지 못했다. 아로요는 트레이드로 소속팀(애틀란타, 다저스)이 두 번이나 바뀐 끝에 방출 당했다. 상처받은 아로요를 받아준 팀은 바로 신시내티였다.

신시내티 입장에서는 마이너 계약이지만 과거의 에이스를 예우해준 셈이었는데, 아로요는 진지하게 도전했다. 스프링캠프 경쟁을 거친 그는 2017시즌에 당당히 그레이트아메리칸볼파크의 마운드에 섰다. 감격스러운 메이저리그 복귀였다.

하지만 평균 84마일까지 떨어진 아로요의 공은 홈런의 시대를 맞이한 2017년의 메이저리그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이번 시즌 71이닝 동안 무려 23개의 피홈런을 허용하고 7.35의 처참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의 노력도 현실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표=리즈 시절과 쇠락한 올시즌의 성적 비교>

 

마지막까지 서있는 남자

올 시즌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은 40대 투수는 아로요를 포함해서 총 6명(콜론, 디키, 우에하라, 그릴리, 로드니)이다. 그 중 직전 시즌에 빅리그 등판 기록이 없는 투수는 아로요가 유일하다. 메이저리그에서 베테랑 투수의 경력 단절은 가장 큰 장애물이다.

사실 아로요가 올 시즌 전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의 빅리그 입성 자체를 어렵게 봤다. 혹자는 그가 왜 힘든 도전을 계속하는지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2004년 보스턴의 우승멤버 중 유일한 현역인 아로요가 이번 시즌에 돌입하기 전에 보스턴 닷컴과 한 인터뷰에서 그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뛰지 않는 것은 슬픕니다. 하지만 저는 최후의 마지막까지 서있는 남자가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따름입니다”

 

야구공작소
김태근 칼럼니스트

출처: Fangraphs, Baseball-Reference, Wikipedia, Bost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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