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5년 만에 찾아온 오키나와 에이스의 봄

(일러스트_야구공작소 이찬희)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 1440분, 84400초다. 동일한 길이지만 상대적으로 느리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고 정신없이 흘러간다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시간의 흐름은 되돌릴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오랜 시간을 거쳐 빛을 본 선수들에게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어느덧 데뷔 15년 차가 됐다. 투수들의 구속은 그 사이 몰라볼 만큼 빨라졌다. 그 속에서 ‘느림의 미학’으로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한 좌완투수가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백정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나친 기대는 독이 되고

고교 시절 좌완으로 150km/h에 가까운 강속구를 던졌던 백정현은 자연스럽게 1차 지명 유력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며 유급을 결정했고, 결국 이듬해 2차 1라운드에서 삼성의 지명을 받았다. 

입단 첫해인 2007년에는 십자인대 부상 재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8월에 1군으로 콜업돼 11경기에 등판했지만 홀드 1개와 7.71의 평균 자책점만을 남기며 프로무대의 쓴맛을 봤다. 

이듬해에도 반짝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간계투로 나서는 빈도는 훨씬 높아졌다. 전지훈련지 오키나와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개막 후에는 부진하는 패턴이 반복되며 ‘오키나와 에이스’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신인 지명 당시 십자인대 파열로 유급하면서 ‘유급자는 1차 지명이 불가하다’는 소위 ‘백정현 룰’을 만들게 한 것이 커리어 최고의 활약이라는 웃지 못할 평가까지 나왔다. 

그렇게 촉망받던 신인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유망주 시절의 기대는 좀처럼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데뷔 5년 차인 2011시즌에는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으며 구속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속팀인 삼성은 그때부터 5년간 5연속 정규시즌 우승, 4연속 통합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백정현 본인은 그 전성시대의 주역이 아니었다. 쟁쟁한 투수들 사이에서 대체 선발과 좌완 원 포인트로 가끔 마운드를 밟는 정도가 그의 임무였다. 

 

반전의 시작, 그리고 전성기

그렇게 백정현은 또 한 명의 아쉬운 1차 지명자로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보였다. 반전은 2017시즌부터 시작됐다. 백정현은 그해에만 데뷔 첫 10년간의 선발 등판 횟수(10회)보다 많은 선발 등판 기회(14회)를 부여받으며 당당히 한 명의 선발투수로 자리 잡았다. 

2020시즌에는 부상으로 단 11경기에 등판하는 데 그치며 다소 부침을 겪었지만, 2010년대 후반의 백정현은 암흑기 삼성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투수였다(2017~2020시즌 WAR 6.88로 팀 내 1위, 다승 27승으로 2위, 이닝 442.1이닝으로 3위). FA를 맞은 지난해에는 드디어 완전히 각성한 모습으로 팀의 5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었다. 

 

백정현의 2021 시즌 주요 성적 지표(*=국내 투수들 중 1위 지표)

ERA 리그 2위(2.63)*

다승 공동 4위(14승)*

이닝 13위(157.2이닝)

투수 sWAR 2위(5.28)*

 

백정현은 원래도 준수한 선발투수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시즌 전에도 그가 리그 최고 투수 반열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 예측했던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 

투수가 원하는 구종을 의도한 곳으로 던진다고 해서 실점을 100%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구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2021년의 백정현에게는 분명 행운이 따랐다.

 

BABIP 통산 0.315 / 2021시즌 0.274 

피OPS 20시즌 0.863 / 2021시즌 0.675

LOB% 통산 71.5% / 2021시즌 81.4%

 

지난 시즌의 백정현이 잘 맞은 타구를 완벽하게 억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해 그가 허용한 강한 타구(hard hit)의 비율은 24%로 특별히 낮은 수치가 아니었다. 땅볼 타구 비율과 땅볼/뜬공 비율도 각각 59.2%와 0.94로 그리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난 시즌 백정현은 데뷔 이래 가장 낮은 0.675의 피OPS를 기록했다. BABIP와 잔루율(LOB%)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향상된 모습이었다.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는 딴판이었던 셈이다.

몇몇 지표를 근거로 한 선수의 성적을 행운 덕이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선수의 노력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태도다. 그렇지만 이 지표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백정현의 성공을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행운은 확실히 백정현의 편이었다. 

 

  1. 바깥쪽으로, 더 바깥쪽으로

아웃을 잡아내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압도적인 구위를 앞세워 타자를 돌려 세우는 탈삼진 쇼는 투수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절묘한 제구와 볼 배합으로 약한 타구를 유도하고 범타로 처리하는 것도 효과적인 투구 방식이다. 백정현은 둘 중 후자의 유형에 가까운 투수다. 

 

2020시즌 59이닝 K/9 7.02, BB/9 2.59, K/BB 2.71

2021시즌 157.2이닝 K/9 6.22, BB/9 3.08, K/BB 2.02

 

그런데 성적이 좋아진 2021시즌의 지표는 어딘가 이상하다. 성적이 썩 좋지 못했던 2020시즌에 비했을 때도 탈삼진은 줄었고 볼넷은 오히려 늘었다. 타구 억제력도 그리 빼어나지 않은 선수가 리그 평균(K/9 7.25)보다 1개 이상 떨어지는 탈삼진 능력으로 굉장한 호성적을 냈다는 얘기다. ‘대체 어떻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2021시즌 백정현의 투구 분포도)

백정현의 투구 분포도에서 그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 투수 백정현의 2021시즌 키워드는 ‘바깥쪽 투구’였다. 그중에서도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특히 존의 바깥쪽 모서리 근처로 향하는 공의 비중이 높았다. 

 

(2021시즌 백정현 좌/우타석 투구 분포도)

 

타석 방향을 구별한 투구 분포도에서는 바깥쪽 낮은 코스를 활용하겠다는 의사가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강력한 구위를 지니지 못한 백정현에게는 타자에게서 최대한 먼 쪽에 탄착군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공을 지켜보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리그 분위기도 백정현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됐다. 지난해 KBO리그의 전체 타석당 투구수는 3.94개로 2014시즌 이후 가장 많았다. 44.3%를 기록한 배트 적극성(헛스윙+파울+타격 / 투구수)은 반대로 같은 기간 중 두 번째로 낮았다. 특히 초구에 배트를 내는 확률이 26.6%로 같은 기간 최소를 기록했다. 백정현은 지난해 그리 많은 헛스윙을 유도하지 못했음에도 ‘바깥쪽 루킹 스트라이크’라는 무기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카운트를 잡아 나갔다. 타자들의 기다리는 성향마저도 어느 정도 역이용을 해냈던 셈이다. 

 

코리안 톰 글래빈? 

S% – 64.6% (규정 이닝 34명 중 15위)

루킹 S% – 31.2% (리그 전체 3위, 국내 투수들 중 1위)

헛스윙률 – 15.7% (규정 이닝 19명 중 최하위)

포심 구속 – 136.6km/h (규정 이닝 19명 중 최하위)

 

  1. 데뷔 15년 차는 여전히 보완점을 찾는다

베테랑 백정현은 시즌 중에도 꾸준히 보완점을 찾았다. 올림픽 휴식기 동안 팀 동료 이승현(2002)과 우규민에게 커브를 배웠다는 인터뷰가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 지난해 백정현의 커브는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피 OPS 1.448). 

 

커브가 많으면 부진했던 백정현(시즌 평균 대비 커브 구사율 1.5배 이상 경기)

4월 6일 4이닝 3실점 3자책 패전 2피홈런 

4월 23일 6이닝 4실점 2자책 패전 

4월 29일 5이닝 5실점 5자책 패전 1피홈런 

5월 18일 5이닝 4실점 4자책 패전 1피홈런 

4경기 4패 6.30 20이닝 16실점 14자책 4피홈런 중 2개를 커브로 허용

 

지난 시즌 백정현의 커브 구사율은 5.8%로 전 구종 가운데 가장 낮았다. 커브를 적극 활용한 4경기에서의 성적도 매우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2022시즌에는 스트라이크 존이 위아래로 확대될 예정이다. 커브의 위력을 끌어내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인 만큼, 보완하기에 따라서는 백정현이 또 하나의 무기를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며

데뷔 14년 차 투수가 써 내려간 반전 드라마의 결말은 4년 38억의 FA 계약이라는 해피엔딩이었다. 매년 전훈지에 먼저 건너가 몸을 만들기로 유명했던 노력파 백정현. 앞으로는 주위의 기대까지 짊어진 채로 마운드에 올라야 한다. 

스트라이크 존이 확대되는 올해는 타자들의 대처법도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의 방식이 올해도 통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모두가 빠름을 외치는 시대에 자신만의 속도로 성공가도에 오른 백정현. 어쩌면 그야말로 “결국 투수는 타자의 타이밍만 뺏으면 된다”는 명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투수 아닐까. 

 

참고: Fangraphs, Statiz

야구공작소 송동욱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김동민, 이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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