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박기태] 시련과 희망이 함께했던 류현진의 6월이 막을 내렸다. 5월 26일(한국 시각) 구원 투수로 등판해 메이저리그 통산 첫 세이브를 기록한 류현진은 6월 들어 다시 선발로 복귀했고, 1일부터 29일까지 6경기에 전부 선발투수로 나섰다. 이 기간 동안 류현진은 1승 1패와 4.13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한 차례의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다.
불펜 등판 전까지 류현진은 많은 숙제를 끌어안고 있었다. 수술 전에 비해 줄어든 구속과 늘어난 볼넷은 선발로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족쇄와 같았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피홈런은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난관이었다.
6월의 류현진은 이런 숙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한 모습이었다. 빠른 공의 평균 구속은 구원 등판 이전의 시속 89.5마일에서 시속 90.8마일까지 개선되었다. 제구력도 회복되면서 9이닝당 볼넷 허용이 3.75개(36이닝 15개)에서 1.65개(32.2이닝 6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많은 피홈런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지만, 수술 후 복귀 첫 시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시간을 갖고 지켜볼 만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류현진은 몇 가지 수정을 거쳤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커터의 장착이다. 5월 중순부터 던진 커터는 휴스턴의 에이스 댈러스 카이클의 투구를 보고 터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커터는 헛스윙 유도에는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지만, 많은 땅볼을 유도하면서 쓸 만한 구종으로 자리매김했다.
류현진의 변모가 관찰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바로 높아진 커브의 활용 빈도다. 커터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류현진의 커브는 어느새 빠른 공과 체인지업에 이은 확실한 ‘서드 피치’로 자리 잡았다. 레퍼토리에서의 중요도 또한 커터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사진=Wikimedia Commons CC BY-SA 2.0)
‘체인지업 투수’에서 ‘커브&체인지업 투수’로
류현진 하면 떠오르는 변화구는 역시 체인지업이다. 프로 데뷔 시즌부터 10년 이상 서클체인지업을 던진 류현진은 올해도 체인지업을 빠른 공 다음으로 자주 활용하고 있다. 2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주저 없이 선택할 정도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구종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커브가 체인지업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전성기였던 2014년까지 류현진의 커브 구사 빈도는 11%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커브가 올해 들어서는 거의 2배 가까이 높은 비중으로 모습을 비추고 있다. 사용 횟수와 위력, 그리고 활용되는 상황 모두에서 최근의 커브는 체인지업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위상이 올라간 듯한 모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스트라이크 이후의 선택 빈도다. 류현진은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빠른 공을 가장 많이 던진다. 그 다음이 체인지업이다. 올해 5월까지도 이 순서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6월이 되면서 2스트라이크 이후의 커브 구사율이 체인지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볼카운트 전체로 범위를 확대해 보아도 커브의 활용도 증가가 눈에 띈다.
6월 들어 2스트라이크 이후 상황에서 커브가 결정구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커브의 활용도는 볼카운트를 가리지 않고 늘어나고 있다.
‘신무기’로 주목받았던 커터의 활용도는 20% 미만으로, 생각만큼 높지 않다. 커터는 헛스윙을 이끌어내기엔 움직임이 크지 않아 삼진을 잡아내는 용도로는 적절하지 않다. 대신 땅볼 유도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를 잘 파악한 듯 류현진은 커터를 주로 2스트라이크나 혹은 2볼이 되기 전에 던지고 있다.
반대로 커브는 빗맞은 타구보다는 삼진을 이끌어내기 위한 용도의 변화구다. 빠른 공이나 커터와의 구속 차이가 크기 때문에 타자의 허를 찌르기 좋고, 휘는 각이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노리지 않고는 방망이 중심에 맞히기가 어렵다. 류현진은 데뷔 시절부터 타자와의 머리싸움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영리함은 올 시즌 보여주고 있는 커브의 활용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현진이 가장 높은 빈도로 커브를 활용하는 볼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이후와 초구다. 모두 노림수 없이 커브를 공략하기 쉽지 않은 타이밍이다.
커브는 초구 혹은 결정구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류현진의 커브, 메이저리그에서도 정상급
이렇게 커브의 활용도가 높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류현진의 커브가 상대 타자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헛스윙 유도율은 투수가 던지는 공의 ‘위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결과 지표이다. 예를 들어, A급 투수들이 던지는 커브는 타자가 3번의 스윙 가운데 1번가량을 헛스윙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올 시즌 류현진의 커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리그 정상급의 위력을 뽐내고 있다. 지금까지 던진 커브의 헛스윙 유도율은 42%로 메이저리그 전체 선발 투수 가운데 15위에 해당한다(7월 3일 기준, 커브 100구 이상 던진 투수 대상). 통계 결과를 수집하는 사이트에 따라서는 순위가 12위(45.5%)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명단에서는 랜스 맥컬러스(38%), 지오 곤잘레스(37%), 호세 퀸타나(35%), 애덤 웨인라이트(31%)처럼 커브의 대가로 유명한 선수들이 류현진보다 낮은 순위에서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공공의 적 1호’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의 커브를 구사하는 클레이튼 커쇼의 이름 역시 류현진보다 꽤 낮은 순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31%).
커브 활용도가 늘어난 6월에도 헛스윙 유도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타자들이 시도한 28번의 스윙 가운데 13번이 헛스윙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시즌 평균보다 높은 46%의 헛스윙 유도율이 기록되었다. 이 중에는 6월 29일 경기에서 잡아낸 3개의 헛스윙 삼진도 포함되어 있다.
커브의 재발견 그리고 다저스
이처럼 높아진 커브의 활용도는 수술 이후의 류현진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무뎌진 구속과 낮아진 팔 높이로 인해 주무기였던 빠른 공&체인지업 조합의 위력이 부상 전보다 약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체인지업 자체의 위력은 여전하지만, 그에 앞서 포석으로 활용되는 빠른 공의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실제로 올해 류현진이 허용한 피홈런 중 절반 이상은 빠른 공을 공략당한 결과물이다. 빠른 공의 피안타율은 0.358이고, 피장타율은 더욱 심각해서 무려 0.755에 이른다. 구속뿐 아니라 제구와 공의 움직임 등 종합적인 위력에 위험신호가 켜졌다. 류현진은 커터의 장착과 커브의 활용도 증가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 있다.
어쩌면 소속팀이 LA 다저스라는 점도 커브의 활용도 개선에 도움이 되었을 지 모른다. 다저스는 올 시즌 커브를 가장 많이 던지고 있는 팀 가운데 하나다. 리치 힐, 알렉스 우드, 브랜든 맥카시, 클레이튼 커쇼가 버티는 선발진은 말할 나위도 없고, 불펜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조시 필즈 역시 커브를 자주 활용하는 투수다. 류현진은 커브를 갈고 닦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기 쉬운 환경 속에 있다. 여기에 리그에서 가장 프레이밍에 능한 포수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또한 커브 활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류현진의 커브 자체는 ‘신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의 빠르기, 놓는 위치, 움직임 등 모든 면에서 류현진의 커브는 지금도 부상 전과 사실상 동일한 구종이다. 즉 기존의 방식으로 더 이상 재미를 보지 못하니 숨겨뒀던 다른 수를 꺼내 들었는데, 이것이 놀랄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커터를 터득하게 된 과정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주무기였던 것처럼 커브를 던지고 있는 점 역시 류현진이라는 투수의 번뜩이는 천재성을 잘 보여준다.
참고: Baseball Savant, Baseball Reference, Baseball Prospe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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