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김태근] 야구에서 통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투수의 퍼포먼스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핵심은 투수가 만들어낸 결과물 중 외부 환경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지표를 찾는 것이다. FIP, DIPS 등 더 복잡하고 정교한 수식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 경향이 짙어지면서 ‘클래식’한 지표들은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향 속에도 ‘다승왕’ 타이틀은 여전한 브랜드 가치를 지닌다. 과거처럼 최고의 투수로 꼽히기 위한 보증수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다승 1위 투수는 유력한 사이영상 후보로 떠오른다. 실제로 작년 사이영상의 주인공들은 모두 양대 리그 다승왕이었다.
한편, 최다승 투수가 있다면 최다패 투수도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승왕이 여전한 브랜드가치를 뽐내듯 ‘다패왕’ 또한 여전히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다. 그런데 2016 시즌 메이저리그의 최다패 투수들의 이름들은 왠지 그 오명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제임스 실즈와 크리스 아처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실즈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철완이다. 2006 시즌 중에 데뷔한 실즈는,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9번의 200이닝 시즌을 소화한 투수다. 동기간 선발등판 1위∙다승 10위∙이닝 3위∙퀄리티스타트 4위∙완투 6위에 올라있다.
기량이 정점에 올랐던 2011년엔 AL 사이영상 3위를 차지하며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특히 11번의 완투를 성공시킴으로서 ‘완투왕’에 등극했는데, 이는 21세기 이후 단일시즌 최다완투로 남겨져 있다(2위 2008년 사바시아, 10번). 팬들과 언론은 실즈를 “Complete Game James”라고 불렀다.
크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꾸준했던 실즈의 커리어는, 그가 투수로는 적지 않은 만 33세 시즌에 FA 시장에 나왔음에도 4+1년 최대 9100만 달러의 계약을 따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15년 샌디에이고에서 맞은 첫 FA 시즌은 기대 이하였다. 비록 202.1이닝과 13승을 거두면서 9년 연속 200이닝-10승을 이어갔지만, 1.1의 fWAR과 95의 ERA+로 기여도가 감소했고 안정감이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노쇠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것이다. 실즈의 2016 시즌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181.2이닝으로 10년 연속 200이닝 기록이 중단됐고, 평균자책점도 5.85로 훌쩍 뛰었다. fWAR은 데뷔 최초로 마이너스(-0.9)로 떨어졌다. 그의 소속팀이 약체인 탓에 득점 지원이 매우 부족하긴 했지만, 6승 19패의 기록을 단순히 불운 탓이라고 보긴 어렵다.
보통 FA 이적을 하는 투수에게 가장 먼저 와닿는 환경 변화는 바로 구장이다. 홈구장이 카우프만 스타디움에서 펫코 파크로 바뀐 실즈는 그 영향이 적을 것으로 예상됐었다. 두 구장의 홈런 파크 팩터가 별 차이 없었기 때문이다(2014 ESPN 홈런팩터: 카우프만 스타디움 22위, 펫코 파크 24위).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뜬공 비율(FB%)은 이전의 35.7%에서 샌디에이고 이적 후엔 33.5%로 근소하게 감소했지만, 9이닝당 1.07개의 피홈런이 오히려 1.40개로 증가했다. 2015 시즌 33개로 리그 최다 피홈런 투수가 됐다. 이 와중에 극도의 타자친화구장인 게런티드 레이트 필드(구 U.S 셀룰러 필드, 화이트삭스)로의 이적은 그를 더욱 벼랑끝으로 몰아갔다(2016 ESPN 홈런 팩터: 펫코 파크 19위, 게런티드 레이트 필드 10위).
스탯캐스트 기준으로 최근 3년간 패스트볼 구속이 하락(92.5마일→91.7마일→90.7마일)하고 있으며, 올해로 만 35세를 맞은 실즈의 구위는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피홈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울 전망이다.
설상가상으로 소속팀 화이트삭스가 리빌딩을 천명한 상황이라 지원을 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작년의 데자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오히려 최다패 투수가 될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또 다른 최다패 투수인 크리스 아처는 프라이스가 떠난 탬파베이의 자타공인 에이스다. 그는 최근 3년간 팀 내에서 제이크 오도릿지와 함께 규정이닝을 채운 유이한 투수이며, 선발등판(99), 이닝(608), 평균자책점(3.52), 다승(31), 탈삼진(658), 그리고 fWAR(11.5)에서 모두 팀내 1위다.
당장 2015년엔 212이닝 12승13패 ERA 3.23으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5위를 차지했다. 작년에도 33경기에서 201.1이닝 평균자책점 4.02 fWAR 3.1로 준수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처가 에이스로 발돋움한 시기와 탬파베이가 영광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일치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풀타임을 뛴 2014년 이후, 탬파베이는 가을야구는 커녕 한 시즌도 5할 승률을 달성하지 못했다. 통산 41승51패를 기록한 아처의 승률 또한 5할에 못 미친다.
아처의 통산 RS/9(9이닝당 득점지원)는 4.07점으로 최하위권에 속한다. 지난 시즌도 4.06점으로 대동소이했다. 커리어하이인 2015시즌(12승13패)마저도 5할 승률에 실패한 그는, 2016시즌(9승19패)엔 더 심한 불운에 시달렸다.
비록 아처의 평균자책점(3.23→4.02)이 약간 증가하긴 했지만 3.99의 평균자책점으로 17승9패를 거둔 데이빗 프라이스와 비교하면 아처가 메이저리그 최다패 투수가 된 것은 득점 지원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프라이스 RS/9 6.61점, 리그 선발투수 4위).
그렇다면 아처는 올해도 최다패의 불명예를 안을까? 그의 기량이 최다패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10번의 시즌 중 14명의 최다패 투수가 나왔는데, 이 중 조정 평균자책점(ERA+)이 100이 넘는 리그 평균 이상의 투수는 2016 크리스 아처와 2015 셸비 밀러가 유이하다(2016 제임스 실즈 59).
즉 올해의 아처가 작년 이상의 활약과 함께 불운을 떨쳐낸다고 가정한다면, 최다패는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할 승률을 달성하기 위해선 ‘불운의 회피’가 아닌 ‘행운의 도래’가 필요하다. 지난 시즌 동부지구 최하위를 차지한 소속팀이 뚜렷한 전력 보강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처는 타선의 집중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10년간 메이저리그 최다패 투수들 중 이듬해 뚜렷한 반등에 성공한 투수는 2008년의 저스틴 벌랜더(11승17패→19승9패)와 2012년의 우발도 히메네스(9승17패→13승9패) 둘 뿐이다. 그리고 2015년의 셸비 밀러(6승17패→3승12패)는 더욱 추락했다. 실즈와 아처는 어느 쪽일까. 2017년 메이저리그의 또 하나의 볼거리다.
출처: Fangraphs, Baseball-Reference, Baseball Savant, ES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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