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2002년 – 큰형님들이 만든 이틀 연속 역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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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2007년, 좁게는 2001년부터 2004년, 범위를 더 줄이면 2002년과 2003년. ‘구도’라고 불리며 뜨거운 야구 열기를 자랑하던 부산의 야구팬들이 그 야구를 멀리하던 시기이다. 야구 인기의 근간히 되어야 할 어린이 팬들은 학교에서 야구 얘기를 하지 않았고, 야구를 언급한다고 해도 이미 2~3년은 지난 박정태-펠릭스 호세-마해영 이야기만 했다. 굳이 잠바를 입고 야구를 보러 가겠다는 아이가 나오면 마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오는 동네 반장처럼 “너 안 덥냐?”라는 반응이 나오곤 했다. 농구팀은 울산으로 도망가고, 축구팀은 1990년대 말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던 부산 스포츠의 암흑기였다.

특히 2002년은 롯데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로 모기업이 주저앉은 3년 전 쌍방울 레이더스가 기록한 역대 최다 97패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2001년 말 기준 재계 순위 6위 롯데그룹이 운영하던 야구팀이 깰 뻔했다(시즌 35승 1무 97패). 일각에서는 연봉 1위를 차지하고도 꼴찌에 머물렀던 2019년을 최악으로 꼽기는 하나, 그래도 투자 자체는 했었던 2019년과 아예 개선의 의지조차 없었던 2002년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6월 단행한 감독 교체(우용득→백인천)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롯데는 심해로 가라앉았다. 구단이 손을 놔버리자 팬들도 관심을 놔버리면서 10월 19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 최종전에는 양 팀 선수단과 코칭스태프를 합친 숫자보다도 적은 69명의 유료 관중만이 사직야구장을 찾기도 했다.

이렇듯 최악의 한 해를 보낸 롯데였지만 그래도 잠깐은 팬들에게 웃음을 줬던 경기도 몇 차례 있었다. 물론 시즌 성적을 보면 드러나듯 이런 승리는 ‘회복’이 아닌 ‘진통제’ 역할일 뿐이었지만 그런 경기라도 없었다면 팬들은 암흑기를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2002년에는 그 진통제가 조금 일찍 처방됐다는 게 문제였지만.

한화와의 2002시즌 개막 3연전에서 1승 2패를 기록한 롯데는 장소를 사직으로 옮겨 삼성 라이온즈와 홈 개막 시리즈를 가졌다. 삼성은 3위부터 8위까지 순위를 예측할 수 없었던 2001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독야청청 1위를 질주한 강팀이었다. 여기에 시즌이 끝나고는 노장 김기태와 김동수 등을 내주고 SK 와이번스로부터 좌완 오상민과 외국인 유격수 틸슨 브리또를 영입했다. 전력 강화는커녕 있던 전력마저도 이중계약 파문(호세)과 FA(김민재)로 내보낸 롯데와는 비교할 수 없던 전력이었다.

그런데 시리즈 첫날부터 롯데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9일 경기에서 롯데는 2대 5로 뒤지던 5회 말 무사 1, 3루에서 김대익의 희생플라이로 추격을 시작했다. 이어 삼성 2루수 김재걸의 실책까지 나오며 롯데는 한 점 차까지 따라잡았다. 이대호의 볼넷으로 만루 찬스를 잡은 롯데는 7번 박정태가 삼성 두 번째 투수 오상민에게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리며 단숨에 경기를 뒤집었다. 삼성의 추격을 한 점으로 막은 롯데는 8대 6 승리를 챙겼다. 그러나 이 경기는 다음 경기를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다.

시리즈 2번째 경기에서 롯데와 삼성은 각각 낼 수 있는 최고의 선발 카드인 손민한과 임창용을 마운드에 올렸다. 임창용은 비록 4사구를 4개나 내주기는 했지만 위력적인 구위를 뽐내며 7회까지 롯데 타선을 1안타 8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반면 손민한은 1회부터 이승엽에게 투런 홈런을 맞으며 흔들렸다. 그래도 5회까지는 3실점으로 잘 버텼던 손민한은 6회 3루수 박현승의 실책에 이어 고교-대학 동창인 진갑용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면서 무너졌다.

7회가 끝났을 때 스코어는 0대 5, 삼성의 리드였다. 삼성의 뒷문에는 믿을맨 김현욱과 전년도 마무리 투수였던 김진웅 등이 남아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롯데의 역전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롯데는 8회 말 김응국의 2루수 쪽 땅볼로 한 점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역전이라는 단어는 너무 먼 곳에 있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9회 말 삼성 마무리 김진웅을 상대로 1아웃 후 7번 임재철이 안타로 출루하며 마지막 추격의 불씨를 살렸다. 그러나 대타 이대호가 삼진으로 돌아서며 롯데는 경기 패배까지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놓게 됐다.

그런데 교체 출전한 조성환이 좌전안타로 살아나간 뒤 박현승이 적시타를 기록하며 롯데는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이어 김대익까지 볼넷으로 나가며 롯데는 만루 찬스를 맞이했다. 타석에는 전 이닝 타점을 올리며 팀의 첫 득점에 기여했던 백전노장 김응국이 들어섰다. 공 2개를 보낸 김응국은 김진웅이 던진 세 번째 공에 그대로 방망이를 내밀었다. 잘 맞은 타구는 밤하늘을 날아 오른쪽 관중석에 그대로 꽂혔다. 만루홈런, 짜릿한 끝내기 만루홈런이었다. 이 홈런으로 롯데는 1대 5로 뒤지던 경기를 한순간에 6대 5로 뒤집어버렸다. 역대 최초 9회 말 2아웃 4점 차 역전승이었다.

박정태와 김응국은 당시 롯데에서 최고참 라인에 속하는 선수들이었다. 2001년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을 실망하게 했던 두 선수는 2002시즌 시작과 함께 극적인 그랜드슬램을 터트리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응국은 시즌 내내 꾸준한 타격감을 선보이며 타율 0.284를 기록, 중심타선을 지켰다. 트레이드설에 휘말리며 9월 초까지 2할대 초반 타율로 고전하던 박정태도 날이 선선해지자 맹타를 휘두르며 타율을 0.262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나 큰형님들이 분전한다고 해서 팀을 바꿀 수는 없었다. 초반 한때 타격 3위까지 오르며 기대를 모았던 이대호가 시즌 중반부터 견제에 시달리며 주춤했고, 최기문과 박현승을 제외한 선수들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투수진은 더 심각했다. 손민한과 염종석이 분전하기는 했지만 외국인 대니얼 매기의 트레이드 이후 선발진에는 구멍이 났다. ‘마쓰이 킬러’ 김영수는 무려 18패를 거뒀고, 선발과 불펜을 오간 4년 차 김사율 역시 11패를 떠안았다. 1999년 투수왕국 롯데를 이끈 문동환과 주형광, 박석진마저 부상으로 이탈하며 롯데는 결국 모두가 아는 최악의 한 시즌을 보냈다.

2002년 4월 10일 삼성-롯데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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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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