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소혜린 >
“심판이 궁금해, 심궁해”는 현역 야구 심판이 심판에 대한 억울함을 스스로 해소하기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는 칼럼 시리즈입니다.
야구 심판과 규칙에 대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달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평소에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댓글로 질문을 남겨주세요.
안녕하세요. ‘심판이 궁금해, 심궁해’의 저자 이금강입니다. 오늘은 평소의 강의식 말투가 아닌 편한 어조로 최근에 발생한 심판방해 논란에 대해서 담백하게 이야기하려 합니다.
2023년 8월 26일 LG:NC전에서 발생한 심판방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2023년 4월 8일 롯데와 KT 경기에서도 심판방해가 발생했었지만, 그때는 이번만큼 심판방해가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심판의 잘못된 규칙 적용으로 인해 롯데가 내주지 않아야 하는 실점을 하게 되어 심판진 징계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판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큽니다. 실제로 심판에 대한 테러 행위가 사전에 감지되었고, 이에 따라 8월 27일 경기 당시 구장에 형사도 배치되고 해당 심판이 배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아무리 심판에 대한 불만이 크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팬심이 너무 과열 돼버렸습니다.
오늘은 윤상원 심판은 왜 그 자리에 있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전까지 심궁해 시리즈는 야구 규칙에 대한 설명이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심판방해 규정과 논리에 대해 좋은 글을 써주신 분들이 많기에 굳이 제가 추가로 설명을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에 심판의 입장에서 심판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정말 공을 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심판제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최근의 흐름까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최초의 루심과 심판방해
야구가 태동했을 당시 경기에 배정된 심판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1858년 현 MLB의 전신인 “야구 선수들의 국가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Base Ball Players”가 제정한 규칙에 따르면 경기에는 한 명의 심판이 배정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후 “프로야구 선수들의 국가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로 명칭을 바꾼 이 단체는 1871년 ‘심판은 경기장에 들어와서는 안 되며, 파울 지역에서만 판정을 내려야만 한다’라는 규정을 신설합니다. 즉, 원시 야구에서 심판은 페어 지역에 있을 수 없기에 심판이 페어 타구에 공을 맞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기록상 루심이 처음으로 채용된 것은 1885년 10월 19일 열린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월드시리즈 2경기입니다. 이 당시 두 명의 심판(umpire)과 함께 한 명의 루심(referee)이 투수와 2루수 사이에 섰다고 합니다. 야구 규칙의 기원인 니커보커 규칙(Knickerbocker Rules)이 만들어진 1845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페어 타구에 심판이 맞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경기를 2심제로 진행한 최초의 대회는 1890년 딱 한 해만 열렸던 플레이어스 리그(Players League)입니다. 플레이어스 리그 규정집은 두 명의 심판이 일한다면 한 명은 타자 뒤에서 구심, 한 명은 페어그라운드에서 루심 역할을 맡는다고 쓰여있습니다. MLB는 최초의 루심을 도입한 1885년 이래 2심제를 종종 썼지만, 1898년이 되어서야 2심제를 공식화합니다.
한편 페어지역 내에 위치한 심판이 타구에 맞았을 때 안타가 기록된다고 규정한 규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0년입니다. 1890년 합의된 MLB 규칙 제46조 5항에 따르면 ‘페어 지역에서 타구가 심판이나 심판의 의복에 닿으면 주자에게 한 개 베이스’가 주어지며, 제68조 3항에 따르면 페어 타구가 심판에 맞으면 타자에게 안타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번에 논란의 중심이 된 공식야구규칙 5.06(c)(6)항은 무려 130년이나 된 규칙인 셈입니다.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19세기 야구에서 ‘심판이 타구에 맞았지만 수비가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은’이라는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페어볼에 맞는 순간 그 즉시 안타가 됨과 동시에 주자들에게 안전 진루권 하나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 규정보다 더더 공격에 유리했는데, 현행 규정으로는 타자주자에 의해 밀려나는 주자만 진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루심의 위치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자 1루 상황에서 2루심은 투수와 2루수 사이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을까요? 현재 운용 중인 심판 매뉴얼은 2루심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위 사진은 2023년 미국 대학 야구(NCAA) 4심제 경기에서 주자 1루 상황에서 심판의 위치를 설명한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2루심은 2루 베이스 앞 좌측 혹은 우측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Deep B(1루 쪽) 혹은 Deep C(3루 쪽)이라고 하는데, 2루심의 선호에 따라 둘 중 원하는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KBO에서 발행한 심판 교본, 미국 고고 야구(NFHS)에서 발행한 심판 교본 또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 경기 장면을 통해 좀 더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왼쪽 장면은 2023년 4월 7일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 오른쪽 장면은 2022년 10월 28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경기 장면입니다. 모두 주자 1루인 상황이지만, 왼쪽에서는 심판이 Deep B 지점에, 오른쪽에서는 심판이 Deep C 에서 내야 흙으로 이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MLB를 보다 보면 주자 1루 상황에서 2루심이 Deep B나 C 외에도 다른 곳에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왼쪽은 2023년 5월 2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애스트로스의 경기, 오른쪽은 2023년 7월 20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신시내티 레즈간의 경기입니다. 똑같이 주자 1루 상황인데 2루심이 Deep B나 C가 아닌, 처음부터 외야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요?
답은 심판이 최대한 수비와 타구를 방해하지 않을 자리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왼쪽과 오른쪽 그림에서 타자는 각각 라이언 노다와 티제이 프리들입니다. 두 선수 모두 힘 있는 좌타자이기 때문에 주자 1루임에도 불구하고 2루수는 1루 쪽에 치우쳐서, 유격수는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수비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타구가 1-2루 간으로 날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판이 아예 수비 뒤에 위치한다면 심판이 타구에 맞을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맞더라도 볼데드가 아닌 인플레이 상황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평상적인 위치가 아니라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8월 26일로 돌아가겠습니다.
타석에 서 있는 선수는 우타자인 박건우입니다. STATIZ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8월 28일 기준 박건우의 좌측 타구 비율은 무려 47.5%입니다. 우측으로 간 타구의 비율이 27.3%밖에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그가 상대적으로 당겨치는 우타자인 점을 고려한다면 윤상원 심판이 Deep C가 아니라 Deep B에 있었던 점은 당연합니다. 1-2루 간에 있는 것이 확률적으로 타구에 덜 맞고 수비를 덜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수비를 방해하기 위해 1-2루 간에 2루심이 위치했다는 주장은 심판인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2루심이 상대적으로 느린 땅볼을 확실하게 피하지 못했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타구를 고의로 막기 위해 저쪽으로 이동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입니다.
심판의 역할과 사견
< 매우 빠른 파울타구를 맞고 자신은 멀쩡하다는 것을 뽐내는 조 웨스트 >
야구장은 160km/h에 육박하는 타구 수십 개가 날아다니는 공간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선수와 함께 뛰는 심판도 위험을 감수하며 경기를 진행합니다. 심판이 공에 맞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대비해 최적에 자리를 잡고 최적의 시야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공에 당연히 맞을 수 있습니다.
공식야구규칙에 명시된 ‘심판원에 대한 일반지시’에 보면 심판의 ‘최고의 필요 조건은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MLB 심판 메뉴얼에 따르면 심판은 정직함과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합니다. 따라서 심판을 제외한 모두가 심판이 공에 맞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통상적인 플레이가 이어지더라도, 심판이 공에 맞았다면 맞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바른 심판의 자세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몇몇 분들께서 심판이 페어볼에 맞았더라도 수비가 이를 잡아서 수비에 성공했다면 심판에 의한 방해가 없었다는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공식야구규칙에는 포수가 도루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심판이 송구를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루를 잡아낸다면 이를 정상 플레이로 인정하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 입장에서 저 역시 상술한 규정이 새로 생긴다면 타구에 불가피하게 맞았을 때 좀 더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가능성도 제기해 봅니다. 심판방해에 대한 규정의 역사적인 맥락을 돌아본다면, 저는 이 규정이 어쩌면 수비 측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 측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자의 위치에 상관 없이 보통 2루심은 2루수와 유격수, 그리고 2루 주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매뉴얼 상으로도 그렇게 나와 있으며, 주자나 야수도 심판이 시야를 가린다면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합니다. 즉, 2루심은 좁아 보이는 내야의 틈새 속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야수 사이를 돌파해 외야로 나갈 수 있는 공이 도리어 심판에 맞아 내야에 갇혀버리고 타자 혹은 주자가 죽어버리는 결과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심판방해 규정이 말하는 것처럼, 루심이 타구에 맞았을 때 타자에게 안타를, 주자에게는 1 베이스 안전 진루권을 부여한 이유는 공격측에 빠져나갈 타구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합의를 통해 좀 더 합리적인 그리고 한국 야구를 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정서에 더 부합한 규정은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MLB를 비롯해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번 논란을 흘려버리지 말고, 한국에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역수출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합니다.
참고 = Baseball-in-Play, MLB, 19C Baseball, CCA Manual, NFHS, KBO, Statiz, Baseball Rules Academy
야구공작소 이금강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민경훈
일러스트 = 야구공작소 소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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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심판은 당연히 심판편이죠.
좋은내용 감사합니나
좋은 말씀 많이 써주셨습니다. 저 역시도 심판에 대한 살해/협박에 강력히 반대하고, 윤상원 2루심이 고의로 수비를 방해하거나 타구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다만 이번 사건의 본질은 심판의 ‘과실에 의한 경기방해’ 및 그에 대한 비난가능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베테랑 심판이 느린 땅볼을 피하지 못해 경기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 것에 심판위 차원의 제재나 입장표명이 없는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칼럼에서는 “2루심이 상대적으로 느린 땅볼을 확실하게 피하지 못했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이라는 짧고 편한 말을 사용했지만,
실제 영상을 보면 타구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오히려 타구에 다가가는 결과를 일으켰고, 공을 재빨리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심판의 위치는 정확했다’, ‘2루심이 고의로 타구에 맞은 것(일부 과격한 팬의 주장)은 아니다’ 라는 설명에 그친 점이 아쉽습니다.
경기 진행의 ‘공정성’은 최근 KBO를 넘어 전 세계 스포츠계에서 뜨거운 감자 중 하나입니다. 테니스에서처럼 AI 심판론이 대두되는 주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번 윤상원 심판의 타구맞음 사태에 대해 ‘심판 과실로 인한 경기진행의 방해’와 ‘경기의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한 심판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과열된 팬심을 식히고 심판진에 대한 팬들의 오해를 푸는데 조금이나마 칼럼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느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