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론 멈춰!

<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백충헌 >

3B 0S, 야구에서 타자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이다. 4구째 공에 타자는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평범한 내야 플라이. 아마 야구팬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 무척이나 분노할 것이다. “카운트가 유리한데 하나 정도는 기다렸어야지!”라고 말이다. 해설자 등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2S 0B, 이번에는 투수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이다. 3구째에 투수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패스트볼을 던지며 바로 승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과는 깨끗한 중견수 방면 적시타. 이 또한 야구팬이라면 “유리한 카운트에서 하나 정도는 뺐어야지!”라며 투수의 안일한 피칭에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문득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과연 결과가 달랐어도 사람들은 화를 냈을까?

 

한번 상황과 행위는 그대로 두고 결과만 바꿔보자.

똑같은 3B 0S 상황이다. 4구째 공에 타자는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결과는 좌측 담장을 훌쩍 넘긴 대형 홈런. 이때 홈런을 친 선수에게 “비록 결과는 좋았지만, 지금은 하나 정도 기다리는 게 나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없다. 오히려 타자의 노림수를 칭찬한다. 자신 있는, 적극적인, 과감한 등의 형용사로 ‘행위’가 아닌 ‘결과’를 칭찬한다.

마찬가지로 2S 0B 상황이다. 3구째에 투수는 스트라이크 존으로 패스트볼을 던지며 바로 승부에 들어갔다. 결과는 타자의 헛스윙을 끌어내며 3구 삼진. 이때 삼진 잡은 투수에게 “지금은 카운트가 유리했기에 하나 정도 유인구를 던졌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물론 없다. 공격적인 피칭이었다며 투수의 담대한 배짱을 칭찬한다.

주어진 상황과 투타의 행위는 모두 같았다. 다만 결과가 달랐을 뿐이다. 이렇게 똑같은 행위를 두고 결과에 따라 말의 앞뒤가 달라지는 경우가 야구계에서는 매우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결과론적 사고는 괜찮을까? 그리고 선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지금부터 지도자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선수에게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알아보자. 

 

결과론에 따른 피드백은 과거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에서 결과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훨씬 더 나은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에 비례하는 결과를 못 얻어내기도 한다. 스포츠 승부 예측이 쉽지 않은 이유이자 또 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선수 개인에게 과정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 결과만 놓고 피드백이 달라지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플레이하는 선수가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NC 다이노스 진종길 코치 >

NC 다이노스 수비 코치를 역임 중인 진종길 코치가 이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진종길 코치는 “모든 감독, 코치들이 주루에 대해서 공통으로 하는 말 중 하나는 공격적으로 해라다. 하지만 아웃이 되는 등 결과가 좋지 못할 때 돌아오는 피드백은 공격적인 것과 무모한 것은 다르다고 한다. 선수 때도 느꼈지만 공격적으로 하래서 죽었더니 무모하다고 하더라. 이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어서 진 코치는 “무모한 것은 없다. 오직 공격적이다”라며 자신의 코칭 철학을 얘기했다. 명확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선수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링크

얼마 전 방영된 JTBC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는 실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즈와 경북고등학교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한 내야수 원성준은 3B 0S라는 유리한 순간을 맞았다. 이때 3루 주루코치로부터 히팅 사인을 받았다. 4구째 공에 스윙이 나왔고 결과는 투수 앞 땅볼이었다. 

결국 원성준은 감독 김성근과 선배 정성훈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았다. 3B 0S에서는 공 하나 정도 기다려야 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도 김성근 감독은 원성준에게 앞으로 연습에 나올 필요가 없다며 훈련을 거부했다. 이후 그는 연습장에서 몇 시간 동안 러닝만 뛰고 난 뒤에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김성근 감독은 원성준의 근성을 칭찬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링크1) (링크2)

다들 원성준이 앞으로 더 잘되라는 뜻에서 한 말들이다. 또한 3B 0S에 타격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선수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코치로부터 히팅 사인이 나왔어도 그와 별개로 감독이 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읽어낼 수는 없다. 애매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닌, 구체적인 지시가 선수에게는 훨씬 효과적이다. (링크)

< 한화 이글스 이지풍 트레이너 >

한화 이글스 수석 트레이너로 재직 중인 이지풍 코치는 이를 ‘텔레파시 야구’라고 표현했다. “만약 웨이팅 사인을 냈는데 타격을 하였다면 문책을 할 수가 있다. 지시 사항을 불이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웨이팅 사인을 냈는데 배트를 휘두를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에서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려면 사인을 주지 않는 지도자의 마음마저 꿰뚫어 읽을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링크)

 

결과를 마음대로 해석하면 선수 미래를 망칠 수 있다

앞서 결과론적 사고의 문제에 대해 살펴봤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결과를 태도(멘탈)로까지 연결하는 경우다. 타자가 삼진을 당하거나 투수가 홈런을 맞았다. 야구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기술적 이유, 신체적 이유, 혹은 심리적 이유일 수도 있다. 

이때 야구인들은 보통 그 이유를 심리에서 찾는다.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그에 대한 원인이 부정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투수가 볼넷을 내줄 때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자신감이 부족해서, 공격적이지 못해서 등등 비논리적인 결론을 쉽게 내버린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는 ‘새가슴’이라는 꼬리표까지 갖다 붙인다. 

한국야구학회 최민규 이사는 과거 자신이 새가슴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에 대해 성찰하는 글을 쓴 적 있다. 당시 새가슴 소리를 들었던 선수는 현재 NC 투수코치인 이용훈 코치다. 이용훈 코치는 왜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냐는 질문에 “안 던지는 게 아니라 못 던지는 겁니다. 투수는 몸이 아프면 밸런스가 깨져 제구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충격을 받은 최민규 기자는 더 이상 기사에서 새가슴이라는 단어를 안 쓰기로 다짐했다. (링크

< 스티그마 효과 예시.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백충헌 >

이는 단순히 선수에게 상처가 되어서만이 아니다. 피그말리온 효과의 정반대 경우인 ‘스티그마 효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티그마 효과란 과거 어떤 행위나 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단정 짓고 낙인찍는 것이다. 그렇게 한번 낙인이 찍힌 사람은 점점 행동이 위축돼 평소 가진 능력마저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 한국스포츠학회에서 관련 논문도 발행했다. 논문 제목은 ‘운동학습에서 피그말리온 효과와 스티그마 효과의 적용과 검증’이다. 연구자들은 초등학생 40명이 골프 퍼팅 학습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분석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피그말리온 효과를 적용한 아이들이 스티그마 효과를 적용한 아이들보다 훨씬 학습 능력이 뛰어났다.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도 기사, 중계, 팬, 코칭스태프로부터 끊임없이 “멘탈이 약하다”라는 말을 듣는 선수가 과연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즉 주변에서 새가슴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면 실제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로 그런 선수가 된다.

 

지도자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선수에게는 크게 다가온다

앞서 사례를 통해 결과론이 선수의 과거와 미래 모두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확인했다. 이는 곧 지도자의 말이 갖는 무게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라는 옛 속담도 있다. 무심코 툭 던진 말이 선수 생활 내내, 그리고 은퇴하고 나서까지 영향을 미친다.

허문회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었던 한 일화를 소개했다. 1994년 LG 트윈스 스프링캠프에 일본프로야구 레전드이자 재일 교포 장훈이 방문했을 때 일이다. 선수들 스윙을 지켜보던 중 장훈은 당시 기대주였던 허문회의 타격을 보고 “프로에선 성공하기 힘든 스윙”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당시 입단 동기였던 서용빈에 대해서는 “흠잡을 데 없는 스윙”이라며 극찬했다. 이후 둘은 선수로서 아마추어 때 평가와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허문회 감독은 당시 경험에 대해 “처음 장훈 선배 말씀을 들었을 때 좀 힘들었던 건 사실”이라며 “우리의 우상 아닌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대선수가 한마디 했을 때 어린 선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했다. ‘프로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낙인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것이다. (링크)

혹시나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결과론적인 얘기는 아닌지, 또는 근거 없이 멘탈을 지적해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보자. 좋은 사람(코치)이 되는 방법의 하나는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이다.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더 나은 야구 언어를 사용할 수 있길 바란다.

 

참고 = 코치라운드, JTBC, Eagles TV, 신정택, 이한우. (2020). 운동학습에서 피그말리온 효과와 스티그마 효과의 적용과 검증. 한국스포츠학회지, 18(3), 577-586.

야구공작소 정세윤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백충헌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금강, 민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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