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은 야구만 보는 공간이 아니에요

< 사진 출처 = 워싱턴 보셀 대학교 공식 홈페이지1 >

야구공작소 14기 오리엔테이션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첫 모임인 만큼 의미 있는 장소를 고르고 싶었다. 서울 소재의 스터디룸을 검색해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척돔 스카이박스를 대관해 회의실로 쓸 수는 없을까?”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구단은 시설 대여 사업을 진행한다. 지역 기업은 야구장 대회의실을 신제품 발표회장으로 쓴다. 구단 레스토랑에서 연말 파티를 개최하는 회사도 많다. 자선 단체는 구장 라운지를 행사 장소로 사용한다. 연고지 내 대학들은 관중석을 빌려 졸업식을 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나라 야구장도 야구만 할 수 있는 곳은 아닐지 모른다. 

 

얼터 콘텐츠의 선두 주자, 영화관

‘얼터 콘텐츠’란 공간을 본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뜻한다. 서두에 언급한 시설 대여 사례들 역시 야구장 얼터 콘텐츠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관을 중심으로 얼터 콘텐츠 공간이 늘어나는 중이다. 그 배경에는 코로나19가 있다.

영화사들은 팬데믹 기간에 새로운 영화를 개봉하길 꺼렸다. 제작을 끝낸 영화도 영화관 대신 OTT 서비스에서 공개하곤 했다. 국내 멀티플렉스 회사는 사실상 개점휴업에 들어간 영화관을 다르게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CGV는 콘서트 영상을 택했다. 특히 2020년에 상영한 ‘메탈리카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공연은 큰 화제를 몰고 왔다. 메가박스는 애니메이션에 초점을 맞췄다. ‘나츠메 우인장’의 최초 극장판과 ‘러브 라이브’ 등을 상영했다. 

< 롯데시네마의 ‘하와이언 데이즈 in 시네마’ 행사 포스터 >

시간이 흘러 코로나19의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얼터 콘텐츠는 더욱 활발해졌다. 롯데 시네마는 아예 사내에 얼터 콘텐츠 팀을 신설했다. 나아가 ‘롯스플’이라는 브랜드를 출시해 영화관의 다목적 활용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들고나왔다. 이제 롯데시네마의 영화관은 더 이상 영화만 보는 공간이 아니다. 콘서트, 토크쇼, 클래스, 팝업 라운지가 함께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메이저리그의 얼터 콘텐츠

야구장은 영화관보다 훨씬 복합적인 시설을 갖춘 공간이다. 넓은 잔디 운동장을 비롯해 관중석, 회의실, 기자 회견장 등이 두루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메이저리그 구단에는 구장 내/외부 공간을 대여해 이윤을 창출하는 수익 모델이 보편화되어 있다. 

특히 콘서트는 예로부터 야구장 얼터 콘텐츠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열리는 콘서트 일정만 따로 모아 놓은 사이트가 있을 정도다. 과거에는 경기가 끝난 뒤 열리는 포스트 게임(Post-Game) 콘서트가 주를 이뤘다. 오늘날에는 경기가 없는 날에도 야구장을 콘서트장으로 활용한다. 아티스트들이 전국 투어를 돌 때 각 지역의 야구장을 콘서트 장소로 선정하는 경우도 많다. 올해는 건즈 앤 로지스와 P!NK 등이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 세인트루이스의 부시 스타디움을 돌며 공연할 예정이다. 

필드에서 콘서트만 열리는 것은 아니다. 작년 1월 마이애미 말린스 홈구장 론디포 파크에서 몬스터 트럭 대회가 개최됐다. WWE 레슬매니아 19는 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T-모바일 파크의 전신)에서 치러졌다. 

< 부시 스타디움의 축구장 활용 모습 >

부시 스타디움에서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정식 경기가 치러지기도 했다. 다목적 구장이 아닌 탓에 내야 흙을 제거한 다음 축구장에 맞는 라인을 새로 그려야 했다. 야구장과 축구장의 규격은 당연히 딱 들어맞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당시 위쪽 사이드라인 너머에는 미처 활용되지 못한 야구장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 PNC 파크에서 열리는 요가 클래스 >

보다 규모가 작은 대여 활동도 이루어진다. 야구장에서 맥주 축제를 열거나 결혼식을 하기도 한다.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외야 쪽 잔디에서 요가 클래스를 진행한다. 구단이 직접 주도하는 사업인 만큼 참가비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얼터 콘텐츠 사례는 고척돔 콘서트다. 고척돔은 다목적 시설로의 적응 기간을 거친 뒤로 매년 40~60억씩 흑자를 내는 중이다. 콘서트 때마다 천장 조명을 새로 달아야 한다는 점, 난방 시설이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꼽히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실적이다. 다른 개방형 야구장에서도 이론적으로 콘서트가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잔디 관리와 일정 조정에 따른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석과 내부 시설을 활용한 얼터 콘텐츠 사례도 있다. SK 와이번스는 문학구장에서 뮤지컬영화를 상영하는 참신한 시도를 펼쳤다. 2016년 NC 다이노스는 마산야구장 스카이박스를 4곳을 외부에 개방했다. 홈경기가 없는 날 팬들이 스카이박스를 스터디룸과 회의실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NC 구단은 창원NC파크 개장 당시에도 다이노스 몰 3층을 다목적으로 활용할 것이라 밝혔다. 예식이나 미팅 등 구체적인 활용 방안까지 언급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피트니스클럽이 입점해 있다. 

 

사실 우리나라 야구장의 얼터 콘텐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건 구단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상 야구장을 설치 및 운영할 권리는 지방자치단체에 있다. 프로야구단은 스포츠산업진흥법 제17조에 따라 야구장을 최대 25년 동안 위탁 운영할 뿐이다. 프로야구단이 직접 구장 시설을 보수하려 해도 지자체와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잦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 대여, 야구와 무관한 행사 등의 목적으로 자유롭게 구장을 활용하기는 힘들다.

여론도 고려해야 한다. ‘세금으로 지어진 야구장을 다른 목적으로 빌려주는 건 특혜’라는 정서가 형성될 우려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 야구단의 존재 가치는 비즈니스보다 사회 공헌에 가깝다. 무리하게 수익 창출을 하지 않아도 모기업으로부터 지원금이 들어온다. 구단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감당하면서 얼터 콘텐츠를 시도할 명분이 떨어진다.

 

스포츠 경기장은 비행기와 같습니다. 굴리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죠.

마이크 롬바르디, 디 애슬래틱(The Athletic) 기자

비단 야구장뿐 아니라 공간을 활용하는 모든 업종에 해당하는 말이다. 앞서 메이저리그의 사례를 통해 야구장이 경기 외에도 활용 가치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야구장의 얼터 콘텐츠가 이루어지기 힘들 듯하다.

다만 긍정적인 소식도 있다. 비록 얼터 콘텐츠로 볼 수는 없지만 신축 예정 야구장에는 다양한 복합 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다. 청라돔의 쇼핑몰, 베이스볼 드림파크의 인피티니 풀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시설들은 경기가 없는 날에도 팬들의 발걸음을 야구장으로 유도한다. 구장의 활용도를 높인다는 비슷한 측면에서 얼터 콘텐츠 부재의 아쉬움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야구장을 365일 내내 활용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얼터 콘텐츠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야구장은 일 년에 72일만 쓰이기에는 아까운 공간이다. 

 

참고 = 롯데시네마 페이스북, CBS Sports, 피츠버그 파이리츠 공식 트위터

야구공작소 조훈희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이금강, 도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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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년 워싱턴 보셀 대학교의 졸업식 장면. 장소는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로,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이던 6월에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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