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재헌 >
NPB 로스터를 보면 다른 선수들과 달리 등번호가 세 자릿수인 선수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자릿수나 두 자릿수 배번을 달고 있는 다른 이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면 그들이 달고 있는 수의 크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등이 숫자로 가득 차 있는 유니폼을 입고 비장한 표정으로 연습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이 남자들은 ‘육성선수’다.
뉴욕 메츠 센가 코다이는 NPB 육성선수 출신으로 MLB에 진출해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그를 비롯한 여러 육성선수들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며 육성선수 제도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런 성공 신화와 함께 제도의 근본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육성선수 도입과 성공 사례의 대두
일본프로야구 육성선수에 관한 규약(이하 ‘육성선수 규약’) 제2조는 육성 선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육성선수란 지배하선수1등록을 목표로 야구 기술의 향상과 예절 함양 등 야구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구단과 육성선수 계약을 체결한 선수를 말한다.
NPB 드래프트는 지배하지명2단계와 육성지명 단계로 나뉘어 진행된다. 지배하지명을 받은 선수들은 선수 계약이 체결된 뒤 지배하등록이 진행되어 이듬해 1군 경기에 바로 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육성지명 선수들은 선수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도 팀이 지배하등록을 하기 전까지는 1군 경기에 나설 수 없다. 실전에 즉각적으로 투입될 만한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선수가 육성계약을 체결해 육성선수가 된다.
체격이 크고 탁월한 파워를 갖고 있지만 또래 투수의 공을 맞히지 못하는 고교 야수는 지배하 지명을 받을 가망이 거의 없다. 그러나 육성지명을 받고 프로팀에 입단하면 이 선수는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재능을 꽃피울 가능성이 커진다. 육성선수 제도는 지배하지명만 존재했다면 지명받지 못할 유망주들에게 프로 진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 육성 드래프트 지명의 대표적 성공 사례 >
2005년에 처음 마련된 육성선수 제도는 육성지명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0년에 육성지명 센가 코다이와 카이 타쿠야는 각각 퍼시픽리그의 최고 투수와 포수로 떠올랐다.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소프트뱅크는 2010년대 무려 6번의 통합 우승(일본시리즈 우승 4회)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현재 지배하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 65명 중 무려 10명이 육성선수 출신인 소프트뱅크는 제도의 취지가 현실에서 충실히 이뤄진 대표적인 사례다.
육성 지명 증가에 따른 문제의 출현
육성선수 성공 신화를 경험한 소프트뱅크는 이른바 ‘화수분 야구’ 체제를 이어가고자 했다. 그들은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춘 유망주를 육성지명으로 최대한 많이 확보해 조직 내에서 치열하게 경쟁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모든 육성 선수를 2군 경기에 출전시킬 수 없었기에 소프트뱅크는 육성선수들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3군과 4군 팀을 창설했다.
< 2015~2023시즌 육성 드래프트 참가 구단 및 지명자 수 변화 >
다른 팀도 소프트뱅크의 방식을 모방하면서 육성 드래프트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2000년대에는 2개 구단이 5년간 단 1번의 육성지명도 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지명자가 나온 2008년에도 육성지명 선수가 28명에 그쳤다. 그러나 점점 육성지명을 하는 구단의 수와 그들이 뽑는 선수의 수가 모두 늘었다. 이에 따라 2020년대 들어서는 매해 50명 내외의 육성 지명자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육성 지명자가 늘면서 부작용이 생겨났다. 기회 부족 문제가 대표적이다. NPB 야구 규약에 따라 각 팀은 지배하등록 선수가 65명 이상일 때에 육성선수를 보유할 수 있다. 그러나 70명을 넘겨선 안 되는 지배하등록 선수와는 달리 육성선수 보유에는 수적 제한이 없다. 현행 규정상 육성선수를 많이 보유한 팀은 그들 모두가 좋은 성적을 내도 5명 이상 지배하등록을 할 수 없는 셈이다.
소프트뱅크는 이러한 인원 제약으로 인한 문제를 떠안고 있다. 지난해 육성선수를 가장 많이 보유했던 소프트뱅크는 무려 53명의 육성선수를 보유했다. 그러나 팀이 6, 7월에 외국인 선수를 추가 영입해 지배하등록된 선수가 70명이 되며 53명 중 누구도 1군에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1군 선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육성선수들의 동기부여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 지난해 팀 4군 감독을 맡았던 오가와 히로시는 과도한 경쟁과 협소한 기회로 인한 육성선수의 사기 저하를 우려했다.
육성선수들은 양질의 실전 경험을 쌓기도 어렵다. 육성선수를 다수 보유한 구단은 3군 팀을 창설하기도 하지만, NPB 모든 팀이 3군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대전 상대를 찾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3군 팀들은 실력 수준에 한계가 있는 독립리그 구단과의 교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세이부 라이온스 3군은 올해 치를 47경기 중 독립 팀과 치른 경기가 33경기로 전체 일정의 70% 이상에 이른다. 소프트뱅크 3군도 올해 117경기 중 무려 89경기를 독립 팀과 치른다.
구단이 제도를 취지에 맞지 않게 활용하는 문제도 여러 차례 논란을 유발했다. 야구 규약에 의해 인적 보상이 걸린 FA가 이적할 때 원소속 구단은 육성선수를 보상선수로 지명할 수 없다. 이 점을 이용해 구단들은 장기 부상 이탈이 예상되는 선수들을 육성선수로 전환하여 대형 FA 영입 시 28인 보호 명단에서 다른 선수를 더 지키는 방법을 활용했다. 모리 타다히토 선수회 사무국장이 지난 3월에 열린 NPB 사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육성선수 제도는 주목받지 못한 유망주에게 슈퍼스타가 될 기회를 제공했다. 동시에 스타가 된 이들보다 훨씬 많은 선수에게 과열 경쟁의 좌절감을 안기고, 때로는 구단이 제도의 허점을 찌르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일본 야구계가 유망주들의 꿈과 가능성을 지키면서 제도의 부정적인 측면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여건을 위한 방안
육성선수 제도와 관련해 가장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기회 부족의 해소다. 이를 위해 NPB는 육성선수의 보유 제한을 고려할 수 있다. 지배하등록 인원처럼 육성선수에도 인원 상한을 둔다면 3~4군에도 투자할 여력이 있는 소수의 구단이 다른 구단보다 훨씬 많은 유망주를 보유하는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다. 인원이 제한되면 육성선수가 지배하등록을 쟁취할 확률도 올라가기에 그들의 동기 부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구단이 육성선수 자리를 취지에 맞지 않게 활용하는 문제는 제도의 수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 FA 선수 영입에 대한 인적 보상의 범위에 육성선수를 포함하는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인적 보상에 육성선수가 포함된다면 구단이 부상 이탈자를 육성계약으로 전환해도 해당 선수가 보상선수로 지명될 가능성이 생긴다. 중견 선수를 육성선수로 만들어 보호명단 자리를 아끼는 ‘꼼수’를 차단할 수 있는 셈이다.
육성선수를 인적 보상 범위에 포함하면 경쟁을 뚫지 못해 지배하등록을 이루지 못한 선수에게도 도움이 된다. 육성선수는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선수이기 때문에 잠재력과 실력을 갖추었다면 지배하선수 못지않은 매력을 지닌다. 이들이 FA 선수 이탈로 뎁스가 약해진 구단에 이적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1군에 승격될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경쟁력 있는 육성선수들이 로스터의 인원 제약으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줄어든다.
지배하선수에 비해 육성선수의 권리 신장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도 개선돼야 한다. 육성선수는 NPB 선수회에 가입할 수 없어 프로야구 선수임에도 권리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제도의 실태를 가장 잘 아는 육성선수도 마땅히 선수회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제도의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함께해야 본질적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
2023 WBC에서 활약한 외야수 슈토 우쿄와 불펜투수 우다가와 유키는 육성선수 제도가 없었다면 국가대표팀의 일원이 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 사례 뒤에는 낙담한 이들의 그림자가 있다. 2023시즌 개막 시점에서 육성선수였던 이들 중 1군에 올라온 선수의 비중은 10.3%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에 NPB에서 45명의 육성선수가 방출을 당했고 그중 22명이 다른 팀과 재계약을 하지 못해 프로야구 커리어를 마감했다.
제도의 개선이 이뤄져도 야구선수로 성공하는 이가 일부에 지나지 않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육성선수들이 지금보다 나은 여건에서 야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본의 야구팬들은 육성선수 제도의 취지가 구현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야구계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참고 = 닛케이 신문, 시사통신, 세이부 라이온스 구단 홈페이지,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 홈페이지, 주니치 스포츠, 데일리 스포츠
야구공작소 강상민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임인혁,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김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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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