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배형빈 >
지난해 1월 18일 도쿄에서 NPB 12구단 감독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NPB 커미셔너인 사카키바라 사다유키는 퍼시픽리그만 채택하고 있는 지명타자(이하 DH로 약칭) 제도를 센트럴리그에도 도입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도 센트럴리그에서는 투수가 9번 타자로 선발 라인업에 들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22년 MLB 내셔널리그가 DH(제도)를 도입하면서 센트럴리그는 규모 있는 프로야구를 가진 리그 중 유일하게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리그로 남게 됐다. 홀로 ‘DH 없는 야구’를 고수하는 동안 센트럴리그는 퍼시픽리그와 대전하는 교류전에서 18번의 시즌 중 15번이나 열위에 놓였다.
DH는 대부분 리그와 국제 경기가 채택하고 있는 현대 야구의 표준이다. 센트럴리그는 어떤 이유로 DH 도입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센트럴리그 야구계의 보수적인 사고방식
퍼시픽리그는 1975년 각 구단의 득점력 강화를 통한 흥행을 도모하여 DH 제도를 도입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가 있는 센트럴리그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수비에 약점이 있었던 카도타 히로미츠, 알렉스 카브레라 등의 강타자들이 DH 제도의 존재 덕에 오랫동안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퍼시픽리그의 DH 채택이 이뤄졌을 당시 센트럴리그에서도 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센트럴리그 구단들은 대체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9명이 모두 공수에 참여하는 야구’가 본래의 규칙이며 DH 제도는 야구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통을 고수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요미우리 전 감독이자 야구 평론가인 호리우치 츠네오는 지난해 센트럴리그가 야구의 본래 모습(투수의 타격)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한신의 현 감독 오카다 아키노부는 투수 타석에 대타를 언제 투입할지 전술을 짜는 것과 그런 판단을 지켜보는 것이 센트럴리그의 고유한 묘미라고 주장했다.
센트럴리그가 DH 제도 도입을 추진하려면 전 구단 이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센트럴리그에는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자와 경영자가 곳곳에 남아 있다. 한신의 구단 본부장이자 리그 이사장인 타니모토 오사무는 DH 도입을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리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요미우리의 구단주인 야마구치 토시카즈가 2020년부터 줄곧 DH 도입을 제안했음에도, 아직 제도 채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포기하기 아까운 DH 제도의 이점
현재 구단 수뇌부의 반대로 제도 도입이 보류되고 있으나, 현장의 요구가 계속 커진다면 DH 제도 도입은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간 퍼시픽리그만 누려온 제도의 이점을 센트럴리그 팀과 선수들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표 = 2023시즌 센트럴리그 선수들의 포지션별 타격 성적 >
팀들의 득점력 향상은 DH 도입의 대표적인 메리트다. 지난 시즌 통계를 기준으로 센트럴리그 팀들이 투수 대신 DH가 타선에 들어갔다고 단순히 가정해 보자. DH가 투수 다음으로 타격 생산성이 낮은 유격수와 동급의 타격을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투수보다 2배 이상의 빈도로 루상에 살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인플레이 타구와 장타를 생산할 것이다. DH 도입이 성사되면 일어날 더 많은 출루와 득점은 투수들의 맥없는 스윙과 현저한 투고타저 현상의 지속에 지친 팬들에 좋은 활력이 되어 줄 것이다.
DH가 있는 타선을 상대하려면 더 위력적인 투구가 필요하다. 퍼시픽리그 투수들이 최근 5년 동안 이룬 3km/h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 상승은 센트럴리그를 2배 웃돌았다. 긴 이닝을 버틸 역량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은 사사키 로키의 포크볼과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커브처럼 위력적인 결정구의 탄생에 일조했다. 빠르고 날카로운 공에 대처하기 위해 퍼시픽리그의 타자들은 드라이브라인 등 현대적 시설을 이용해 타격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DH 채택으로 투수와 타자가 본업에 집중해 리그 발전이란 선순환을 유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DH 도입의 또 다른 큰 이점은 부상의 예방이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 감독 타츠카와 미츠오는 대학 및 사회인 투수들 대부분이 타격을 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타격이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야수들도 피하기 어려운 공에 대처할 수 없으므로, 위험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DH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DH를 도입하면 투수가 주루를 할 일도 없어지므로 베이스를 밟다가 부상을 당하는 사고도 방지할 수 있다.
선수 기용 차원에서도 DH 도입은 이로움을 가져다준다. 센트럴리그에서는 백업 선수를 선발로 내보내려면 주전 선수 한 명을 라인업에서 빼야 하는 부담이 있다. 반면 퍼시픽리그 팀들은 DH 자리를 활용해 주전 선수의 체력적 부담을 줄이며 백업 선수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다. 주전 선수를 DH로 기용해 비는 포지션이 생길 때 그 자리에 유망주를 넣을 수 있다는 이점은 퍼시픽리그가 오랫동안 센트럴리그보다 낮은 평균 선수 연령을 보인 비결이었다.
센트럴리그 팀들은 드래프트에서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야수라면 아무리 타격에 잠재력이 있어도 섣불리 지명할 수 없다. 수비력이 떨어지는 외국인 야수 역시 기용이 쉽지 않다. 그러나 DH 자리를 활용할 수 있다면 수비적인 활용도가 떨어지는 선수들을 영입하는 부담이 작아지므로 선수 수급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폭넓게 선수를 영입하고 기용할 수 있다는 점은 구단 운영에도 분명한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변화가 필요한 때
센트럴리그는 1950년에 발족한 이후 DH 없는 야구를 고수해 왔다. 팬 중에는 투수의 타격을 퍼시픽리그에 대한 중요한 차별화 요소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투수가 타석에서 때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의외성, 그리고 투수 교체 타이밍을 둔 감독의 판단을 관전의 재미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배트를 쥐는 것조차 어색해 보이는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 허무하게 삼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팬들이 야구 경기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은 좋은 투수가 더 오래 마운드를 지키고, 좋은 타자가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이다. 그러한 바람에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는 센트럴리그의 문제를 DH 도입이 해결할 수 있다.
DH 제도의 이점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NPB 선수들은 이전부터 제도의 변화를 갈망해 왔다. 수비 가담으로 인한 야수들의 체력 부담을 줄여주고 투수가 투구에 집중하게 하는 DH 도입을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NPB 선수회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0% 이상이 센트럴리그 DH 도입에 찬성한 것은 선수들 의중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국제 경기에서 DH 제도가 첫선을 보인 대회였다. 이후 올림픽은 물론 WBC, 프리미어 12 등 다양한 국제 대회를 통해 DH 제도는 야구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투수가 타격을 하는 전통을 고수했던 MLB 내셔널리그도 2022시즌부터 DH 제도를 채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DH 제도를 도입해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 팬과 선수, 그리고 구단이 지켜보고 납득한 결과였다.
상기한 바와 같이 지난해 센트럴리그 투수들이 타석에 들어선 회수는 총 1622번이었다. DH 제도를 도입해 이 기회를 야수들에게 제공한다면 센트럴리그는 경기장에 더 큰 역동성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 야수들은 더 많은 기회에 보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팬들은 강해질 9번 타자에 더 큰 함성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센트럴리그가 그러한 마음에 응답할 차례다.
참고 = 산케이 스포츠, 센트럴리그 공식 홈페이지, 스포니치 아넥스, 스포츠 호치, Full-Count, 아사히 신문, 닛케이 신문
야구공작소 강상민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재성, 전언수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배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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