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영구 결번 이야기

[야구공작소 오상진] 유니폼에 새겨진 번호는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구단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수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들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영구 결번(retired number)’으로 지정한다. 수많은 선수들이 거쳐간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시키는 정도를 넘어 하나의 등번호를 독점할 수 있으니, 실로 크나큰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영구 결번의 기원

<최초의 영구 결번 루 게릭(사진= flickr Bush Foundation)>

메이저리그에서 최초로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된 인물은 베이브 루스와 함께 1920~30년대 뉴욕 양키스의 ‘살인 타선(Murderer’s Row)’을 이끌었던 루 게릭이다. 선수 시절의 게릭은 ‘철마(The Iron Horse)’라는 별명에 걸맞게 2130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던 위대한 선수였다. 1939년, 만 36세의 게릭은 훗날 ‘루 게릭 병’으로 알려지게 되는 희귀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을 진단받았다. 병마는 순식간에 그의 운동능력을 앗아갔고, 결국 게릭은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 9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그의 등번호였던 4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것이 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이다.

모든 구단의 영구 결번 ‘No. 42’

<모든 선수들이 등번호 42번을 다는 재키 로빈슨 데이(사진= flickr Keith Allison)>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은 현재 리그의 모든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서 데뷔한 로빈슨은 첫 시즌부터 빼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메이저리그의 초대 신인왕으로 등극했고, 총 10시즌을 활약하는 동안 6번의 올스타와 한 번의 MVP를 수상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보냈다. 1972년, 그가 53세의 이른 나이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다저스는 그의 등번호인 42번을 구단 차원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시간이 흘러 로빈슨의 데뷔로부터 50년이 지난 1997년 4월 15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인종의 장벽을 무너뜨린 로빈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2번을 리그 전체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메이저리그에서는 2004년부터 매년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이 날이면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심판들은 모두 42번을 등에 새긴 채로 경기에 임한다.

영구 결번의 빈부격차

<영구 결번이 넘치는 전통과 역사의 구단 양키스(사진= flickr Jeffrey Putman)>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는 그 유구한 역사를 대변하듯 20개에 이르는 영구 결번을 보유하고 있다. 데릭 지터의 등번호였던 2번마저 영구 결번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가까운 미래에는 한 자릿수 등번호 전체를 영구 결번으로 처리하게 될 예정이다.

이 20개의 영구 결번 가운데 등번호 8번은 2명의 선수들을 위해 결번 처리되었다. 프랜차이즈 최고의 포수로서, 또 감독으로서 팀에 헌신한 요기 베라와 빌 디키가 이 복수 결번의 주인공들이다. 마리아노 리베라는 커리어 내내 로빈슨의 번호인 42번을 등에 새긴 채로 맹활약했다. 로빈슨의 번호가 전 구단에서 영구 결번되기 전인 1995년부터 같은 등번호를 사용해왔던 덕이다. 리베라가 현역에서 물러난 2013년, 양키스의 42번은 다시 한 번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모든 구단이 이처럼 많은 영구 결번 대상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영구 결번은 로베르토 알로마의 등번호였던 12번이 유일하다. 콜로라도 로키스 역시 지난 2014년, 17시즌 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던 토드 헬튼의 1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것이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 사례였다. 시애틀 매리너스도 마찬가지. 지난해 영구 결번 처리된 켄 그리피 주니어의 24번이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 결번이다.

마이애미 말린스는 지난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호세 페르난데스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등번호였던 16번을 영구 결번 처리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아직 실행으로 옮기지 않고 있다. 만약 영구 결번이 이루어진다면, 페르난데스는 말린스 소속 선수로는 최초로 영구 결번의 당사자가 된다. 지금껏 말린스에서 영구 결번의 영예를 누린 인물은 팀의 메이저리그 합류를 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말린스의 초대 사장 칼 바거뿐이다.

영구 결번 수집가들

< 2개 이상의 구단에서 영구 결번된 선수 및 감독 >

한 팀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다는 것은 메이저리그에서 평생을 뛰어도 이루기 어려운 대단한 위업이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두 개 이상의 팀에서 해낸 이들이 있다. 그것도 무려 11명이나 말이다. 메이저리그의 한 시대를 대표했던 이들의 등번호는 복수의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세 개의 팀에서 영구 결번의 영광을 누린 놀란 라이언의 경우 텍사스와 휴스턴에서 34번이, LA 에인절스에서는 전신인 캘리포니아 시절 사용했던 30번이 영구 결번으로 처리되었다.

색다른 영구 결번들

영구 결번의 영광은 대부분이 선수들과 감독들을 향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구단주의 몫이 되기도 한다. 198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구단주 어거스트 부시의 8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85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38년 동안 에인절스의 구단주였던 영화배우 겸 가수 진 오트리는 팀의 26번째 선수라는 의미를 담은 26번을 영구 결번으로 선물 받았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455’라는 독특한 숫자를 영구 결번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특정한 선수나 관계자들의 등번호가 아니다. 클리블랜드는 전성기 시절이었던 1995년 6월 13일부터 2001년 4월 3일까지 홈 455경기 연속 매진 기록을 세웠다(역대 2위). 구단은 팬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기념하기 위해 ‘The Fans’라는 문구와 함께 455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구단 측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기는 했지만 실제 결번의 대상이 되는 번호가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경우도 있다. 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꼽히는 타이 콥과 통산 373승에 빛나는 대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유니폼에 등번호가 없던 1900년대 초반에 주로 활약했던 선수들이다. 동시대의 대선수들 역시 대부분이 같은 이유로 특정한 번호 없이 영구 결번 명단에만 이름을 올렸다. 한편, 어떤 팀들은 구단의 목소리로 오랜 시간을 활약해준 캐스터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이들의 이름을 번호 없이 영구 결번 명단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출처: Baseball-Reference, 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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