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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야구 선수 아니고 그냥 체대생입니다. 야구 말고 유도나 태권도도 하고 해부학이랑 심리학도 배워요. 남들처럼 팀플 하다가 쓴맛도 보고요.”
전역 후 처음으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 조지훈(가명)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정신없다. 일어나자마자 온라인으로 화상 강의를 듣고 수업이 끝나면 조원들과 조별 프로젝트 회의를 한다. 간단하게 배를 채운 후엔 남은 강의를 듣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간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가 잠에 든다.
빡빡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남들 다 하는 평범한 대학생활이다. 요즘엔 학교도 안 가고 모든 걸 집에서 하는데 뭐가 힘드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훈씨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군대를 다녀오기 전만 해도 프로를 노리던 엘리트 야구 선수였다.
이제껏 야구 말고는 해본 게 없었어요
지훈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새벽까지 배트를 휘두르고 무릎 위부터 엉덩이까지 피멍이 들도록 맞으면서도 버틴 그는 야구 명문으로 꼽히는 중고등학교에서 주전을 꿰찼다. 고교 졸업 후 프로에 가지는 못했지만 대학에 진학해 꿈을 좇았다.
그러나 대학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외야수였던 그는 돌파구를 찾고자 투수 전향을 시도했고 독립 야구단을 찾아가 개인 훈련을 하며 구속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었다. 입스(YIPS)가 온 것이다.
“투수할 때 괜찮았어요. 구속이 꽤 올라왔거든요. 근데 어느 날 선배랑 캐치볼을 하는데 갑자기 선배한테 공을 못 던지겠는 거예요. 입스가 온 거죠.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레슨장에서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러다가 한 프로구단 전력분석팀이 레슨장에 선수들 체크하러 왔어요.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스트라이크를 한 개도 못 던졌어요. 그날 마음먹었죠. 야구 그만해야겠다고.”
지훈씨는 미련 없이 야구를 그만뒀다. 시간을 갖고 다시 한번 노력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프로 진출이 힘들다면 새로운 경험을 쌓아 남들보다 앞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야구를 그만두니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제껏 야구 말고는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야구를 배웠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다른 애들이랑 똑같았어요. 수련회도 가고 체육대회도 뛰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근데 중학교부턴 달랐어요. 수업을 4교시까지만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이마저도 줄어서 2교시까지만 들었어요.”
지훈씨는 중학생이 된 이후 오후에 교실에 있어본 적이 없다. 중학생 땐 4교시가 끝나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했다. 운동하기 전에 점심을 먹는데 이때도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공간에서 야구부끼리 밥을 먹었다. 고등학생 때는 운동 시간이 더 늘어났다. 고교 레벨에선 나무 배트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근력을 키워야 했고 프로 진출도 준비해야 했다. 운동량이 배로 늘어나며 교실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세 시간 남짓이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야구만 하다 보니 공부는 손도 댈 수 없었다. 거기다 수업에 거의 들어가질 않아서 반 친구들을 사귈 기회도 적었다. 지훈씨에게 야구부가 아닌 일반 학생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동창생 두 명뿐이다. 야구부 동기 중엔 같은 반 친구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동아리나 부 활동은 당연히 경험해보지 못했고 취미 역시 쉬는 시간에 했던 PC 게임이 전부였다. 그랬던 그가 평생 해 온 야구를 놓았으니 앞길이 막막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지훈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 진출만을 바라보는 학생 야구 선수들은 학생 신분임에도 학교에서 수업이 아닌 야구를 배운다.
교과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학생 야구 선수의 학업을 돕는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육계와 체육계는 학생 선수의 저조한 학습 참여도와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주말 리그와 최저학력기준 강화를 시행하고 출전으로 인한 수업 결손을 보충할 수 있는 이 스쿨(e-school)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주말 리그 해도 공부 안 하죠. 애초에 수업을 2교시 밖에 안 듣는데요 뭐. 그리고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교과서도 안 줬어요. 학교마다 다를 텐데 저희 야구부엔 교과서 가진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저는 교과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2019년 대한야구협회(KBA)와 대한축구협회(KFA)에 등록된 322명의 학생 선수에게 수업 참여 형태를 물은 설문조사에서 41.3%가 ‘아침조회만 참여한다’고 답했고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비율도 33.4%에 달했다. 비교적 최근의 조사임에도 응답한 학생 선수의 70% 이상 수업을 듣지 않고 있었다. ‘공부하는 학생 선수’ 육성 프로그램은 학생 선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공부하는 ‘척하는’ 학생 선수를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공부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프로그램의 실효성과 별개로 다수의 학생 야구 선수와 부모, 지도자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정책에 부정적이다. 수업 참여로 인한 훈련 부족으로 프로나 대학 진학에 필요한 개인 성적이 나빠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저는 주말 리그 안 좋다고 생각해요. 야구하다 보면 한번 감이 올 때가 있거든요. 그때 꾸준히 경기에 나가면 감을 유지해서 잘 할 수 있는데 주말 리그를 하면 일주일에 한 번 경기하니까 그게 쉽지 않아요. 또 일주일 사이에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이들이 공부의 필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학생 선수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야구 선수로서 마주하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돌이킬 수는 없다. 공부를 시작하기엔 앞서간 이들과의 격차가 좁히기 어려울 만큼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평생 해 온 야구밖에 없다.
지훈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프로에 갈 거라고 장담했다. 신입생 시절 주전 선배들의 부상 속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한 경기에서 멀티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3학년 때까지 주전으로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현실의 벽은 높아졌고 목표는 낮아졌다. 처음엔 프로였던 목표가 ‘인 서울’ 대학이 됐고 시즌을 망친 3학년 땐 대학 진학이 됐다. 그래도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는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하셔서 아버지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는데 보통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누구든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고 길이 좁아지는 걸 알아요.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데도 그만두지는 못하죠. 할 수 있는 게 야구밖에 없으니까요. 만약에 고3 때 야구 그만두고 공부 시작하면 어느 대학을 갈 수 있겠어요. 못 가죠. 그리고 또 부모님의 기대도 있으니까, 그래서 못 그만둬요. 울며 겨자 먹는 거죠.”
고립된 학생 야구 선수
지훈씨의 이야기엔 대한민국 학생 야구 선수의 고민이 압축돼 있다. 상급 학교로 진학하며 프로 진출과 대학 진학의 높은 벽을 맞닥뜨린 학생 선수들은 야구 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야구를 중간에 그만두는 건 엄청난 부담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학업 성취도로 인해 야구를 그만뒀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진로의 폭이 일반 학생보다 현저히 좁기 때문이다. 또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에도 시달린다.
이처럼 학생 야구 선수들도 일반 학생들처럼 진로에 대한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다. 그러나 고민에 대해 조언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조언해 줄 사람? 솔직히 없어요. 학교에도 야구부에도. 선배들은 프로나 대학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힘들어해요. 조언해 주는 사람도 가끔 있긴 한데 웬만하면 없어요. 감독님이나 코치님,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진로 문제에 대해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야구부에선 모든 질문과 대답이 야구를 중심으로 오고 간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야구하는 사람밖에 없었던 이들에겐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야구부 바깥의 환경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맡은 반 학생들의 대학 입시가 우선이다. 또 오랫동안 야구를 해오며 교실과 격리된 탓에 비슷하게 진로 고민을 할 법한 일반 학생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다. 학생 야구 선수가 선수 이외의 진로를 선택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교 내 창구가 사실상 전무하다.
학생 ‘야구 선수’ 아닌 ‘학생’ 야구 선수
학생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세계인 학교에서 학생 야구 선수는 ‘별종’이다. 학교는 공부가 아닌 다른 재주로 먹고 살아갈 이들에게 도와줄 게 없다거나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구만 잘하면 돼’라는 마법의 주문은 학생 야구 선수들의 방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학생 야구 선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공부보다 야구를 많이 한다는 것을 빼면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책상을 쓰는 수십 명의 학생들과 다를 게 없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더 잘할까’는 학생 야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지만 유일한 고민은 아니다. 이들도 여느 십 대처럼 학업으로 스트레스 받고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다. 때론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달콤한 연애도 꿈꿔본다. 그리고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학생 야구 선수는 야구 선수이기 전에 학생이다. 이제는 이 땅의 학생 야구 선수들이 학생 ‘야구 선수’가 아닌 ‘학생’ 야구 선수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야구공작소 김진우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곽찬현, 송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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