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 스틸러(Win-Stealer)’ 승리를 훔치는 선수들

[야구공작소 오상진] 홈런은 야구의 꽃이라 불린다. 시원하게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는 경기의 흐름을 순식간에 뒤바꾼다. 팬들에게 가장 짜릿한 장면을 선물하는 홈런 타자들은 영화로 치면 주연 배우와 같다. 그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와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

스포트라이트 바깥에는 홈런보다 덜 화려한 조연, 도루가 존재한다. 도루를 시도한 주자가 투수의 견제를 뚫고 베이스를 훔치고 나면 유니폼은 흙먼지로 더럽혀지기 일쑤다. 혹시나 실패라도 할 경우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그들이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뛰어도 몸값과 주목도는 홈런 타자들보다 낮다. 그럼에도 그들은 홈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단 1점의 점수를 위해 뛰고 또 뛴다. 영화 속에 빛나는 조연 ‘신 스틸러(Scene-stealer)’가 있다면 야구에서 승리를 훔치는 그들은 ‘윈 스틸러(Win-stealer)’라고 불릴 만하다.

 

‘맨 오브 스틸’ 리키 헨더슨

도루의 상징 리키 헨더슨(우측). (사진=Flickr Gary Stevens, CC BY 2.0)

메이저리그에서 ‘도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리키 헨더슨이다. ‘맨 오브 스틸(Man of Steal)’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25시즌(1979-2003) 동안 무려 1406번이나 베이스를 훔쳤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도루 기록으로 2위인 루 브록(938개)와 468개, 현역 1위인 스즈키 이치로(508개)와는 무려 898개가 차이 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을 꼽을 때 최다 승(사이 영, 511승), 최다 안타(피트 로즈, 4256개) 등과 함께 항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의 통산 도루 성공률은 80.8%(1741시도/335실패)로 많은 도루 수에도 불구하고 높은 성공률을 보여줬다.

헨더슨은 개인 한 시즌 최다인 130도루를 포함해 한 시즌 100개 이상의 도루를 3차례나 기록했다. 40도루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16번(역대 1위)이나 되며 AL(아메리칸리그) 도루 타이틀도 12번 차지했다. 그는 도루 외에도 통산 득점 1위(2295득점), 볼넷 2위(2190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1번 타자로 출장한 그의 통산 출루율은 무려 .401로 웬만한 중심타자 못지않다. 그는AL 올스타도 10번이나 선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명예의 전당 입성과 영구결번(오클랜드 애슬래틱스, 24번)이라는 영예를 누렸다.

헨더슨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이 아닌 단 한 줄의 문장이다. “만약 유니폼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 경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If my uniform doesn’t get dirty, I haven’t done anything in the baseball game).” 이 명언과 흙투성이가 된 유니폼을 입은 그의 모습은 팬들의 마음까지 훔치기에 충분했다.

 

데이브 로버츠의 ‘더 스틸’

LA 다저스 선수 시절의 데이브 로버츠(사진=Flickr Mallngerlng, CC BY 2.0)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틸러(stealer)는 헨더슨이지만 최고의 도루 장면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따로 있다. 이른바 ‘더 스틸(The steal)’로 불리는 도루를 성공시킨 주인공은 바로 LA 다저스의 감독을 맡고 있는 데이브 로버츠다. 그는 빅리그에서 10시즌을 뛰는 동안 올스타에 선정된 적도 없고 개인 타이틀과도 거리가 먼 평범한 선수였지만 단 한 번의 도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2004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3차전까지 뉴욕 양키스에 시리즈 전적 3패로 끌려가고 있었다. 특히 3차전에서 등판한 6명의 투수가 모두 점수를 내주며 19-8의 대패를 당해 팀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져있었다. 보스턴은 벼랑 끝에 몰린 4차전에서 5회 말까지 3-2로 앞서나갔지만 6회 초 3-4으로 역전을 허용한 뒤 그대로 9회까지 끌려갔다.

운명의 9회 말, 선두타자 케빈 밀라가 양키스의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볼넷을 얻어냈고 곧바로 대주자 로버츠가 투입됐다. 리베라는 로버츠의 발을 묶기 위해 몇 차례 견제구를 던졌지만 로버츠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초구부터 과감하게 뛰었고 간발의 차로 2루 도루에 성공했다. 이어 로버츠는 빌 뮬러의 안타 때 홈을 밟으면서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고 보스턴은 연장 12회 말 데이비드 오티즈의 끝내기 홈런으로 6-4 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보스턴은 믿을 수 없는 리버스 스윕(0승 3패→4승 3패)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며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로버츠가 성공시킨 것은 한 개의 도루였지만 그것을 계기로 보스턴이 기적의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면서 ‘더 스틸’은 도루 그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리키 헨더슨이 갖지 못한 기록의 보유자들

‘슬라이딩 빌리(Sliding Billy)’ 빌리 해밀턴(1866-1940)은 메이저리그 초창기를 주름잡은 대도(大盜)다. 그는 통산 914개의 도루(역대 3위)를 기록했는데 경기당 도루는 무려 0.57개(912개/1591경기)로 이 부문 1위에 올라있다(통산 도루 500개 이상 기준). 그는 1889년부터 1891년까지 3년 연속 100도루(111-102-111)를 기록했고 1894년 다시 한 번 정확히 100개의 도루를 성공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4번의 100도루 시즌을 만들어 낸 선수가 되었다. 1894년 8월 31일 워싱턴 세너터스전에서 7개의 도루를 성공한 해밀턴은 조지 고어와 함께 1경기 최다 도루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1985년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빈스 콜먼은 데뷔 첫 해부터 110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NL(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는 1986년(107개)과 1987년(109개)까지 100도루에 성공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데뷔 후 3시즌 연속 100도루에 성공한 선수로 남아있다. 콜먼은 13시즌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역대 6위에 해당하는 통산 752도루를 기록했으며 경기당 도루는 0.55개(752도루/1371경기)로 0.46개의 헨더슨(1406도루/3081경기)보다도 높다. 콜먼은 메이저리그 연속 도루 성공기록도 보유하고 있는데 1988년 9월 16일부터 이듬해 7월 26일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무려 50번의 도루를 성공했다(AL 기록 스즈키 이치로 45연속 도루).

 

2017시즌 윈 스틸러는?

유력한 도루왕 후보인 빌리 해밀턴(사진=Flickr Keith Allison, CC BY SA 2.0)

통산 도루 3위와 같은 이름을 가진 빌리 해밀턴(신시내티 레즈)은 최근 3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한 선수다. 2014년 풀타임 첫 시즌 56도루를 기록한 그는 3시즌 연속 50개 이상의 도루(56개-57개-58개)를 기록했으며 매년 성공률도 높아지고 있다(70.9%→87.7%→87.9%). 그는 리그에서 손꼽히는 스피드를 자랑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도루 타이틀을 가져간 적이 없다(3년 연속 NL 도루 2위). 2016시즌 풀타임 첫 3할대 출루율(.321)를 기록하며 이전보다 나은 출루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올 시즌 더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해밀턴의 가장 큰 대항마로 꼽히는 선수는 역시 디 고든(마이애미 말린스)이다. 그는 2014년(64도루)과 2015년(58도루) 두 시즌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도루 1위를 차지하며 해밀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지난해 금지약물 복용으로 80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고든은 결국 79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는 절반으로 줄어든 경기 수에도 불구하고 30도루를 기록하며 여전한 스피드를 자랑했다. 그가 올스타, 실버슬러거, 골드글러브까지 휩쓸었던 2015시즌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도루왕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 최근 3시즌(2014-16) 메이저리그 도루 TOP 5 >

이외에도 2016시즌 잠재력을 터뜨리며 메이저리그 전체 도루 1위에 오른 조나단 비야(밀워키 브루어스), 해적선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스탈링 마르테(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타이틀을 노리고 있다. 지난해 35세의 나이로 AL 도루 1위를 차지한 베테랑 라자이 데이비스(오클랜드 애슬래틱스), 73경기에서 무려 33개의 도루를 기록한 트레이 터너(워싱턴 내셔널스)도 잠재적인 경쟁자다.

30개 구단 체제가 시작된 1998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도루 수는 3281개였으며 이듬해 3421개까지 늘어났지만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2015시즌에는 2505개로 바닥을 쳤다(2016시즌 2537개). 1번타자의 도루 능력이 중시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출루 능력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세이버메트릭스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도루의 가치는 예전보다 낮아졌다. 하지만 야구가 존재하는 한 베이스를 훔치려는 대도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 1점의 점수를 위해, 단 1%의 승리 확률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유니폼을 더럽히는 윈 스틸러이기 때문이다.

출처 : Baseball-Reference, Fangraphs, 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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